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22화 (22/179)

#22

제법 긴 탐독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진짜 그냥 야설이네.’

사람의 의식을 홀리고 그 정기를 흡수하는 건 몽마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어떻게’ 홀리느냐와 ‘어떻게’ 잡아먹느냐에 따라 다양한 종들이 갈린다.

먼 옛날 어떤 고위 마물은 인간 여자로 위장하여 사람들을 홀려 관계를 맺었다. 그 대상으로 여자나 남자를 가리지도 않았다.

엘리엇은 정신계 마물과 관련된 모든 사례들을 수집해 이곳에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점은, 그가 ‘연구’라는 기본 목적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이나는 책의 중반부에서 새벽에 자신이 죽인 마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없었다. 대부분이 그녀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혹시 누군가 잡아 와서 풀어 놓은 걸까?’

워낙 희귀한 종이었다. 세이나도 많은 곳을 누볐지만 단 한 번밖에 마주치지 못했다.

‘이 근처에 서식하는 마물도 아니란 말이지…….’

몸을 일으킨 그녀는 사건·사고들을 기록해 둔 책이 있는 자료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너무 많은 책이 있어서 쉽게 뭔가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마물과 관련된 사고는 비일비재했다. 세이나는 오랜 고민 끝에 두꺼운 책 1권을 꺼내 들었다.

도저히 서서 볼 수 있는 두께가 아니다.

긴 갈등 끝에 세이나는 결국, 가장 큰 자료실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도망쳐 나온, 그리고 지금은 디온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자료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잔뜩 긴장해 있는 그녀의 시선에 익숙한 뒤통수가 하나 들어왔다.

‘진짜 자네?’

세이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의자를 꺼내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책을 내려놓고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여 바로 옆을 살폈다.

디온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는 평소보다 훨씬 온순해 보였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인, 보기만 해도 목이 뻐근해지는 불편한 자세에도 그는 아주 곤히 잠들었다.

그는 자는 모습도 몹시 근사했다. 전생에 보았던 유명인의 화보 같았다. 저기에 안경까지 걸쳐 놓으면 딱 지적인 미남이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공부는 정말 싫어한다고.’

어찌나 심각하게 말하던지.

고민 상담이라도 해 줄 뻔했다.

돌이켜 보니 참 우스운 상황이었다. 예고대로 자고 있는 것도 좀 재미있었다. 그의 앞은 1권의 책도 없이 깨끗했다.

‘알면 알수록 이상한 사람이야.’

곱게 자란 도련님인 줄로만 알았더니, 의외의 면모가 많다.

세이나가 책을 펼친 건 그로부터도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대로 구경하다가는 몇 시간이 지나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세이나는 어렵게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팔뚝만 한 높이의 그것은 빽빽한 글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세이나는 그걸 한참 들여다보다가…….

졸았다.

“아.”

하마터면 큰 소리를 낼 뻔했다.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 그 자세 그대로 세이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시선이 갔다.

디온은 아직 자고 있었다.

‘옆에서 이러니까 더 집중이 안 되잖아!’

세이나는 입술을 씹으며 책을 덮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다시 읽을 생각이었다. 그와는 달리 양쪽 손을 겹치고 그 위에 머리를 두는 자세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개 방향이 문제였다. 익숙한 방향은 오른쪽인데, 이쪽에는 아직 디온이 쿨쿨 자고 있다.

정신없이 자다가 추한 모습을 보이면, 그땐 정말로 민망해진다.

세이나는 어쩔 수 없이 왼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의 정원은 매우 평화로웠다. 가을 햇볕이 내려앉은 풍경을 감상하며 세이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망할 공작 같으니, 거기 서지 못……!’

꿈속의 절박한 외침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었다.

고개를 마구 가로저으며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렸다. 곧, 번쩍 상체가 일어났다.

그리고 쿵!

세이나는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해!” 하는 비명은 다행히도 그녀의 입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나 무릎과 책상이 부딪친 소음을 막기엔 무리였다.

‘아오, 아파. 미친…….’

입술을 꽉 깨물며 미친 듯이 무릎을 매만졌다. 무의식중에 휘두른 무릎은 굉장한 소리와 함께 큰 충격을 주었다.

세이나는 그 와중에도 옆을 확인했다.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하, 다행이다.’

넓은 공간에는 오직 그녀 혼자밖에 없었다. 적막만이 내려앉은 자료실은 시간이 멈춘 곳 같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은색 머리칼은 보이지 않았다. 세이나는 무릎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디온?”

혹시, 버려진 건 내 쪽인가?

‘에이, 설마.’

스스로를 달래긴 했지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있는 자료실에서는 조금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이나는 자료실을 나가 복도를 걸어갔다. 문득 발길이 향한 곳은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자료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발을 들였을 때.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보라색?’

키가 큰 사람이었다. 잿빛 로브를 걸치고 후드까지 꼼꼼히 눌러썼다. 그는 작은 종이를 읽더니 바로 구겨 제 품 안으로 넣었다.

세이나는 얼마 전에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 머리 색이 어둡긴 했으나, 더 길었습니다. 그리고 묘한 보랏빛이 있었죠.

엘렌을 방문한 남자와 같은 머리 색이다.

* * *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후드를 쓴 자는 점점 더 도서관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한 구역. 그렇게 쓰여 있는 팻말을 몇 개나 지났는데도 주춤하거나 물러서는 기색은 없었다.

그가 최종적으로 이른 곳은 제한 구역 중에서도 금지된 서적을 보관하는 구역이었다.

항상 입구가 자물쇠로 잠겨 있는 그곳은 놀랍게도, 오늘은 열려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반면, 세이나는 조금 망설였다.

‘분위기가 위험해 보이는데…….’

긴 헌터 생활 동안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그녀의 예리한 직감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직감이 지금 저자가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곳에 발을 들이기 위해선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도.

‘잘 생각해 봐, 만약 추적을 들킨다면?’

도서관은 문서 보호를 위해 마법 사용이 금지된 곳이었다. 규칙도 그랬고, 마력 운용을 억제하는 마도구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

순수한 몸싸움이라면, 승산이 있었다.

생각을 마친 세이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뒷모습을 따라 모퉁이를 돌아가던 바로 그 순간.

저벅.

저벅.

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미친! 왜 갑자기 돌아오는 거야!’

세이나는 황급히 왔던 방향을 돌아갔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녀가 온 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양옆이 막힌 진퇴양난의 상황.

세이나는 빠르게 옆에 있는 책장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여기에 서 있다가는 바로 발견될 게 분명하니, 책장의 뒤에 몸을 맞춰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책장의 끝에 이르기 직전. 세이나의 발이 멈춰 섰다.

그녀의 앞에 갑자기 팔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어?’

그리고 그 팔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또다시 ‘어?!’하며 당황한 찰나. 강한 힘이 그녀를 앞으로 잡아끌었다.

‘어어!?’

그녀의 몸이 맥없이 앞으로 쏠렸다. 다른 쪽 팔이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어깨를 잡은 그 손은 거칠게 그녀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눈 깜짝할 새 양손이 묶였다. 세이나는 어느새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황망한 시선이 위로 향했다.

푸른색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속삭였다.

“쉿.”

세이나는 디온을 발견하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지금 그녀는 완전히 그에게 안긴 상태였다.

자신의 귀가 그의 몸에 닿아 있는 게 느껴졌다.

그녀를 일깨워 준 건 중후한 목소리였다.

“따라오는 자는 없었겠지?”

“네. 후작님.”

그녀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후작. 그 단어에 긴장으로 묶여 있던 사고가 움직였다.

“칼만 공작이 알아차린 것 같다.”

꽤 나이가 있는 자의 음성이었다. 목이 좋지 않은지 쇳소리가 살짝 섞여 있다. 그는 조금 시간을 끈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먼저 엘렌을 찾아야 해.”

세이나는 어렵지 않게 그의 정체를 추리할 수 있었다.

‘유클레스 후작!’

* * *

유클레스 후작.

그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소설이 그러하듯 초반부는 여주인공의 삶과 심리에 대해서 서술한다.

기억 속 그 소설도 그랬다. 엘렌의 시점에서 그녀의 과거와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엘렌은 유클레스 후작을 ‘애매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후작은 사생아인 그녀를 제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좋은 방을 내주고, 좋은 옷을 주었다. 좋은 음식에 말벗이 되어 줄 전담 하녀도 붙였다. 어렸을 때는 연회도 종종 데려갔다.

하지만 서로 대화를 나눈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나가다 눈이 마주치면 하는 인사가 전부. 그는 엘렌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따뜻한 손길도, 칭찬도, 하다못해 따끔한 호통도 없었다.

그는 집 안에서 엘렌을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를 마주칠 때면 혹 자신이 투명 인간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매번 불쑥 떠올랐다.

그래서 ‘애매했다.’

귀족 영애로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 준 사람도 그.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무시하는 사람도 그다.

싫어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혹은 정말 관심이 없는 건지.

엘렌의 생활 대부분은 유클레스 후작 부인과 그 아이들이 차지했다. 그들이 엘렌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정말, ‘괴롭힘’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계단에서 넘어지기도 일쑤. 더러운 물을 맞는 것은 일주일에 몇 번은 꼭 있는 행사였다.

후작가의 영악한 아이들은 제 친구들을 불러 엘렌의 험담을 하기를 즐겼다.

몸보다 힘든 것은 정신이었다.

엘렌은 식사 시간을 가장 싫어했다.

아이들은 환한 웃음을 터트리고, 후작 부부는 그런 아이들을 한없이 예뻐하기만 했다. 시중을 드는 하인들도 미소를 짓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엘렌에게 말을 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돌이나 모래를 씹어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 도망치고 싶다.

그리하여 결심을 내리고 떠나는 날.

짐을 들고 떠나던 엘렌은 잠시 후작의 방 창문 아래에서 멈춰 섰다.

-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미안해요.

내가 부족해서 그 사람들과 잘 못 지내나 봐요. 나는 후작가에 맞지 않는 사람이에요.

- 제가 사라지면, 아버지는 더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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