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팔 수 없었죠. 이 집은 할아버님께서 친구분들과 직접 지으신 집이에요. 절대로 팔 수 없죠.”
“그렇겠네요…….”
“그랬더니 협박을 하셔서…….”
“네!? 괘, 괜찮으세요?”
“정말 무서웠답니다.”
그러고 보니 영 아픈 얼굴이었다. 혈색도 거의 없어 창백한 얼굴에, 입술도 메말랐다.
슬프고, 지친 눈빛.
엘렌은 꽃을 포장하는 것도 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칼만 공작님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너무 무서운 분이셨어요.”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엘렌은 제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가씨도 조심하세요. 이 근처 집들을 노리시는 것 같아요.”
“지, 집을요?”
“네.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날 찾아온 이유도 집 때문에……?’
한번 들기 시작한 의심은 빠르게 엘렌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칼만 공작은 그녀에게 저택에 들어와 정원사 일을 하라고 했다. 괜찮은 방을 하나 내어 줄 테니 안심하라고도 했다.
엘렌은 조금 고개를 갸웃했었다. 정원사에게 방도 내어 주나?
그 모든 게, 집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납득이 가.’
어디선가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공작을 만난 이후 하루 내내 가지고 있던 모든 궁금증이 단번에 해결되었다.
그는 이 집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좋아해서가 아닌…….
“최대한 피해 다니세요. 저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맞아도 금방 낫겠지만. 아가씨처럼 가녀린 분이 맞았다면 몇 군데 부러지지 않았을까요?”
엘렌은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그분과 절대로 엮여서는 안 돼요.”
“저…… 저, 저는 그런…… 그런 분일 줄 몰랐어요.”
“상대도 마세요. 아니, 아예 무시해 버려요. 문도 열어 주지 말고. 아가씨한테도 무슨 협박을 할지 몰라요.”
엘렌은 칼만 공작의 외관을 떠올렸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무시무시한 압박감.
무섭다.
“네. 그럴게요.”
엘렌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만나지 말자. 그런 의지가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어슬렁거리는 것 같고. 얼마 전엔 이상한 머리 색의 남자도 보이더군요.”
“이, 이상한 머리 색의 남자요?”
“변태겠죠. 아니면 그 야밤에 왜 골목길에 숨어 있겠어요?”
“그러게요. 정말 조심해야겠어요.”
옆집 여자는 꽃을 받아 들고 또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쓸쓸해 보여서 엘렌은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옆집 여자는 뒷모습조차 슬펐다. 검은 옷에 흰 꽃을 들고 있어 더욱 그랬다.
집을 지키다가 위협을 당하다니.
돌아가신 할아버님이 알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엘렌은 결심했다.
‘저분에게 더 친절하게 대해야겠다.’
공작은…….
‘나쁜 놈!’
그리하여 오후.
칼만 공작의 부하가 꽃집을 방문하자 엘렌은 그에게 소리쳤다.
“절대로 안 따라가요! 공작님께도 그렇게 전하세요!”
옆집에 들릴 정도로 아주 큰 소리였다.
“이야, 효과 확실하네.”
세이나는 악당 같은 미소를 흘리며 차를 마셨다.
* * *
그날 저녁.
“그렇게 되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이제 다시 엘렌에게 가서 저번에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아, 저기 지나간다! 지금! 지금 빨리!”
“공작이 알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그런 적 없다고 발뺌하죠. 뭐. 아, 집에 들어갔네. 그럼 꽃집으로 쳐들어가죠! 일어나요!”
“잠깐, 세이나…….”
“아, 다시 나왔네. 오늘 엘렌이 바쁘네요. 따라갈까요?”
미행이라도 하는 분위기였지만 사실, 그들은 아직 세이나의 집 안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활짝 열려 있는 어떤 방 안이었다.
집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뚫려 있는 커다란 창문 속.
엘렌이 집 현관문을 잠그고 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온 그녀는 곧 몸을 돌렸다.
유난히도 반짝이는 금색 머리칼은 엘렌이 발을 옮길 때마다 잔상을 남기는 것 같았다. 긴 비단을 풀어 놓은 듯 보이기도 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이나와 디온의 눈동자도 동시에 굴러갔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꽃집으로 난 큰 창문을 넘어, 강을 바라보는 창문. 현관문에 난 불투명한 유리와…… 거실까지.
엘렌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이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돌아오면 다시 시도해 보죠.”
디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아직도 엘렌의 뒤를 좇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건만. 푸른 눈은 여전히 창문 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세이나는 그런 그의 옆얼굴을 관찰했다.
다시 봐도 조각같이 완벽한 모양새였다. 섬세한 이목구비와 붉은 입술. 긴 속눈썹. 신비로운 은색 머리칼.
반면 표정은 어두웠다.
아마 그날의 일을 회상하고 있으리라.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그것이, 어제 내린 결론이었다.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 봐야죠. 후회하는 것보단 그게 나아요.”
전생과 현생 동안 몸소 경험한 진리였다. 세이나에게 이 세상은 소설 속이 아니었다.
벌써 25년을 열심히 살아온 생이다. 갑작스레 전생을 깨달았다고 지금껏 삶이, 노력이 남의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디온 역시,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 봤으면 했다.
혹시 아직 모르지 않는가.
이 소설이 아직 완결되지 않아서,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조연이 갑자기 남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 세이나의 기준에선 공작보다 디온이 훨씬 더 남주인공에 어울려 보였다.
간호해 주고 요리해 주는 좋은 남자. 흔치 않잖아. 거기다 착하기까지 하다.
물론, 디온은 남주인공 후보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세이나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녀 역시 한낱 엑스트라였으니.
“이로써 잠깐 시간은 벌었어요. 그 틈에 확 엘렌과 친해져 버립시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완벽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디온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이제 바로 옆에 있는 세이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창가에 함께 선 그들은 꽤 가까운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디온은 세이나의 의욕에 찬 표정을 더 잘 볼 수 있었다.
금빛 눈이 어젯밤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다.
“세이나는…….”
복수심으로.
“공작 각하가 엄청 싫군요.”
“디, 디온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커요!”
급히 덧붙이자 디온이 미소 지었다. 그의 큰 손이 세이나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 열이 있네요.” 그렇게 말하는 투가 퍽 다정했다.
그가 손길을 거둔 후 말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네?”
“세이나가 위험해질 겁니다.”
“그게 걱정돼서 그래요?”
“네.”
“뭘 그런 거로…….”
“제가 없었다면 세이나는 공작에게 집을 넘겼을지도 모릅니다.”
윽.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이번 작전을 감행한 데는 안일함도 있었다. 라샤드 칼만은 남주인공 후보였다.
그래도 기본적인 매너는 있지 않을까. 여차하면 엘렌과 친해져 버리자는 생각도 있었다.
‘보통 그러면 안전해지던데.’
“그리고 유클레스 후작도…….”
디온이 말끝을 흐리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복잡한 얼굴이다.
“아닙니다.”
“그럼, 엘렌은 어떻게 할 거예요?”
엘렌. 그 이름에 디온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는 세이나를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곧 시선을 내렸다.
“포기해야겠죠.”
포기라니!
“돌아가겠습니다. 일찍 주무세요.”
디온이 외투를 챙겨 입었다. 그가 현관문에 다가갈 때까지도,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포기라니! 남의 집 앞에서 오열할 정도로 좋아하면서 포기라니!
‘회장님, 도대체 아드님 자존감이 왜 저래요!’
잘생기고, 집안 좋고, 돈도 많고, 착한데, 왜 포기하는 거야!
세이나는 며칠 전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디온에게 거절의 말을 남기던 엘렌은, 정말이지, 하늘에 맹세코, 그를 혐오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정말 당황한 것이다. 교제 신청도 아니고 청혼인데. 당연하다.
그래서 아직, 여러 번 시도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두 번, 아니 한 번은 더. 데이트도 좀 하고, 얼굴도 자주 보고. 응?
그러나 디온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세이나는 텅 비어 있는 현관을 보며 허탈함을 느꼈다. 그는 벌써 사라져 버렸다. 이별의 인사도 받지 않았다.
그녀가 붙잡을까 무서워 먼저 달아난 것 같았다. 세이나는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아, 그래! 하지 마! 때려치워! 근성 없는 녀석 같으니!”
마음대로 외친 후 털썩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몸을 기울이고 그대로 엎어진 후 담요를 끌어안았다. 어젯밤 읽다 만 책을 읽을 계획이었다.
옆집 이야기보다 이쪽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잠시 후.
세이나는 어느새 어두운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디온 프라벨이 가득했다.
‘이유나 좀 알자!’
참견이 맞았다.
그래도 궁금했다.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평생을 좋아했다면서, 어떻게?
불안한 느낌도 들었다.
그가, 또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구에게도 속내도 털어놓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1년 전의 세이나 로힐처럼.
‘고급 주택가로 가려면 광장을 거쳐야 하니까. 그 길로 갔을 거야.’
세이나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녀는 그가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로를 지나, 어두운 골목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좁은 길에서도 그녀는 거침없이 뛰어갔다. 이 근처의 지리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일단 지름길을 통해 먼저, 광장으로 간다. 아직 시간이 그렇게 지체되진 않았다. 기다려도 광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이 주변을 돌아다녀 봐야겠다.
주저앉아 울기 좋은 곳 위주로 찾아봐야지.
그리 다짐한 순간이었다.
쿠당탕!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멈춰 선 세이나의 귓가에 연이어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도 스쳤다.
꽤 먼 거리였다.
‘설마.’
돌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너 맞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