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3화 (3/179)

#3

집에 들어온 세이나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당연히 마른 수건을 찾는 일이었다.

디온에게 새 수건 여러 장을 전달해 준 그녀는 곧바로 마정석들을 부딪혀 집 안을 밝혔다. 다음엔 문을 조금 열어 환기를 시키고, 벽난로를 점검한 후 다른 마정석으로 불을 피웠다.

그리고 또 다음은…….

“……도와 드릴까요?”

“예!? 아아, 아뇨! 괜찮아요! 거실 소파에서 쉬고 계세요!”

세이나는 그를 거실에 두고 더 바쁘게 움직였다. 젖은 외투는 욕실로, 그곳에서 다른 옷도 닦아 내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챙기고 거실에 완전히 들어가기 전, 세이나는 잠시 멈춰 안을 들여다보았다.

디온 프라벨은 천천히 젖은 외투를 벗고 있었다.

세이나가 다른 일을 하느라 꽤 시간이 걸렸는데, 이제 저러는 걸 보면 들어오고도 꽤 망설인 모양이었다.

툭. 툭. 단추가 열리고, 겹쳐 입은 다른 옷까지 벗어 내자 살갗에 들러붙은 흰 셔츠가 나타났다.

어려 보이는 얼굴과 달리 제법 넓은 등. 반듯하고 곧은 어깨와 움직이는 근육에 저절로 시선이 박힌다.

그리고 눈처럼 깨끗한 목덜미를 보던 그 순간…….

그가 수건으로 어깨를 덮었다.

‘미친, 세이나. 너 뭐 하냐.’

하지만 자책한 것도 잠시, 세이나는 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큰 수건은 그의 상체를 다 가릴 만큼이나 컸다. 그것을 어깨에 얹은 채, 그는 이제 머리를 닦기 시작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수건 사이로 수심에 잠긴 옆얼굴이 스쳐 보였다.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오셨네.’

귀하신 분.

그 말 그대로 그는 보통 사람과 달라 보였다. 영락없는 귀공자. 곱상한 얼굴에 기품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다정다감해 보이진 않았다. 시린 빛의 눈동자 때문일까. 심각한 표정 때문일까. 가만히 지켜본 그는 꽤, 엄숙해 보였다.

‘혹시 사제일까?’

신비로운 은빛 머리칼이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아름다운 외모에 고상한 분위기. 우아한 사제님이 딱 어울린다.

뭔가.

‘현실감 없어.’

천사처럼 갑자기 날개가 돋아나 사라져도 놀라지 말자고 생각하며, 세이나는 일부러 기척을 내며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이나가 찻잔이 든 트레이를 내려놓자, 드디어 그가 말했다.

“마시지 않아도 됩니다.”

“예?”

“타인이 주는 것은 잘 입에 대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럼 일찍 말해 주시지…….”

“……주인분께서 드시고 싶어 그러시는 줄 알았습니다.”

예쁜 천사님께서는 꽤 소심할지도.

세이나는 제 몫의 찻잔을 챙긴 채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디온 프라벨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디온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아주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또라이라며?

‘혹시 이중적인…… 그런 건가? 소설에서는 어땠지?’

소설에서도 그의 비중은 아주 적었다. 그냥 지나가듯 언급되었던 듯하다. 그래도 하나, 제대로 기억하는 건 있었다.

그는 남주인공 후보가 아니었다.

아마 프롤로그였을 것이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꽃집을 운영하는 엘렌이 짧게 서술되어 있었다. 방문한 남자는 총 3명.

흑발. 주황색. 그리고 녹색 머리칼.

은발은 없었다.

‘조연이겠지.’

그가 더욱 안타까워졌다.

디온 프라벨은 열심히 엘렌을 찾아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이어지진 못할 운명인 듯했다.

그저 엘렌의 추억 속 한 파편 정도. 혹은 남주인공들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가 될지도.

“……헌터시군요.”

돌연 디온이 말했다. 어느새 고개를 든 그는 세이나가 아무렇게나 걸쳐 둔 다른 외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험가 협회 소속의 헌터임을 상징하는 문장이 가슴팍에 그려져 있었다.

“아, 네. 그렇죠.”

“그래서 저를 알아보셨군요.”

“예, 음……. 어쩌다 보니.”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세이나는 헛기침을 한 뒤 그에게 물었다.

“저기……. 무슨 일이에요?”

그에 남자의 시선이 더 아래로 향한다.

세이나는 몸을 앞으로 빼내어 그에게 조금 다가갔다.

“저는 완전한 남이잖아요. 아, 헌터니까 아주 남은 아닌가……. 아무튼. 비밀은 지켜 줄게요. 다른 곳에 떠들 만큼 발이 넓지도 않고. 토로하다 보면 기분이 나아지기도 하잖아요?”

“관계없는 분께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민폐인데요.”

디온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예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세이나가 피식 웃었다.

“저, 꽤 오래 그 앞에서 기다렸어요.”

“시간이 그렇게나……. 죄송합니다.”

“이 날씨에 말이죠.”

“그것도 죄송합니다. 말씀하셨다면 비켜 드렸을 겁니다.”

“너무 안 움직이셔서……. 울고 계시기도 하셨고.”

“……사과드립니다.”

“아니, 우는 것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고.”

개자식치곤 자존감이 너무 낮은 것 아냐?

세이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디온은 또 눈물을 떨어트릴 것만 같았다.

우는 모습이 꽤 보기 예쁘긴 했지만, 그녀는 변태가 아니었다.

“어쨌든. 이미 민폐니까 더 민폐여도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그건…….”

“들어줄게요. 잊어도 드리고.”

그러니 회장님께 내 이야기도 잘 좀 해 줘.

세이나는 속내를 숨기며 생긋 웃었다.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시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그리고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고 디온의 말을 기다렸다.

꽤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연회에서였습니다.”

그때 세이나는 이미 졸고 있었다.

* * *

디온 프라벨의 연애사는 매우 구구절절했다.

“……그래서 그날, 저를 연회장 안으로 데려와 준 엘렌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망설이고 경계하던 몇 분 전은 벌써 까먹었는지. 상세하고 꽤 복잡하기도 하다.

세이나는 허벅지를 꼬집었다. 벌써 다섯 번. 의식을 잃었다.

이야기가…… 너무 길다.

괜히 물어봤다.

“엘렌은 그 후로도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습니다. 후에 그녀의 상황이, 저보다 훨씬 나쁘다는 걸 알았을 땐…….”

‘졸면 안 되는데. 회장님 아드님인데…….’

“……그 후 엘렌의 행방을 찾아다녔고…….”

‘회장님 아드님…….’

“……이 거리를 지나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처음엔 제 눈을 믿기가 어렵더군요. 제국을 모두 뒤졌다고 생각했는데, 수도에 있다니. 정말…… 바보처럼…….”

‘작가가 설정해 둔 거지. 너무 자책하지 마.’

“며칠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다가…….”

“……스토킹이네.”

헙. 세이나는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멋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정신이 몽롱하고 너무 피곤했던 탓이다.

그러나 디온은 화내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다, 곧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네, 그렇네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2주 전,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다른 사람이요?”

“남자였습니다.”

“엘렌 양의 가족이 보낸 사람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그는 손님이었습니다. 거의 매일 그녀를 방문하고 대화하더군요. 신분도 높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조급해졌군요.”

“……예.”

“하긴. 옆집 아가씨는 꽤 예쁘니까요.”

그 예쁜 얼굴을 보고 새로운 남자가 꼬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디온의 추측도 세이나와 같은 듯했다.

“후작 가문에서는 아직 엘렌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습니다. 후에 후작 가문에서 그녀를 데려갈 수 없도록.”

세이나는 그의 다짜고짜 식 고백에도 나름의 사정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공개적으로 엘렌을 지킬 명목이 필요했다.

남편이 막고 서 있으면 후작가도 그녀를 함부로 데리고 가지 못한다.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디온은 엘렌을 좋아하니까. 결혼이라는 선택이 제일 먼저 떠올랐겠지.’

세이나는 그의 모든 사정을 긍정했다. 그리고 디온을 긍정하듯, 또한 엘렌도 긍정했다.

‘1달은 이르긴 해.’

기억을 잃은 그녀의 관점에서 그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다.

디온은 저를 처음 봤을 때, 엘렌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기억이 없음을 알아차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좀 더 시간을 가졌어야 했는데.

아니면 좀 더 열심히 꼬셨어야 했는데. 저런 미모를 가지고도 잘 안 먹혔던 모양이다.

‘엘렌 취향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디온은 다름 아닌, 회장님 아드님이니까.

와, 우리 도련님. 힘드시겠다. 파이팅. 응원할게요.

그럼 이제…….

집에 갑시다. 좀.

“할 수 있을 거예요.”

보석처럼 파란 눈동자가 다시 세이나를 향했다. 그녀는 최대한 친절하게 방긋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미안해요.’가 ‘꺼져.’랑 같은 뜻은 아니잖아요?”

“……그럴까요?”

“네. 꼴 보기 싫다든가. 짜증 난다든가. 그런 말은 안 했잖아요. 여자들은 아주 호감이 없으면 칼같이 거절한단 말이죠.”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런데 엘렌 양의 표정에 극혐…… 아니지, 짜증이나 혐오감은 없었어요.”

“정말입니까?”

“내가 다 보고 있었어요. 날 믿어요.”

드디어 그의 얼굴에 조금 생기가 생겼다.

무표정일 때도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이번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다.

“고맙습니다.”

진심 어린 목소리. 세이나는 빙긋 웃으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디온도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맛있네요.”

“그렇죠?”

디온 프라벨은 그러고 오래지 않아 돌아갔다.

내내 고맙다고 하더니 떠나면서도 고맙다며 예의 바르게 고개까지 숙여 보였다.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회장님 아드님과의 만남은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세이나는 직후 단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시X…….”

난데없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세이나는 어쩔 수 없이 이불을 젖혔다.

창가로 다가가니 강 바로 옆에, 커다란 마차가 멈춰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뒤엔 말을 탄 기사들도 줄지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선 이는 남자였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 그는 기사들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한쪽을 가리켰다.

방향은 당연히 옆집. 엘렌 유클레스가 있는 곳이다.

순간, 세이나는 깨달았다.

드디어 시작됐다. 소설의 본편이.

하지만.

“잠 좀 자자 이 새끼들아…….”

너희 집착은 아침도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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