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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7화 (17/179)

#17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큰 마정석이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주먹보다 작은 그것은 전생의 손전등만큼이나 환한 빛을 뿜어내 주고 있었다. 덕분에 세이나는 아래를 확인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건 순전히 등 뒤의 존재 때문이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그가 말했다.

“진짜로.”

끼익.

“정말로.”

끼익.

“돌아갈 생각이.”

끼익.

“없어?”

끼익.

“왜냐하면.”

끼익.

“날이 밝아도.”

끼익.

“충분히…….”

“지금 내려간다고 광고해요?”

날 선 목소리에 움찔, 뒤에서 멈춰 서는 기척이 느껴진다. 세이나는 마정석을 들어 계단 아래가 아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바닥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평소라면 두 칸씩 껑충껑충 내려갔을 만한 깊이. 하지만 세이나는 몇 분째 제대로 진도를 못 나가고 있었다.

이미 붙잡힌 한쪽 팔이 또다시 끌어당겨진다. 라샤드가 진지하게 말했다.

“돌아가지.”

그러자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왔다.

‘왜 따라오냐고!’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실랑이는 내려오는 동안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위에서 기다리면 될 것이지, 꾸역꾸역 왜 내려오고 있단 말인가.

낯선 곳, 어둠 속, 그리고 어느새 끊겨 있는 소음까지.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

하지만 세이나는 그다지 큰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소리의 정체를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

밀려오는 건 짜증뿐이었다. 계속 끼어드는 라샤드 덕에 집중력이 흩어진다.

이제는 한계가 찾아왔다. 세이나는 확 인상을 구기며 그를 뿌리치려고 했다.

“이것 좀……!”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날카로운 눈매 속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시울은 이미 붉어졌고 치켜 올라간 사나운 눈썹은 우스꽝스럽게 구겨졌다. 꽉 깨문 입술은 몹시 처량해 보인다.

세이나는 황급히 입술을 또 한 번 말아 물었다.

“푸흐…….”

“세이나?”

“풉, 아, 아뇨……. 그게……. 큽!”

별명이 뭐더라? 냉혈한? 악마? 괴물?

‘괴물은 무슨…….’

세상 어떤 괴물이 저런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본단 말인가.

그리고 세상 어떤 괴물이 유령을 무서워해?

세이나는 최선을 다해 웃음을 참았다.

차마 공작의 얼굴에다 대놓고 폭소를 터트릴 수는 없었다. 세이나는 주문처럼 자신에게 말했다. 웃지 마. 여기서 웃으면…….

‘진짜 엄청 상처받을 거야.’

그녀는 급히 심호흡을 이어 갔다. 잠시 뒤, 여전히 팔을 붙잡힌 채로,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각하, 제 말을 잘 들으세요. 밑에 있는 건, 유령이 아니에요.”

“뭐?”

“마물일 거예요. 아마도.”

세이나는 마정석을 주머니에 잠시 넣어 두고, 옷 안쪽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그것은 여전히 붉게 물든 보석을 품고 있었다.

“여기 이, 보석이 보이시죠? 이건 마물을 감지하는 보석이에요. 각하도 아시죠?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저기 있는 게, 마물이라고?”

“집에 퍼져 있는 달콤한 향기도 증거예요. 왜 이런 곳에 ‘그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확인해 봐야겠죠.”

그러니 전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세이나는 이미 머릿속에 몇 가지 후보 마물을 정리해 둔 상태였다. 퇴치 방법도 모두 알고 있다.

정체도 방법도 알았으니 남은 건 행동뿐이다.

하지만 이렇듯 계속 막으니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수도의 결계 안으로 마물이 들어온 거지?’

그때, 라샤드가 물었다.

“……유령이 아니야?”

틀렸다.

이미 모든 생각이 유령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

세이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회중시계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시 마정석을 꺼내 바라본 공작은, 여전히 불안한 낯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새벽이 다 갈 때까지 마물을 만나기는커녕 지하실에도 못 내려갈 것 같다.

세이나는 웃음기를 애써 지우며 돌아온 계단을 밟았다. 갑자기 좁아진 간격에 라샤드가 움찔, 작게 어깨를 떨었다.

“각하. 제가 예전에 어딘가에서 들었는데요…….”

하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라샤드는 가만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가만히, 부모의 말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순종적으로.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세이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령은 사람을 죽일 수 없대요.”

“……왜?”

“죽은 사람이 유령이 돼서 서로 만나면 민망하잖아요.”

잠시 생각하던 라샤드는 깨달은 눈빛이 되었다.

“일리가 있군.”

세이나는 또다시 힘껏 웃음을 참아야 했다.

붙잡고 있던 손길이 약해졌다. 하지만 떨어지지는 않았기에, 세이나는 그를 이끌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계단은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1걸음, 1걸음, 1걸음. 발길이 한층 더 조심스러워진 탓인지 계단에서는 이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팔은 여전히 뒤로 쏠려 있는 채였다.

잠시 후, 지하실의 바닥이 보였다.

세이나는 거침없이 그곳에 발을 들였다.

그때.

휘익!

세찬 바람과 동시에 세이나의 몸이 뒤로 넘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그녀는 마정석을 놓쳐 버렸다. 환한 빛과 멀어지며 주변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쿵!

충격은 다음이었다. 돌연 급습한 통증에 세이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계단의 튀어나온 모서리에 허리가 부딪친 것이다.

하지만 상체는 멀쩡했다. 그녀의 머리를 받아 낸 라샤드가 물었다.

“괜찮나?”

세이나는 위에서 튀어나온 그의 얼굴을 보며 빠르게 조금 전 순간을 회상했다. 방금 전, 바람이 불자마자…….

어떤 손이 날 뒤로 잡아당겼다.

그것 때문에, 넘어졌다.

바람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구해 줬잖아!”

“이게 무슨 구해 준 거예요! 잡아당겼잖아!”

“갑자기 바람이 쏟아지지 않았나!”

“이…….”

세이나의 이성이 다시 그녀의 혀를 틀어잡았다.

순간 제 몸 안에 두 가지 인격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참아! 저건 공작이야! 저 미친놈, 일부러 넘어트린 거 아니야?! 귀족 모독죄로 잡혀갈 거야!

고작, 고작 바람 때문에!

그걸로 겁먹은 거야!?

‘귀엽긴 개뿔이!’

몇 분 전의 자신에게 통렬한 비난을 남기며 세이나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아오, 허리야…….”

끔찍한 통증이 느껴진다. 이 충격이 뒤통수에 가해졌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왜 이렇게 겁이 많아요? 그냥 바람이라고요!”

“창문도 없는 지하실에 바람이라고?”

“있을 수도 있지! 으으, 아파라…….”

“다, 다쳤나?”

세이나가 허리를 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실 당장 움직이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일부러 일어나지 않았다.

힐끗 본 라샤드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반듯한 얼굴에 죄책감이 번진다.

세이나는 일부러 더 큰소리를 내었다.

“아이고오, 나 죽네에…….”

“일어날 수 있겠어?”

“아뇨. 조금 뒤에……. 이, 일단 저기 저 마정석 좀 가져와요.”

그녀가 놓친 마정석은 지하실 바닥에 홀로 도착해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어림잡아 6걸음쯤. 바로 옆에는 오래된 인형이 있었다.

커다란 눈에 미소를 품고 있는 그것은 언뜻 보기에 엘렌과 비슷했다.

금색 곱슬머리에 푸른 눈동자. 차이점은 엘렌의 표정에 비해 인형의 얼굴은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인형은 활짝 웃고 있었다.

라샤드는 그걸 보자마자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에 공포가 스친다.

“……혼자?”

“전 못 움직이겠어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게요.”

“그럼 기다리지.”

“안 돼요. 또 바람이 불어와서 마정석이 굴러갈 수도 있잖아요? 저도 이 지하실이 처음이라 구조를 몰라요. 잃어버리면 완전히 깜깜해질 텐데, 계단을 올라가다 넘어지면 정말 크게 다칠 수도 있잖아요?”

충분히 합리적인 설명에 그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조금 후, 큰 결단을 내린 얼굴로 그가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너무 천천히.

벌벌 떨면서.

세이나는 입도 가리지 않고 마음껏 웃었다. 며칠 전 자신의 집에 들이닥친 공작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와 저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니.

잔뜩 긴장된 등이 너무 웃겼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손끝도. 또다시 마음껏 웃으려던 그때, 갑자기 라샤드가 홱 고개를 돌렸다.

세이나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야야야…….”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실눈을 뜨자 공작의 등이 다시 시야를 채웠다. 그가 무겁게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짓궂은 생각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가 너무 느린 탓도 있고 세이나의 성격이 좀 꼬인 탓도 있었다. 확 발로 차 버릴까?

“세, 세이나……?”

“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예? 전혀요.”

“방금…….”

“아, 언제 주워 올 거예요? 빨리 가요!”

“자, 잠깐. 잠깐만…….”

라샤드는 아주 느리게 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이 마정석이 내는 빛의 원 안에 반쯤 걸쳤다.

빛을 만나면 당장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그 상태에서도 꽤 오래 머물렀다.

아마, 눈앞의 인형이 너무 무서운 모양이었다.

세이나는 그를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그것만 줍고 올라가요! 허리가 너무 아파서 안 되겠어요!”

그의 어깨가 조금 올라왔다. 그가 토끼였으면 귀를 쫑긋 세웠을 것이다.

“그것만 잡으면 돼요! 빨리 돌아가죠!”

내딛는 걸음의 보폭이 넓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그가 마정석을 집어 들었다.

세이나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그때였다.

“진짜 그렇게나 유령을 무서워할 줄은…….”

마정석이 그의 손 위로 올라왔다. 이제 빛이 닿는 곳은 조금 더 넓어졌다.

그의 옆에 있던 낡은 옷장의 윤곽이 선명해졌고, 다른 잡동사니들도 보였다. 큰 키의 라샤드였기에 천장까지도 빛이 닿았다.

“몰…… 랐…….”

천장.

거기서 세이나의 시선이 멈췄다. 그녀에게 돌아가려고 몸을 틀었던 라샤드의 발도 멈췄다.

세이나는 크게 눈을 뜨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라샤드는 끔찍한 불길함을 느꼈다.

“……세이나?”

그의 눈이 세이나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천장에.

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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