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먼저, 세이나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 젠장. 망했네.’
예상대로 라샤드는 완전히 굳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세이나는 그를 이해했다.
천장.
그곳에는 새하얀 여자가 매달려 있었다. 팔다리는 축 늘어져 있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고개는 아래로 꺾여 있다.
마치 교수형에 처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흔들흔들. 여자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라샤드의 바로 위에서.
“유…….”
그것이 라샤드가 마지막으로 한 한마디였다.
그의 몸이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바로 얼어붙었다. ‘유령’이라고 뱉으려는 입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반면 세이나는 달랐다.
7년 차 베테랑 헌터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저건 마물이야.’ 정체도 대충, 짐작해 내었다.
문제는 공작이었다. 그를 여자에게서 떼어 놓을 요량으로 세이나는 침착하게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공작이 그렇게 말했을 땐, 그녀도 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세……레나……?”
동시에 인형의 눈꺼풀이 열리며 붉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라샤드와 비슷한 색. 세이나는 일순 멍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공작의 어깨를 확 붙들었다. 여자의 붉은 눈이 라샤드를 발견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피해요!”
쿵!
끔찍한 소음에 뒤이어 후두둑 먼지가 쏟아졌다. 세이나는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라샤드를 놓치지 않았다. 더욱 세게 잡고, 그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몸이 쓰러짐과 동시에 세이나의 몸도 기울었다. 다음 순간,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끼이익, 쿵! 쿵! 쿵!
쿵!
그것을 마지막으로 주변이 잠잠해졌다. 세이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콜록! 콜록!”
무심결에 뻗은 손에는 바닥이 아닌 옷이 붙잡혔다. 부드러운 감촉의 고급 소재. 라샤드 칼만이 확실했다.
조금 전 천장이 부서진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라샤드는 그대로 굵은 지지대에 몸이 꿰뚫렸을 것이다.
“괜찮으…… 콜록! 콜록! 이봐요!? 공작님!?”
아니면 벌써 꿰뚫려 버렸나.
세이나는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손을 더듬거렸다. 음, 이건 내가 잡았던 어깨고. 이건 가슴이 맞는데. 그럼 이 아래를 다쳤나?
혹시 배가 꿰뚫린 건……?
아니면 그보다 더 아래?
“괘, 괜찮아.”
덥석. 손목이 붙들렸다. 곧 시야가 조금 더 밝아졌다. 라샤드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펼친 것이다. 그 안에 있던 마정석은 아직 찬란한 빛을 품고 있었다.
라샤드는 세이나의 바로 코앞에서 나타났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밀려오는 바람에 섞여 온 그 소음은 이전보다 훨씬 소름 끼치게 변해 있었다. 가까이서 들었기에 이제 세이나는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뼈를 씹는 소리였다.
‘젠장,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건만.’
다음엔 웃음소리가 들렸다.
킥킥킥.
천장에 매달린 소녀의 입매가 비틀렸다. 예쁘장한 얼굴은 어느새 험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작은 입술은 사람이라기엔 너무 과하게 찢어져 있다.
그 아래에는 또 다른 형체들이 있었다.
목이 제대로 잘리지 않아 머리를 달고 다니는 청년. 발이 잘려 기어 오는 소년. 무언가로 세게 맞은 듯 얼굴이 짓눌린 여인…….
차마 셀 수도 없이 많은 숫자였다. 그것들은 모두, 착실히 세이나와 라샤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괴상한 소리도 계속 이어졌다. 까드득. 까드득. 공작도 여전히 세이나를 붙잡고 있었다. 뜨거운 손이었다.
“세이…….”
“공작님.”
그리고 세이나도 아직, 뭔가를 붙잡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도 계속 들고 있던 단검이었다.
보통의 단검보다는 칼날이 더 긴 형태. 손잡이를 감싼 가죽은 이미 닳고 헐어 있었다. 세이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것을 더욱 꽉 잡았다.
검신에 머물러 있던 푸른빛이 점점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선을 앞에다 둔 채, 공작에게 잡혀 있던 다른 쪽 손을 움직였다.
향하는 곳은 안쪽 주머니였다.
“눈 감으세요.”
그렇게 말하고 세이나는 앞으로 몸을 던졌다.
잠시 후, 요란한 충격음이 거리를 울렸다.
쾅!
* * *
키에에엑!
통렬한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라샤드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그 여자. 그 유령의 모습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도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건 세레나가 틀림없었다.
죽어, 자신을 원망하기 위해 나타난 걸까.
켁, 케엑.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갑자기 이상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등줄기에 오싹한 불길함이 흘렀다.
‘설마, 집주인이 당한 건가?’
커흑, 켁. 켁……. 쿨럭!
목 졸린 이는 피도 토해 내고 있었다. 라샤드는 더욱 불안해졌다. 다음으로 자괴감도 일었다. 내가 머저리처럼 굴어서, 그 여자가…….
“후우, 겨우 끝났네.”
한숨을 뱉었다.
라샤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눈을 떠도 주변이 계속 어두웠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이 곧 희끄무레한 인영을 포착했다.
탁. 탁. 작은 불꽃들이 어둠 속에서 터졌다.
새로운 마정석을 든 집주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끝났어요!”
“어…….”
“이제 올라갈까요? 아, 이제 좀 잘 수 있겠네.”
집주인은 먼지투성이였다. 작은 얼굴에 재처럼 보이는 검은 자국도 남아 있다. 목 부분은 화상 같은 자국도 있었고, 머리는 엉망진창이다.
그녀의 손에는 마정석 말고도 다른 것도 쥐어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커다란 벌레 같았다. 6장의 얇은 날개, 벌을 닮은 배와 끝. 하지만 위에 붙은 건 분명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이마에는 단검이 꽂혀 있었다. 라샤드는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마물이에요. 이름은 아빌라카스. 봐요, 내 말이 맞았죠?”
세이나는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희귀한 녀석이라 모를 수도 있어요. 평소에는 벌레처럼 작기도 하고. 별명은 악몽 탐식가. 사람이 자는 틈을 타 이 끝에 있는 침으로 찔러 악몽을 훔쳐보죠. 잠시 졸았나 봐요, 공작님?”
거기까지 들은 후에도 라샤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말없이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이나는 설명을 이어 갔다.
“능력은 훔쳐 낸 악몽을 현실의 환영으로 보여 주는 거예요. 그리고 혼란에 빠진 이의 기력을 흡수해 버리죠. 몸도 가끔 먹어요.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손가락. 아, 손가락 괜찮아요?”
라샤드가 뭐라 하기도 전에 세이나가 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무릎을 접고 쭈그려 앉아 면밀히 라샤드를 살폈다.
“다 그대로 있죠?”
“바람은…….”
“이 녀석이 할 수 있는 잔재주 중 하나죠. 생긴 건 이렇지만 B급 마물이라 마법 비슷한 것도 쓸 수 있어요. 몽마 아시죠? 걔 친척 정도라고 이해하세요.”
너는 어떻게, 그걸 처치했지?
완전히 잠긴 목은 이제 신음조차 내기 어려웠다. 집주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어렵지 않아요. 좁은 공간이고, 소리도 이곳에서 들렸으니 지하실 안에 있겠죠. 환영은……. 제가 저런 정신계 공격에는 좀 강해서요. 촉도 좋고.”
“촉?”
“저기, 저쪽 구석에 있는 것 같았어요. 순전히 직감.”
집주인이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이었다.
“나머지는 영업 비밀이에요.”
모든 설명을 들은 후에도 라샤드는 쉽게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가 본 광경이 너무 끔찍했던 탓이다.
세레나는 몇 년간 그의 악몽에 등장했던 모습 그대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걸 보는 순간, 꼼짝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레나가 죽음에서 돌아왔구나. 돌아오면 반드시 나를.
나를 죽이리라.
“괜찮으세요?”
라샤드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집주인이 그의 바로 앞에 와 있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옅은 갈색이라고 생각했던 눈동자는 금빛에 더 가까웠다. 속눈썹은 짙고 길었으며 눈매는 기억과 달리 매섭지 않았다.
왜 사나운 인상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렇게나 잘 웃는데도.
“일어설 수 있겠어요? 도와줄까요?”
집주인이 마정석을 주머니에 넣은 후 손을 뻗었다. 라샤드는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주 잡았다. 그가 일어설 준비도 하기 전에, 놀라운 힘이 그를 잡아당겼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섰다.
저보다 큰 성인 남자를 끌어 세워 놓고도 여자는 눈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시끄러워서 사람들이 왔나 보네요.”
“그렇군.”
“여기에 더 있어요. 각하는 유명하니까 나오지 말고.”
“여기……에?”
“아, 그러네. 그게 더 무섭겠다.”
지하실은 엉망진창이었다. 어두워 제대로 확인하긴 어렵지만, 당장 발에 차이는 것들이 많았다. 가구들도 넘어진 것 같다. 천장도 무너졌고.
“우리 공작님께서는 아주 겁이 많으셔서 여기에 못 있으시겠네요.”
라샤드는 반박할 수 없었다.
집주인은 바로 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라샤드도 그녀를 따랐다.
간밤에 겪은 일로 아직 기운이 없는 그와 달리 집주인은 쌩쌩했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자 잡고 있던 손도 빠져나갔다.
라샤드는 그걸 확 붙잡아 버렸다.
집주인이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라샤드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낯선 여자, 모르는 여자. 그저 타인의 것일 뿐인 이 온기가 그에게 이상하게 안정감을 주었다.
전부 유령 탓이다. 라샤드는 민망함을 느끼며 그녀를 놓았다.
그런데 곧바로, 다시 온기가 돌아왔다. 라샤드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잘 따라와요.”
맞잡은 손은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라샤드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집주인은 자신을 아주 싫어하지만은 않는 것 같다고.
그리고 그를 끌고 올라가며, 세이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또 넘어트리려 하기만 해 봐.’
이를 악물면서.
‘절대로 혼자서는 안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