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3. 은밀한 일은 도서관에서
왜 소름이 돋았는지는 모르겠다.
전혀 예상치 못한 등장이어서일까, 혹은 이틀 만에 보는 얼굴이라서일까. 혹은 손목을 잡은 체온이 너무 차가워서일지도 모르겠다.
마주친 눈동자는 몹시 서늘했다.
이유 모를 냉기를 느끼며 세이나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손은 잡혀 있는 상태.
인형처럼 희고 고운 얼굴이 정확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세이나는 뒤늦게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뒷골목 이후로는 처음 보는 거지.’
착실하고 바른 도련님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어져 버린 후, 세이나는 디온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혼란을 느꼈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마르셀이 들이닥쳤고, 공작과 엮였다.
잠시 미뤄 두었던 숙제가 더 커져서 돌아온 느낌이다. 햇살을 받은 은색 머리칼이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그날, 뒷골목에서 본 것도 이렇듯 신비로웠다. 그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세이나.”
“……네, 네?”
“다쳤어요.”
세이나는 물끄러미 잡힌 손목을 바라보았다. 디온의 시선도 그 위로 떨어졌다. 어쩐지 민망함을 느끼며 세이나는 급히 손을 뒤로 빼내었다.
“벼, 별거 아니에요.”
왜 말은 더듬어서 나오는 건지. 세이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어쩔 수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너무 낯설었다. 게다가 방금 전의 표정이…….
‘꽤, 살벌했는데.’
좀 전부터 느껴졌던 긴장감의 원인은 아마 그것인 듯했다. 상처를 내려다보던 디온의 눈빛은 그가 그간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세이나는 오늘의 디온이 퍽 어색했다. 그녀가 어렵게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엘렌을 보러 왔군요? 엘렌은 안에 있는 것 같…….”
“어쩌다 다쳤습니까?”
“네?”
가라앉은 목소리가 창날처럼 훅 다가왔다. 분명 제대로 들었음에도, 세이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잘 세공된 인형처럼 표정 없이 매끄럽던 얼굴에 일순 균열이 일었다.
원체 잘난 얼굴이라서 일까. 그 변화는 세이나에게 꽤 극적으로 보였다. 그저 조금, 눈살을 찌푸리는 것인데도 말이다.
세이나는 그에게서 작은 감정을 읽어 냈다.
‘걱정?’
조금 이상한 형태긴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분명, 짜증이 맞았다. 내려다보는 눈은 살벌했고 인상도 구겨져 있으니까.
세이나는 어쩐지 그게 걱정같이 느껴졌다. 그녀가 뒤로 숨겼던 손을 펼쳐 보였다.
“치료 잘했어요. 이것 봐요.”
“…….”
디온의 시선이 다시 손에 닿았다. 그렇게 잠시, 길거리에서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세이나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먼저 고개를 든 쪽은 세이나였다. 그녀는 그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다 빙긋 웃었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정말 어렸다. 몇 살일까? 스물? 스물둘? 확실한 건, 자신보다는 어렸다.
유순한 눈매 속 눈동자가 면밀히 그녀의 손을 살피고 있다.
“사고였어요. 별것 아니에요.”
“무슨 사고를 당했기에 손바닥이 다 상합니까?”
여전히 짜증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어린아이가 툴툴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세이나가 입을 열었다.
“디온. 혹시 시간 있어요?”
* * *
클리포르는 제국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스토랑 중 하나로, 예약제로만 손님을 받는 것으로 익히 알려진 곳이었다.
엄선된 재료들, 우수한 요리사, 값비싼 인테리어로 꾸며진 개별 방들. 무엇보다 귀족들이 클리포르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곳이 비밀을 숨기기에 좋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클리포르 안에서 한 이야기는 절대로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
누가, 어디서, 가장 먼저 그 말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소문대로 클리포르는 귀족들이 원했던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디온이 클리포르로 세이나를 데려간 이유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세이나는 화려한 레스토랑에 전혀 위압되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이 쏠린 곳은 따로 있었다.
오직, 음식.
“그렇게 된 거였군요. 마물이라니…….”
심각한 어조로 그가 말했지만 세이나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니 혹시 마물과 관련된 소식을 들으면 말해 주세요.’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세이나가 고기들을 우물대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에는 또, 포크로 다른 고기를 집었다. 디온이 웃으며 말했다.
“음식이 입에 맞나 보네요.”
다시 조용한 대답이 돌아왔다. 끄덕끄덕. 고기를 씹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육즙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정말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맛있지?’
식당에 도착한 직후, 세이나는 디온에게 어젯밤 있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어젯밤의 마물에 대한 단서를 그에게서 얻어 내기 위함이었다. 디온은 협회장의 아들이다. 접하는 정보의 수준이 세이나와 달랐다
하지만 어느새 그 사안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전채 요리부터 시작해서 수프, 빵과 샐러드에 메인 디시까지.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릇 위에 놓인 음식들은 하나하나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맛은 보는 것보다 환상적이었다.
‘세상에, 맙소사.’
씹을 때마다 혀끝에 느껴지는 맛이 황홀했다. 먹어도, 먹어도 계속 손이 갔다.
고기가 단 2조각만 남았을 때는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세이나는 슬픈 눈으로 어느새 비어 버린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디온을 알아차렸다.
“……뭐라고 하셨죠?”
다행히도 그는 기분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왜 식사를 하지 않고 턱을 괴고 바라보기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웃고 있긴 하다.
세이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남은 고기를 하나 더 입으로 가져갔다. 아, 이제 다 먹었네.
“엘렌을 만나러 온 건데, 저랑 이렇게 있어도 괜찮나요?”
“오늘은 세이나를 만나러 간 겁니다.”
“저를, 왜요?”
“저번에 제가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서.”
뒷골목을 떠올리던 세이나는 곧 다른 ‘저번’을 떠올렸다.
포기해야겠다. 그렇게 말한 후 디온은 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디온이 드디어 나이프를 들었다. 세이나는 그가 고기를 써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같은 나이프에, 같은 접시일 텐데 왜 저와 달리 우아하게 보이는 건지.
디온은 잘 교육 받은 귀족 도련님이 확실했다. 뒷골목에서의 모습은 뭘까?
‘이중인격?’
그럼, 어느 쪽이 진짜지?
“세이나. 다음부터는 공작을 돕지 마세요.”
“네?”
“첫인상도 좋지 않았을뿐더러, 다치지 않았습니까. 공작은 소문이 좋지 않습니다. 엮여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음, 그건 잘 모르겠어요.”
디온의 나이프가 멈췄다. 세이나는 가지런하게 썰려 있는 스테이크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 갔다.
“일단 이웃이기도 하고. 저도 도움을 받기도 했고. 그때의 앙금은 다 없어졌어요. 사실.”
새로운 앙금이 생기긴 했지만.
“이제 뒷집에 살게 되었잖아요? 이웃을 보고 얼굴 붉히는 것도 웃기죠.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진 않아요. 엘렌의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도 공작 쪽 사람들이 구해 줬는걸요.”
“도둑이요?”
“아, 이걸 말 안 했군요.”
세이나는 간밤에 들었던 도둑 사건에 대해 간추려서 설명했다. 디온은 바로 놀란 눈이 되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걱정 마세요. 엘렌은 괜찮아요.”
“세이나는요?”
“저야 당연히 괜찮죠. 도둑이 든 건 엘렌의 집이니까요.”
“하, 다행이네요.”
“엘렌에게 가 보지 않을 건가요?”
“아직, 고민하고 있습니다.”
디온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몹시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세이나는 그때 하나,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떤 쪽이 진짜이든, 적어도 엘렌에 대한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저게 다 연기면……. 저 녀석은 천재야. 연기 천재.’
그때, 맞은편에서 접시 하나가 왔다. 디온이 잘라 낸 스테이크가 그 위에 곱게 올려져 있었다.
“손이 불편하신 듯해서요.”
이중인격이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나한테 잘하면 됐지.’
세이나의 마음속에서 디온이 다시 천사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 * *
식사는 마지막까지 완벽했다.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끝으로, 세이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레스토랑을 나설 수 있었다.
자리를 떠나 레스토랑의 입구까지 오는 내내 그녀의 입가에는 연신 미소가 가득했다. 그와 헤어지기 직전에도 그랬다.
“고마워요. 디온. 덕분에 정말 잘 먹었어요.”
“만족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다음엔 저도 식사를 살게요. 이렇게 비싼 것까지는 어렵겠지만.”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조사할 게 많아서. 디온도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 공작이 뭘 숨기는지 모르겠지만, 꼭 알아내야겠어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끝으로, 세이나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하지만 그 걸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뒤를 바짝 따라오는 인기척에 세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아서 본 뒤에는 예상대로, 디온이 있었다.
“디온?”
“네?”
“왜…… 따라와요?”
그는 멀뚱히 서서 세이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세이나를 가리켰다.
“손도 다치셨고.”
“네, 그렇긴 한데.”
“나이프도 잘 못 다루셨죠.”
“그랬긴, 했죠.”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으음…… 그럼 같이 갈래요?”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디온이 가벼운 걸음으로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 모습이 마치 부르기만을 기다렸던 강아지 같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고 있었습니까?”
새롭게 도달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흰색 계단을 오르자 커다란 홀과 함께 의자에 앉아 있는 사서가 보였다. 그녀 역시, 두 사람을 알아보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세이나는 품 안에서 헌터증을 꺼냈다. D라고 쓰인 부분이 보이자 가느다란 바늘로 푸욱, 목을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디온이 꺼낸 것도 헌터증이었다. 그곳에 쓰여 있는 등급은 다름 아닌 ‘A’였다.
“세이나 로힐 씨.”
“네.”
“그리고…….”
사서가 디온의 헌터증을 앞뒤로 살핀 뒤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잘생긴 사내를 발견한 사서의 눈이 유독 빛났다.
“루셀 도르 씨. 환영합니다.”
그리고 세이나는 당황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