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5화 (15/179)
  • #15

    짓눌린 남자는 마구 발버둥 쳤다.

    “자, 잠깐! 잠깐만요!”

    하지만 세이나에게서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무릎으로 그의 등을 꽉 누른 채, 세이나는 그의 팔을 뒤에서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대답해. 너 뭐 하는 놈이야? 왜 안을 훔쳐보고 있었지?”

    세이나의 단검이 더욱 목과 가까워졌다. 잡히지 않은 남자의 한쪽 팔이 마구 바닥을 때렸다.

    “아파요! 좀 놔주세요!”

    “빨리 말해.”

    “저, 접니다! 저예요!”

    “저라는 놈은 모르는데.”

    “아론이요!”

    세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어, 어제 봤잖아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또다시 다급히 외쳤다.

    남자의 후드가 벗겨진 건 다음 순간이었다. 그리고 세이나가 그의 정체를 비로소 떠올린 것도.

    공작의 부관이 그녀의 아래에서 울먹거렸다.

    “설마 벌써 잊었습니까?”

    * * *

    “저는.”

    아론은 말문을 열고 잠시 머뭇거렸다. 갈색 머리칼 아래 어두운 눈동자가 꽉 감겼다가, 다시 열렸다.

    그가 세이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스토커가 아닙니다.”

    “예…….”

    “도, 도둑도 아닙니다!”

    세이나는 아론의 시선을 피했다. 아론은 더욱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절 보세요! 완전 약체라고요! 10초도 제대로 못 뜁니다!”

    “거의 환자네요.”

    “어제 도둑을 쫓아낸 것도 우리 쪽 사람들입니다! 치안대에는 일을 넘겨준 것이고요.”

    “쫓아냈어요?”

    “네. 집에 침입할 순 없어 창문을 깨 버렸죠. 그리고 뛰쳐나온 놈과 추격전도 벌였습니다.”

    아론이 제 뒤에 있는 기사 1명을 가리켰다. 지목받은 그가 허리를 곧게 폈지만 세이나의 경계심은 꺼지지 않았다.

    아론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어제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나 걱정이 되어 살펴보고 있었던 겁니다. 절대, 결코,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왜요?”

    “……엘렌 양은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중요하다?”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세이나는 계속 찌푸린 얼굴로 아론과 그 뒤의 기사를 주시했다.

    그녀는 지금 엘렌의 뒷집에 있었다.

    욕심 많은 사내가 살던 바로 그 집.

    이제는 공작의 소유가 된 바로 그 뒷집이다. 그리고 이제는 아론과 그 부하들이 지내고 있는 곳이다.

    세이나는 기사의 뒤에 있는 큰 책상을 바라보았다. 서류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공작도 이곳에서 가끔 체류하는 듯하다.

    “그럼 도둑이 들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 아니에요?”

    “쉽게 말씀하십니다. 이쪽에서 보이는 건 그 집의 뒷문과 창 2개가 전부입니다. 가장 작지요. 앞으로 들어올 수도 있고, 양옆도 있는데, 어떻게 바로 압니까?”

    “뭐, 그렇긴 한데.”

    “이 사이 좁은 골목을 오가는 이들도 꽤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대로보다 좁은 골목을 더 선호하는 것 같군요.”

    그건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이나도 그랬으니까.

    세이나는 다시 주변을 훑었다. 이 뒷집은 엘렌의 집보다 훨씬 좁은 곳이었다. 1층 방은 단 1개, 거실만 해도 지금 이 세 사람으로 꽉 차는 느낌이다.

    “그래서 제 집이었군요.”

    이곳에서는 엘렌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이 집은 대로를 바라보고 있었고, 엘렌의 집과 마주 보는 창문은 한두 개가 전부였다.

    엘렌의 집 건너편은 강을 사이에 둬서 멀고, 대로 맞은편 역시 마찬가지로 멀다.

    반면 세이나의 집은 엘렌의 집과 매우 가까웠다. 마주 보고 있는 큰 창은 현재 꽃집으로 쓰고 있는 부분이 거의 다 보였다. 2층 창문도 마주 보고 있다.

    더군다나 세이나의 집은 이 근방에서 가장 크고 넓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

    “또?”

    아론이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왜요? 찝찝하게.”

    “별것 아닙니다. 예, 맞습니다. 옆집이 가장 지켜보기 좋죠. 집주인 분께서 집이 소중하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지만요.”

    “네. 안 팔아요.”

    세이나가 딱 잘라 말하자 보좌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아직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은 세이나는 담담했다. 그래서 뭐? 난 집 절대 못 팔아.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잘 부탁드립니다.”

    “네?”

    “이웃이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공작 각하가 이웃이 되시겠군요. 이곳의 집 주인이시니. 엘렌 양에게도, 가급적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왜요? 고마워할 텐데.”

    “소름 끼쳐 하지 않을까요.”

    세이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조금 그렇긴 하다.

    ‘그래도 고마워할 텐데. 일단 도둑으로부터 지켜 줬으니까.’

    대범하게 집에 침입한 놈치고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비화가 있었을 줄이야.

    문득 뒷집에 기사들이 있다는 사실에 퍽 안도감이 들었다.

    이러면 무슨 일이 생겨도 바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의 이벤트도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다.

    죄책감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옆집에는 여주에 뒷집에는 남주라…….’

    사건·사고가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은 들지만.

    “꼭 이래야 합니다. 각하께서는 엘렌 양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고 계십니다. 아가씨께서는 반드시, 무사하셔야 합니다.”

    세이나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아론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는 세이나가 엘렌에게 일러바칠까 봐 몹시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세이나는 손사래를 쳤다.

    “알겠어요. 그만 말해도 돼요.”

    “그러니 옆집에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면 꼭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도 엘렌이 다치는 건 원치 않아요. 집에 있는 동안은 신경 쓸게요.”

    비로소 아론의 낯빛이 밝아졌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안 팔아요.”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세이나는 바로 집을 나섰다. 그녀는 제집에 들어가기 전, 한 번 더 그 집을 올려다보고 또 엘렌의 집도 살폈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알아서들 하겠지. 신경 끄자.’

    * * *

    그날. 자정이 지난 시간.

    ‘신경 쓰여…….’

    세이나는 소파에 널브러져 오늘 일을 곱씹고 있었다. 여전히 임무는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니 잡생각이 늘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갈색 머리에 주근깨 많은 보좌관이 점령하고 있었다. 왜? 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 엘렌 양은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이런 말도 했었다.

    - 아니요, 아닙니다.

    ‘뭔가 감추는 것 같았어.’

    찝찝함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멍청한 보좌관 같으니. 숨길 거면 제대로 숨기지 왜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는지.

    ‘내 집을 가져야 할, 또 다른 이유라.’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몇 분 후, 세이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물어보자.’

    세이나는 회중시계의 시간을 확인한 후 그것을 외투 안에 집어넣었다. 다음에 확인한 것은 뒷집이었다.

    엘렌의 집과 달리 그곳에는 아직 빛이 남아 있었다.

    아마 밤새도록 돌아가면서 보초를 설 것이다.

    그 추측이 세이나의 의심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여성이라지만, 밤늦게 부하들을 시켜 지켜볼 정도라고?

    세 가지 경우가 있다. 공작이 사이코거나, 혹은.

    ‘엘렌에게 비밀이 있다.’

    또 혹은 정말로 생각하기 싫지만.

    ‘내 집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

    세이나는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아주 잠깐만 그러했다.

    곧이어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세이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닐 거야. 아니겠지.”

    말은 그러했지만.

    조금 뒤 세이나는 조심스럽게 공작의 집으로 향했다. 손에는 오늘 엘렌이 나눠 준 쿠키가 있었다. 이걸 나눠 주면서 기사들을 회유할 계획이었다.

    공작이나 아론이 사실대로 말해 줄 리는 없다. 하지만 기사들에게서 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작은 과연 무슨 생각이며, 또 무슨 목적인지. 앞으로 또, 뭘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런 이유에서 세이나는 정문이 아닌 뒷문을 선택했다. 공작이 뒷문을 지키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시간대도 적절했다.

    ‘공작은 집에서 자지 않을까?’

    여러모로 지금이 적당한 타이밍 같다. 세이나는 작은 집의 뒷문에 조용히 접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뒷문에는 인기척이 조금도 없었다. 살짝 들여다본 창문 너머는 사람 그림자 하나도 없었다.

    분명, 누군가 뒷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텐데?

    세이나는 문을 두들겨 보았다.

    똑똑.

    반응이 없자, 한 번 더 시도했다.

    똑똑.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쿵! 쿵!

    “어……?”

    끼익.

    문이 열렸다.

    얼떨떨하게 열린 문틈을 지켜보던 세이나는 몇 초 후, 문을 조금 더 열어젖혔다. 끼이이이이익. 인기척은 여전히 없었다.

    ‘뭐야? 오늘은 다 집에 갔나?’

    집 안도 어두웠다. 불이 밝혀진 마정석이 있는 곳은 오직 뒷문 옆밖에 없었다.

    완전히 암흑에 잠긴 집. 세이나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이이이익.

    낡은 마룻바닥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이상한 예감이 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달콤한 향이 집 안에 가득 퍼져 있었다.

    순간 온갖 꽃이 가득한 꽃밭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은 가을인데, 그리고 꽃집은 이곳이 아니라 다른 집이다.

    비에 젖은 초목들이 내는 향이 공기 중에 섞여들었다.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숨을 들이마시려던 세이나는 곧 급히 코를 틀어막았다.

    ‘이건…….’

    그녀는 급히 외투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계의 정중앙, 시침과 분침의 기준점에는 아주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평소 그것은 유리처럼 투명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핏빛 보석이 작은 진동을 낳고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세이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

    “이런 시X.”

    괴상한 소음이 퍼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세이나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쿠키를 내던지듯 옆으로 둔 그녀는 바로 품 안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그 순간 뒤늦게, 누군가를 발견했다.

    계단 바로 뒤. 커다란 몸이 구석에 있다. 마치 아주 큰 검은 공 같았다. 혹은 곰이거나.

    문득 그가 떠올랐다.

    “……공작님?”

    검은 옷. 검은 머리카락. 세이나는 어둠 속에서도 쉽게 그를 구별해 내었다. 문제는 그가 벽을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구석에 처박힌 몸은 미동도 없었다.

    세이나는 마른침을 삼킨 후,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혹시,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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