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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21화 (21/179)
  • #21

    세이나는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먼저, 모험가 협회 소속 마법사들에게 어제의 소동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협회에는 ‘탐지 부서’라고 하는 마물의 동향을 감지하는 일만 하는 마법사들이 있다.

    그들이 어젯밤의 이변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그 건은 이제, 디온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두 번째는 치안대였다. 기사들을 들쑤시면서 혹 수도 내 마물을 발견하지 않았는지 물어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디온이 붙어 버렸으니, 가장 뒤에 있던 계획이 앞으로 왔다.

    바로 도서관.

    세이나는 새벽에 자신이 직접 죽인 마물에 대한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더하여 수도에서 마물이 나타난 사례도 찾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겪었던 일 덕분에 당초의 계획이 밀려났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제 다른 의구심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루셀 도르? 그게 누구야?’

    디온이 내밀은 헌터증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게 뭐지?’라고 생각한 순간, 디온이 태연한 얼굴로 헌터증을 받아 품 안에 넣었다.

    바로 그 ‘루셀 도르’의 헌터증을 말이다. 대답도 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자신이 루셀 도르라도 된다는 양.

    그 후로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서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서 지금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 옆에는 디온이 있다.

    디온?

    ‘디온이…… 맞나?’

    그러던 중,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세이나의 걸음도 멈췄다. 몇 발자국 뒤에 남아 있는 디온이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세이나. 말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세이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디온의 표정이 몹시 진지했다. 아니, 평소에도 진지한 사람이긴 하지만 지금은 좀 더 진지하다.

    세이나는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가는 이 하나 없는 복도 속, 파란 눈을 가진 남자가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하고 있다.

    혹시.

    ‘저는 루셀 도르입니……다?’

    그제야 ‘디온 프라벨’이라는 인물을 직접 본 사람이 헌터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에 대한 소문 중에 ‘미남’이라는 수식어가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루셀’과 ‘디온’은 철자도 완전 다르다. 동명이인이 아니라 헷갈릴 리도 없다.

    만약, 저 사람이 디온이 아니라면…….

    ‘왜?’

    “사실 저는…….”

    디온이 그녀의 앞에 섰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세이나에게는 비밀을 속삭이는 모습으로 보였다.

    “저는…….”

    “저, 저는……?”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도서관이랑 정말 안 맞습니다.”

    “……네?”

    “자게 될지도 몰라요. 그래도 버리고 가지 말아 주세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세이나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채, 책을 안 좋아하나 보네요?”

    “예. 무척 싫습니다.”

    진지한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진심으로 보인다. 그래서 또 세이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무겁게 할 이야기야?!’

    분명 출생의 비밀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할 말이 겨우, ‘전 이제부터 잘 겁니다.’라는 선언이라니.

    긴장이 사라지고 맥이 탁 풀렸다. 세이나는 갑자기 피로감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안 되겠다.

    “루셀 도르는 누구예요?”

    이미 속으로 몇 차례 곱씹었던 질문은 예상보다 쉽게 흘러나왔다. 세이나는 바로 디온의 표정을 관찰했다.

    큰 비밀을 고백한 그는 조금 개운해진 것처럼 보였다.

    “아, 아버지께서 만들어 준 겁니다. 누군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어디서나 쓰기 편할 거라고 하나 주셨습니다.”

    “그래도 디온의 이름으로 하는 게 좋을 텐데.”

    “제 형제들은 제가 헌터가 되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괜한 분쟁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세이나가 진지해졌다.

    ‘프라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헌터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또 쓰레기.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또 하나 있었다. 모두, 협회장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

    디온은 가족들의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협회와 거리를 둔 것 같았다.

    “뭐, 저도 관심 없기도 하고.”

    그러고 그는 픽 웃었다. 나름대로 납득이 갈 만한 설명에 세이나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래도 협회장님이 디온을 꽤 생각해 주나 봐요. 가짜 신분증도 만들어 줄 정도면.”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세이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협회장 이야기는 완전 지뢰인 모양이다.

    ‘절대로 말하면 안 되겠네.’

    ‘루셀 도르’에 대한 설명은 그럭저럭 이해가 되었다. 세이나는 제 안의 의심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칼만 공작도 그를 보자마자 ‘디온 프라벨’이라고 알아보지 않았던가.

    ‘그럼 둘은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 걸까?’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다.

    먼저, 공작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준 뒤에.

    * * *

    자료실 안은 매우 한적했다. 그냥 조용한 것이 아니라 아예 사람이 없었다.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고 묘하게 상쾌한 느낌도 있었다. 나무 냄새가 조금 나기도 했다.

    이곳을 통째로 빌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세이나는 마음 편히 책장 사이로 들어갔다. 문제는 상처를 입은 손이었다. 무심코 왼손으로 책을 꺼내려던 그녀가 확 눈살을 찌푸렸다.

    단단한 붕대가 손바닥은 물론 손가락까지 모두 감싸고 있어 답답하고 불편했다.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하며 오른손을 올리던 그녀의 위로 불쑥 다른 팔이 끼어들었다.

    “이것 맞나요?”

    디온은 세이나보다 훨씬 키가 커서 발끝을 세우지 않고도 쉽게 책을 꺼낼 수 있었다. 세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책을 받아 들었다.

    엘리엇 라프만. 눈에 익은 이름이었다.

    “평생 마물만 쫓아다니면서 연구하던 사람이에요. 최초로 마물 도감을 완성한 사람이기도 했고.”

    “연구 주제는…….”

    “정신계 마물. 어젯밤 지하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종이에요.”

    “같이 볼래요?”라고 말하면서 세이나는 책장을 열었다.

    아무렇게나 펼친 페이지에는 뜻밖에도, 글자만 가득 차 있었다.

    세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물의 그림이나, 혹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으리라 예상했다. 양쪽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건 오직 글밖에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 주문을 끝으로 나는 내 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은 꺼지지 않았기에, 나는 내 위로 거침없이 올라탄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가 혓바닥으로 제 입술을 핥았다. 붉은 손톱이 선 손이 내 허벅지를…….

    ……까지가 그녀가 읽을 수 있는 선이었다.

    쿵. 책이 닫혔다. 세이나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여, 역시 혼자서 찾아보는 게 낫겠어요.”

    하지만 귀가 빨갛게 변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얼굴에 열기가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뜨거운 물처럼 끓었다.

    읽었나? 읽었을까?

    ‘읽었겠지! 망할, 같이 볼래요? 라고 내가 말했잖아!’

    엘리엇 라프만의 몽마 연구는 그의 경험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마물에 미친 사람’이라는 별명처럼 직접 마물의 독이나 마법을 직접 제 몸으로 경험했다. 몽마도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너무 상세해서 몽마의 꿈에서 뭘 봤는지도 구체적으로 작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생생해서 낯이 뜨거웠다.

    ‘이게 야설이야 연구서야?’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동행인을 끼고 읽을 만한 것이 절대 아니다.

    씩씩하게 자료실에 들어서자마자 꺼내 들은 게 야설이라니!

    민망해서 고개를 들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옆에서 그가 그녀를 불렀다.

    “세이나.”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세이나는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예상대로 디온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만큼, 아니 고개를 조금만 숙여도 바로 그와 부딪칠 것만 같다.

    맑은 눈동자는 오늘도 빛을 품고 있었다. 긴 속눈썹을 넘어, 콧대를 따라 움직이던 세이나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서 정지했다.

    “엘리엇 라프만이라는 분은…….”

    쿵쿵. 심장이 가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연구 정신이 투철하신 분이셨네요.”

    “네, 네! 그러게요. 하하하하.”

    망할. 읽었다. 저건 읽은 사람의 음성이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저 변태 아닙니다!’라고 해야 할까. 젠장, 이게 더 변태 같은데.

    겨우 하나의 판단이 내려졌다. 일단 좀 떨어져야겠다.

    세이나는 그를 바라보는 그대로 게처럼 옆으로 빠져나갔다. 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하는 생각은 미처 할 겨를이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디온이 저 멀리 있었다.

    세이나는 급히 외친 후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디온은 쉬, 쉬고 있어요! 저 혼자 할게요!”

    정신없이 걸어 도착한 곳은 도서관에 있는 또 다른 자료실이었다.

    한쪽 구석에 주저앉은 채, 세이나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였다.

    ‘망할 엘리엇 라프만!’

    가장 존경하는 헌터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의 이름을 당당히 입에 올린 게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더 짜증 나는 사실은, 아직 그의 책이 손에 있다는 것이었다.

    혼자 몰래 읽으려고 도망친 것 같지 않은가!

    ‘망할 엘리엇 라프만!’

    속으로 몇 차례 더 그를 씹어 보았으나 기분은 썩 나아지지 않았다.

    세이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있는 곳은 문학 자료실이었다.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마물 자료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세이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좌절했다.

    이제 진짜 혼자 읽으려고 가지고 도망친 게 되어 버렸다.

    ‘망할 엘리엇 라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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