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6화 (6/179)
  • #6

    일어났을 땐 벌써 저녁이었다.

    시계를 확인한 세이나는 다시 힘없이 회중시계를 협탁 위로 되돌려 놓았다.

    벌써 6시간. 몸은 여전히 고장 나 있었다.

    ‘아, 정말 이런 일이 잘 없는데.’

    일주일쯤 잠을 안 자고도 버틸 수 있는 튼튼한 몸이다.

    마법도 쓰지 못하는 세이나 로힐이 헌터 세계에서 7년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연 체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약해져 버리다니.

    ‘전생을 깨달은 여파인가?’

    그리고 문이 열리며 그 남자가 나타나자 그녀의 당황은 배가 되었다.

    “……디온?”

    “세이나. 일어났군요. 몸은 어떤가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바로 말문이 막혔다.

    6시간이나 지났다고. 그런데 아직 있단 말이야?

    그런데 그는 아직 있었다. 약과, 음식이 있는 트레이를 들고 그녀에게 걸어오고 있다. 세이나는 그제야 느리게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확인했다.

    자신의 방 안. 익숙한 침대. 익숙한 이불이다.

    잠깐. 나 소파 위에서 기절했는데?

    “주무시다 떨어지셔서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디온이 바로 대답해 주었다. 세이나는 더욱더 당황스러웠다.

    부모님도 몰랐던 최악의 잠버릇을, 어제 처음 본 사람에게 들키고 말았다.

    보아하니, 그가 직접 들어 옮긴 모양이었다.

    낯이 뜨거워졌다. 오, 맙소사.

    “아직 열이 있습니까?”

    민망함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런데 디온은 그걸 아파서 하는 행동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잠깐 괜찮을까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큰 손이 세이나의 이마에 닿았다.

    서늘하고 낯선 감촉이 느껴지자 등줄기에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그의 손은 막 물에서 꺼낸 것처럼 차가웠다.

    “아직 열이 있네요.”

    얼마나 흉한 꼴이었을까. 세이나는 떨어진 후에도 일어나지 않은 자신의 굵은 신경 줄이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잠시 정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때, 내가 뭐라고 했었는데.

    “악몽이라도 꾸는지 갑자기 움직이셨습니다.”

    돌연 어떤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꿈속에서 만난 라샤드 칼만은 여전히 오만했다. 세이나는 그를 보고 외쳤다.

    - 너, 너……! 이 망할 공작 같으니!

    - 너! 내가 복수하고 말 거야!

    세상에. 신이시여. 제가 정녕 제 입으로 그걸 말했단 말입니까. 기억은 거기까지가 끝이 아니었다.

    - 이 또라이야! 확 콧구멍에 젓가락을…….

    “괜찮습니까?”

    “수치사로 죽어 버릴 것 같아요…….”

    회장 아들이랑 사이좋게 지내면서 협회 내의 평판을 회복하자는 작전이었는데.

    사이좋긴 개뿔. 하루 만에 자신의 밑바닥까지 보여 줘 버렸다. 세이나는 상황이 단번에 역전되어 버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민폐는 자신이었다.

    “무겁지……. 않던가요.”

    물어보고도, 세이나는 후회했다.

    무겁겠지. 당연히 무겁지. 그녀는 곱게 자란 아가씨들과 달랐다.

    검을 휘두르고 뛰어다니는 몸이다. 뼈도 튼튼하고 근육도 잘 잡혀 있어 무게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디온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안 무거웠습니다. 가벼웠어요.”

    ‘젠장, 협회장 아드님. 얼마나 착한 거냐고.’

    이제 세이나는 그의 등에서 비치는 후광을 느낄 수 있었다. 활짝 웃는 낯이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분명히 무거웠을 텐데. 진짜 힘들었을 텐데. 민망해할까 봐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좀 보라.

    도대체 누가 이 착한 애에게 또라이라고 한 거야?

    “먹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음식도 준비해 주었다. 그가 가져온 트레이가 그녀의 무릎 위에 놓였다.

    뜨거운 김을 올리고 있는 것은 수프였다.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세이나는 조심스럽게 스푼을 들었다.

    “맛있어요.”

    “아, 정말 다행이네요. 사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그것도 손수 해 준 음식이었다.

    세이나는 생각했다. 이쯤 되니 회장님 아드님이 아니라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님이라고 해줘도 되겠는걸.

    “왜…… 왜, 안 갔어요?”

    “예? 당연히…….”

    디온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시선이 세이나에게서 떨어져, 바닥을 향한다.

    “침대에서 떨어지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서…….”

    “윽.”

    “농담입니다. 쓰러진 사람을 내버려 두고 갈 순 없죠. 그래도 이제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얼마 만에 받는 병간호인지 가만 생각해 보던 세이나는, 곧 자신이 아픈 적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상기해 보았다.

    이전과 지금의 차이점이라면, 단 하나.

    전생.

    전생을 자각한 후로 몸이 아팠던 주인공. 있었나?

    ‘없다. 없어.’

    세이나는 실망감을 느끼며 다시 스푼을 들었다.

    그래도 따뜻하고 맛있는 게 들어가니 조금씩 기운이 솟아났다.

    ‘망할.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해. 남들은 상태창에, 상점에, 응? 온갖 사기에 치트 키란 치트 키는 다 받던데 나는 감기라고?’

    신이 있다면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답답했다.

    몇 년 뒤의 사건들을 예상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일 따위, 그녀에겐 불가능했다.

    당장 내일이 걱정이다.

    아, 내일은 뭘 먹지. 돈도 없는데.

    그러다 문득, 디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세이나가 식사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세이나는 급히 그에게서 시선을 옮겼다.

    ‘아냐, 돈까지 빌릴 순 없지.’

    가난뱅이도 양심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다. 거기에 이 민폐를 생각하면 오히려 돈을 줘야 하는 쪽은 자신이 아닐까.

    전생에서는 병간호도 시급을 매겼다. 오늘 받은 친절을 돈으로 하면 아마도…….

    ‘어마어마하겠지.’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에게 돌려줘야겠다. 결론을 내린 세이나는 뒤늦게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예? 뭐라고 하셨죠?”

    “칼만 공작이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전에 말했던, 엘렌을 방문한 그 남자가 칼만 공작이었나요?”

    “아닙니다.”

    “엥? 칼만 공작이 아니에요?”

    “머리 색이 어둡긴 했으나, 더 길었습니다. 그리고 묘한 보랏빛이 있었죠.”

    “그럼 마법사일지도 모르겠네요.”

    마법사들은 보통 머리 색이 매우 독특했다. 이런저런 약을 조합하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사람들이니, 마법약으로 머리 색도 제멋대로 바꾸었다.

    다시 두통이 오는 느낌이었다.

    ‘그놈도 집을 팔라고 하면 어떡하지?’

    또 집을 팔라고 하면, 그땐…….

    “……때릴까요?”

    “예?”

    세이나의 중얼거림에 디온의 표정이 바뀌었다. 공작에 관한 생각에 좁아졌던 미간이 풀리고 푸른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누구를요? 공작을?”

    “잡혀가겠죠?”

    “네. 당연하죠.”

    “그럼 몰래 때릴까요?”

    세이나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디온은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살짝 미소 지었다.

    “네, 몰래 때리면 되겠네요.”

    그러나 세이나는 웃지 않았다. 여전히 진지하게 낮게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몰래 때려야겠어요.”

    역시 보답이라면 그게 가장 좋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음 날. 세이나는 아침 일찍 옆집으로 향했다.

    * * *

    엘렌은 평판대로 아주 친절한 꽃집 주인이었다.

    그녀는 모든 단골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 주변의 이웃들도 최대한 기억하려고 애썼다. 먼저 웃으며 다가가는 것이 그녀의 주요한 장사 기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아침 꽃집으로 들어온 이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보다 큰 키. 검은 머리칼에 옅은 금안을 가진 여자였다.

    짙은 눈썹은 그녀의 인상을 더욱 강인하게 보이게 했고, 도톰한 입술은 일자로 꾹 닫히면 화가 나 있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살짝 올라간 눈매까지. 조금은 사나워 보이는 그 여자는, 자신의 옆집에 사는 사람이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요, 옆집분!”

    “성묘를 가려고 하는데…….”

    “아, 그렇군요! 찾으시는 꽃 있으세요?”

    “적당히 흰색으로 주세요. 저는 꽃을 잘 몰라서요.”

    엘렌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움직였다.

    잠시 후, 그녀가 흰 꽃을 한 아름 들고나왔다. 종이를 펼치고 포장을 시작하는데, 손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고민이 많아서. 할아버님을 만나러 가려고요.”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어조였다. 엘렌은 손을 바삐 움직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어제 아침에, 갑자기 누가 집에 쳐들어왔답니다.”

    어, 나도 그랬는데.

    “알고 보니 칼만 공작님이시더군요.”

    어, 나도 그랬는데……?

    “고, 공작 각하가요?”

    “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노크도 안 하고 갑자기 들이닥치시더군요. 기사들도 함께.”

    그 부분은 엘렌과 달랐다. 그는 무시무시한 기사들과 함께 왔지만, 집 안으로 들어선 이는 그 혼자였다.

    처음엔 엘렌도 정말 깜짝 놀랐다.

    거구의 남자는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이 있었다. 그가 ‘정원사로 채용하고 싶다.’라고 했을 땐 정말 놀라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꽤 다정했다.

    - 난 그대가 필요해.

    그의 눈빛에, 한동안 넋을 놓고 그를 올려다봤었다.

    칼만 공작은 소문만큼 잘생긴 사람이었다. 왜 귀족 영애들이 그의 무시무시한 소문에도 관심을 가지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정원사 채용은 너무 뜬금없었다.

    엘렌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때 정말 실망스러워했던 칼만 공작의 얼굴도,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공작의 방문을 최근에 사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친구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혹시 너한테 반한 게 아닐까?

    - 말도 안 돼!

    ……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사실 조금 설레긴 했었다. 아직까지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또 공작이 오신다면.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그런 그녀의 상념을, 옆집 여자가 깨트렸다.

    “집을 팔라고 하더군요.”

    세이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