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4화 (4/179)

#4

차가운 인상의 남자였다.

날카로운 눈매 속 붉은 눈동자가 주변을 훑는다. 얇은 입술은 최소한의 움직임만 보이며 뜻을 전달했다.

명령을 내리는 얼굴 위에 감정은 없었다. 목소리나 말투도 냉담할 것 같다.

하지만 미남이었다.

함부로 다가가 말을 걸기 어렵지만 계속 힐끔 보게 되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다고 세이나가 그에게 반해 유리창에 들러붙어 있는 건 아니었다.

‘잠 좀…… 잠 좀 잡시다!’

현재 시각 10시.

12시가 평소 기상인 그녀의 생활 패턴에서는 매우 이른 시간이었다. 다시 잠자리에 들어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주변에 인기척이 너무 많아 눈을 감을 수조차 없다. 헌터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로써 평소보다 이른 아침이 시작되었다.

“아오, 머리 아파.”

세이나는 짜증을 꾹꾹 누르며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나와, 일단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카락이 다 말라 갈 때까지도 마차는 떠나지 않았다.

창문가를 서성이던 그녀는 결국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다.

처음 눈이 마주친 이는 앳된 얼굴의 기사였다. 그가 세이나를 발견하고 친절하게 물어 왔다.

“본의 아니게 길을 막게 되었군요. 미안합니다. 지금 나가십니까?”

“아니요. 너무 시끄러워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나왔어요. 대체 무슨 일이죠? 이른 아침에, 고급 마차에…….”

세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차의 뒤, 무장한 이는 20명.

“기사들까지. 사람 하나 잡아가는 것 같은 분위기네요.”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정말이죠?”

기사가 한숨을 내쉬며 현관 앞 계단을 올랐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사실, 저기 저 꽃집 아가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제 주인께서 그녀를 정원사로 고용하고 싶어 하셔서요.”

“……정원사요?”

“네. 꼭 그 사람을 고집하시기에 이렇게 직접 모시러 왔습니다.”

세이나는 눈치 빠르게 물었다.

“설마, 정원사 고용은 핑계?”

“아마도……. 반하신 듯…… 합니다만.”

어린 기사는 말을 해야 할 대상을 잘못 고르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

세이나는 그 흑발의 방문자가 프롤로그에 등장한 사내 중 하나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옆집의 로맨스 따위, 알 게 뭐람.

나는 상태창도 못 부르는데.

“그럼 언제 떠나시나요?”

“아마 곧…….”

그때, 옆집의 문이 열렸다.

“펠립!”

기사는 부름에 빠르게 뛰어갔다. 저 멀리, 흑발의 남자가 다시 세이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위에서 보았듯 꽤 거대한 체구였다. 목소리도 들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결렬됐다.”

“그럼 이제 어떻게…….”

“저 집의 주인과 이야기 중이었나? 마침 잘되었군.”

돌연 그의 시선이 세이나를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세이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라고 당황하던 바로 그 순간.

그가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 뭔데?! 뭐?’

넓은 보폭으로 내딛는 발끝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빠른 걸음. 눈은 무시무시했다.

원수를 발견한 전사가 딱 저런 얼굴이지 않을까.

‘아, 왜 또 나야!’

세이나는 본능적으로 도망쳤다. 집 안으로 들어가, 황급히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너무 늦은 타이밍이었다.

툭.

좁은 문틈 사이로 끼어든 구두를 본 순간, 세이나는 스산한 한기가 등을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독히 낮은 음성이 위에서 쏟아졌다.

“잠시 실례하지.”

핏빛을 닮은 붉은 눈. 높은 키. 가까이서 맞이한 그는 예상대로 실로 대단한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귀족의 정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무섭고 냉정하고, 깐깐한 귀족이다.

“이 집을 사겠다.”

그 말이, 세이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예?”

“백만 루펜이면 되겠나?”

“그게 무슨…….”

“소개가 늦었군. 라샤드 칼만이다.”

그리고 세이나는 두 번째 충격을 느꼈다.

“……공작?”

젊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묻지. 얼마면 되겠나?”

* * *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보통 로맨스 소설에서 남주인공들은 완벽하다. 황족, 귀족, 혹은 아주 강력한 마법사에, 생소한 이종족도 가끔 섞여 있다.

이런 법칙은 세이나의 옆집 아가씨를 쫓아다니는 남자들에게도 적용되었다. 협회장의 아들 디온 프라벨은 귀족이었고, 앞의 남자도 그러했다.

라샤드 칼만. 풀네임은 모름.

그에 대한 소문은 꽤 복잡했다. 다재다능. 천재. 최연소 소드 마스터. 나라 최고의 미남.

냉혈한. 악마. 괴물.

그리고 세이나는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었다.

스토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 거리에 머무르고자 한다.”

세이나가 늘 식사를 하던 자리는 이제 흑발의 남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양쪽으로는 무장한 기사들이 줄을 서 있다.

무거운 분위기. 일평생을 살아왔던 집에서 세이나는 지금,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집 안에 들이닥친 공작이 말했다.

“갑자기 방문한 점은 사과하지. 하지만 그만큼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상세한 내용을 공유해 줄 수는 없지만. 아주 심각하고, 또 급하다고 할 수 있겠군.”

“아, 네…….”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이 집의 위치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값은 얼마든 줄 수 있어. 돈 외에도 바라는 것이 있으면 뭐든 말해도 좋다.”

“…….”

“일자리를 찾아 줄 수도 있고, 타국으로 보내 줄 수도 있다. 원한 관계에 얽혀 있다면 최대한 도움을 주지. 네가 원하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언뜻 듣기엔 좋은 제안이었다.

강제적으로 들어온 것치곤 설명도 꽤 구체적이었다. 조곤조곤 말하는 말투는 상대가 그에게 귀를 기울이게 했다.

하지만 세이나는 싫었다.

‘그러니까, 쟤가 지금 옆집 여자를 좋아하니까 이 집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지?’

결렬됐다.

분명 그렇게 말했다.

옆집 여자에게 어떤 제안을 했고, 그녀는 그걸 거절했다. 칼만 공작은 그녀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남주인공들은 여주인공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저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니, 그 옆집이라도 점령하고 싶겠지.

보통 독자였다면 세이나도 손뼉을 쳐 줬을 것이다.

‘와우, 매일 옆집에서 보면서 친해지려는 거야?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에서도 보호하고? 정성이 갸륵하네.’

그러나 옆집 주인은 이렇게 말하겠다.

‘돌았니?’

“절대로 팔지 않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군.”

라샤드는 ‘백만 루펜’에서 세이나가 인상을 구기자 바로 ‘3백만 루펜’을 불렀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 정도라면 이 거리보다 훨씬 좋은 곳에서 집을 살 수 있다.

세이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집은 내 할아버지부터 살았던 곳이에요. 직접 지으셨고, 가족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죠. 절대로 팔 수 없어요.”

“그럼 더 주면 되겠군.”

“얼마를 줘도 팔 수 없어요. 돌아가 주세요.”

그러고 세이나는 몸을 일으켰다. 기사들을 헤치고 현관문까지 다가가, 문의 손잡이까지 잡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공작을 마주하고서도, 양옆에 기사를 두고서도 그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공작이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다.

또한, 돈에 미련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절대로 못 팔아.’

이 집은 가족의 흔적이 남은 곳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도 여기서 살았다.

지금은 그녀의 곁에 남지 않은, 그들이 살았던 곳이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유언으로 이 집에 대해 당부했다.

- 이 집을 소중히 여겨다오. 세이나.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그걸 다 포기하고 떠난단 말인가?

“얼마를 가져오든 받아들이지 않아요. 돌아가 주세요.”

“감히 각하의 명령을 거역하다니!”

느닷없이 들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줄곧 그들의 곁에 있던 기사였다. 세이나는 짙은 콧수염의 그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명령이라뇨. 저는 각하의 수하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엄연히, 거래죠. 그리고 방금 결렬되었습니다.”

“이 건방진……!”

그녀는 또 바로 그에 반박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을 연 바로 그 순간, 기사의 손이 위로 치솟는 것이 보였다. 세이나가 재빠르게 물러서려던 순간.

“제럴드. 그만.”

기사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흑발의 공작이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그러나 제럴드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이나가 비틀린 미소를 지은 것은 그때였다.

“때릴 테면 때리든가. 그럼 나도 가만히 안 있어.”

보아하니 몸도 그리 단단한 것 같지도 않고.

이 정도면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다.

빠르게 견적을 내린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앞에서 노려보고 있는 공작 따위,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걸어오는 싸움은 맞받아쳐 준다.

좌우명이라 해도 좋을 말을 되새기며,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공작이 다시 소리쳤다.

“제럴드!”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가장 놀란 이는 당연히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있던 세이나였다.

그녀는 당황 속에서 제 몸이 옆으로 확 기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찰나. 제럴드란 남자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인다. 균형을 잡기도 이미 늦었다.

‘넘어진……!’

하지만 그녀의 머리와 부딪힌 것은 바닥이 아니었다.

“……세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매우 가까이에서 들었다.

세이나는 뒤늦게, 자신이 누군가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다는 것도.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올렸다.

바로 위.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세이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디온 프라벨이었다.

당신이 여기서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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