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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5화 (5/179)

#5

세이나는 생각했다.

‘오늘은 아마, 이 집이 세워진 이후 가장 다양한 방문자를 받은 날이 아닐까.’

은색 머리칼이 바로 눈앞에서 흔들린다. 그걸 확인한 순간, 세이나는 제 몸이 긴장으로 얼어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거의 안겨 있었다.

“……디온?”

“네, 세이나. 접니다. 괜찮아요?”

“디온 프라벨.”

마지막 말은 세이나의 것이 아니었다.

얼떨떨한 채로, 세이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가정집. 그 속에 잘 차려입은 기사들이 서 있다. 모두의 당황한 눈. 제럴드라 불린 기사는 정말 놀랐는지 손을 든 채로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침착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칼만 공작이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싸늘한 눈으로 디온을 주시하며 물었다.

“네가 여기에 왜 있지?”

“……칼만?”

“그자와 아는 사이인가?”

“각하야말로,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이 집을 사려고 한다만.”

“예?”

“제대로 값도 치를 생각이지.”

“팔지 않아요!”

“보다시피, 아직 협상 중이다.”

세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칼만 공작의 목소리는 처음처럼 대단히 건조했다. 언제든 다시 ‘3백만 루펜’을 뱉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녀가 받아들일 때까지 그럴지도 모른다.

‘이거, 엑스트라 취급이 너무 가혹하잖아.’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작 평민일 뿐이고, 상대는 제국의 공작이다.

무력을 행사하든, 서류를 위조하든, 이 집을 빼앗을 방법은 많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 칼만 공작은 곧, 그럴 사람으로 보였다. 저 싸늘한 표정을 보라.

엑스트라는 주인공들에게 맞춰 줘야 한다.

이 집에 대한 추억도. 지키기 위해 했던 가족들의 노력도. 그들의 입장에선 기억할 가치도 없는 사연일 뿐이다.

주인공들의 목적을 위해, 원작의 진행을 위해 엑스트라는 희생해야 했다.

한 줄 정도는 묘사될지 모른다.

세이나는 엘렌을 붙잡고 이렇게 말하는 칼만 공작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내가 널 갖기 위해 어떤 짓까지 했는지 넌 모를 거야.

‘젠장, 아주 로맨틱하겠네.’

평민인 세이나로서는 그를 막을 힘이 없었다. 이곳은 엄연히 계급 사회였다.

‘이걸 어떻게 하지? 정말 싸워야 하나?’

그때였다.

“제가 사겠습니다.”

세이나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손길이 사라졌다. 앞으로 나선 디온은 공작으로부터 그녀를 지키려는 듯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세이나.”

“……네?”

“제가 더 비싼 값을 부르겠습니다. 제게 파세요.”

그 말엔 칼만 공작도, 조금 흐트러졌다.

세이나는 라샤드보다 더 놀라 버렸다.

“네!?”

“저보다 더 높은 금액을 부르셔야 이곳을 살 수 있으실 겁니다. 각하.”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5백만 루펜.”

“7백만 루펜.”

“8백만.”

“천만.”

“2천.”

“6천만으로 하겠습니다.”

“막 지껄이는군.”

“충분히 가능한 금액입니다만.”

디온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황당한 돈지랄의 향연 속, 세이나의 눈은 거의 평소의 2배 가까이 커졌다.

‘6천만 루펜이 가능하다고? 고급 주택을 3채는 살 수 있는데?’

젊은 공작에, 거금 융통이 가능한 협회장 아들까지. 여주인공에게 몰려드는 남자들의 수준이 대단하다.

한쪽은 울보에 한쪽은 스토커니, 완벽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아무튼, 세이나는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디온이 물었다.

“더 하시겠습니까?”

그것을 마지막으로 집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주위의 온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건만. 바람을 정통으로 맞고 있는 느낌이다.

라샤드 칼만은 그토록 차가운 사내였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얼음 조각상을 보는 것 같은 서늘함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런데, 그를 마주하고 있는 사내도 만만치 않았다.

세이나는 살짝 몸을 빼내 디온의 옆얼굴을 살폈다. 당황스럽게도,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세이나는 다시 그에 대한 소문을 생각했다.

‘어마어마한 또라이.’

6천만 루펜이라니. 그 금액이면 고급 주택가의 3층짜리 저택도 사겠다. 그러고도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금액을 입에 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작에게 맞서고 있다.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안 드나?

‘물론, 그쪽에서 공격에 나서면 나도 가만히 있진 않겠지만.’

막 그렇게 다짐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늘은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군.”

침묵을 깨고 들어온 공작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기사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라샤드는 시선에 응하듯 차갑게 말했다.

“다시 방문하지.”

소름 끼치는 저음. 그에 이어 무거운 발소리들이 집 안을 울린다.

쿵쿵거리며 떠나는 그들을, 세이나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끝까지 지켜보았다.

혹시 마음을 바꾸진 않겠지? 그러나 다행히도, 공작 일행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아침의 그 소음이 다시 거리를 울릴 무렵, 세이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디온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큰일 날 뻔했네요.”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세이나……?”

세이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뒤로 쓰러졌다.

* * *

“감기입니다.”

“예? 감기요?”

“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면 나을 겁니다.”

“감기라뇨. 선생님. 전 감기에 안 걸리는데요.”

“세상에 감기에 안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왕진 온 의사가 투덜거렸다. 세이나의 말을 그저 환자의 철없는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눈치다.

하지만 세이나는 진지했다.

감기에 안 걸리는 사람, 바로 여기 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어요.

하지만 당당히 말할 수는 없었다.

공작 일행이 떠난 직후.

힘이 빠져 주저앉았던 세이나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먼저, 갑자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뒤이어 두통이 그녀를 습격했고, 빙글빙글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리고 기절.

일어났을 때는 곁에 의사가 있었다. 그녀는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호자분께서 잘 도와주세요. 며칠 전에는 입원했다고 하셨죠? 절대 안정해야 합니다. 무리는 금물이에요.”

얼결에 보호자가 된 디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힐끔 세이나를 돌아보았다.

“아내분을 잘 잡아 두세요. 감기에 안 걸린다니. 나 참…….”

두 사람은 의사가 현관에 이를 때까지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세이나가.

‘아내라니. 누가? 내가?’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이분은 어제 옆집 여자께 차이셨어요.’

그리고 그분은 어마어마하게 예쁘시죠. 다름 아닌 여주인공이라고!

디온은 의사를 배웅하고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큰 병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의사를 불러 줘서 고마워요. 그……. 디온은……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우산을 돌려 드리러 왔습니다.”

“아, 그랬나요.”

“그리고 엘렌도…….”

세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했던 바이다.

‘이것 봐요, 의사 선생. 무슨 아내분이야.’

가까이서 본 그는 어제와는 또 조금 달랐다.

어제는 정말 말하는 조각상 같았다.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있고 눈가는 잔뜩 붉어졌긴 했지만.

무미건조한 눈이나, 창백한 안색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체념하여, 지친 얼굴.

그래서 세이나는 그에게 꺼지라고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조금 달랐다. 예쁜 눈동자도 반짝거리고, 얼굴에도 혈색이 생겼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아 여전히 조금, 무뚝뚝해 보이긴 했지만.

‘진짜 예쁘게 생겼다.’

위기 상황에서 구해 줘서 더 예쁘게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딱 타이밍에 맞춰서 왔는지.

그러나 편안한 미소를 보인 세이나와 달리 디온은 퍽 우울해 보였다.

“저 때문이군요.”

“네?”

“저 때문에 어제, 밖에 오래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 미안합니다. 세이나.”

“이건 그냥…… 제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그래요! 병원에서 막 퇴원한 상태라서!”

“환자를 밖에 세워 뒀던 거군요. 30분이나.”

디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면 세이나는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풀이 죽은 모습이 한참 어린 소년 같다.

공작과 맞설 때의 의기양양함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세이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네요!”

“……네?”

“제가 어제 디온을 기다려 줘서 오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네요! 나 정말 잘했네! 그렇죠?”

정말 어제 그냥 발로 차 버렸다면, 오늘 세이나는 무력하게 집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계속 웃음이 나왔다. 울상이 되어 있던 디온도 결국 그녀를 보며 따라 미소 지었다.

“네. 그렇게 되네요.”

“더 기다려 줄 걸 그랬어요.”

“그건 안 됩니다. 앞으로도 그러지 마세요.”

그가 바로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또, 대단히 엄격해 보여 우스웠다. 그가 담요를 세이나의 목 끝까지 끌어다 주었다.

“쉬고 있어요. 집은 내가 지킬 테니.”

그렇게 말하는 눈길이 따뜻했다. 세이나는 디온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눈을 감았다.

‘잠깐만. 그런데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을 집에 들여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은 눈을 감자마자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약에 취한 세이나는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찾아간 꿈에서는 놀랍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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