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화 (1/179)

#1

1. 내 이웃에 여주가 산다

기어코 그 순간이 왔다.

“좋아합니다.”

은발의 미남자는 스스로 말하고도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오래전부터 간직했던, 깊고 깊은 진심이 마침내 끓어넘쳐 저도 모르는 사이 입 밖으로 흘러나와 버렸다.

그러나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

그녀를 보는 남자의 눈동자에 각오가 스쳤다.

적어도 ‘누군가’는 그렇게 보았다.

“내 곁에 있어 주세요. 엘렌. 제가 반드시 당신을…….”

“미안해요. 디온 님.”

여자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더니 곧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옷을 꽉 붙잡은 손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역시,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럼…….”

“우리. 알고 지낸 지 1달밖에 안 되었잖아요.”

그때, 남자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당황보다는 충격에 가까웠다.

1달이라.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속삭였다.

‘누군가’는 그렇게 읽었다.

“그래서…… 너무 당황스럽네요. 이건 그러니까…… 청혼이 맞는 거죠?”

“엘렌.”

“미, 미안해요. 디온 님. 저는 아직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국, 여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남자의 고개도, 아래로 향했다.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서 있는 자가 눈에 띄는 미남이라 더욱 그랬다.

사정을 모르고 지나가는 이들도 걸음을 멈추고 한 번쯤 살펴볼 정도로. 하지만 감히 말을 걸지 못할 정도로. 그는 처연하고, 비참해 보였다.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에게 그렇게 보였다.

‘어쩌라고.’

그들을 지켜보던 누군가.

세이나 로힐은 흐린 눈으로 빈정거렸다.

여자와 남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꽤 오랫동안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혹여 들킬까 하는 걱정은 없었다.

이런 순간에 주변을 신경 쓰는 주인공들이 있던가?

‘역시 기억 못 하나 보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사연도 알고 있었다. 여자보다 더, 어쩌면 저 남자보다도 훨씬.

그녀가 알기로 일단, 저 여자는 기억 상실증이다.

‘흔하고. 뻔하지.’

마찬가지로, 안타까움은 있었다. 어렵게 찾아온 과거의 첫사랑이 자신을 ‘한 달’만 만난 사람으로 치부하면 얼마나 슬플까.

아아, 짐작이 간다. 너무 슬플 거야. 너무 힘들 거야.

알겠어.

알겠으니까…….

‘제발 내 집 앞에서 꺼져 주지 않을래?’

세이나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 왜, 텔레파시라는 걸 시도해 보려는 계획이다.

현실감은 없다만 이 세계 자체가 그녀가 아는 ‘현실’과는 꽤 많이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그렇게 따지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자신이, 가장 현실감이 없었다.

그리고 환생한 후의 지금이 얼핏 보았던 소설 속인 것도.

그리고 하필이면, 그 소설의 상황이 하필 자신의 집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도.

그녀는 머리를 헝클며 울상을 지었다.

“도대체 남의 집 앞에서 왜들 그러세요…….”

* * *

세이나 로힐이 전생을 자각한 건 2주 전부터였다.

의뢰 중에 마물의 공격을 피하다 미끄러져 나무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병원 안이었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동료는 ‘그래도 부러진 곳은 없다.’라고 했고, 의사는 ‘머리도 괜찮습니다.’라고 했다.

세이나는 어이가 없었다.

의사 양반.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정상이라니.’

남의 것처럼 생소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꿈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생생했고, 미쳤다고 하기엔 정신이 너무 또렷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세이나는 전생의 기억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책 속에 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의 직업은 헌터였다.

주 임무는 마물 토벌. 가끔은 요인 경호도 하고, 현상금 수배범도 몇 잡았다. 그녀가 전생에 봐 왔던 수많은 소설 속 헌터들이 그러했듯.

전생. 헌터.

그 두 가지만 섞이면 보통 기막힌 사기 능력을 갖추지 않던가?

그래서 시도해 보았다.

“상태창!”

결국, 의사는 입원 기간을 이틀에서 일주일로 연장했다.

여러 차례 상담까지 거쳤건만 두 사람은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상담 기간, 세이나는 더욱 확신했다.

나는 이전 생의 기억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뒤늦게 깨달았고, 이제 완전히 자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돈……. 없네.’

어마어마한 병원비를 내고 나니 주머니가 가벼워졌다.

막 퇴원한 헌터, 세이나 로힐은 가난했다. 그것도 매우.

‘말만 헌터지. 용병과 다를 바 없으니까.’

마물을 사냥하는 자들에게 붙은 그 번지르르한 이름은, 현시점에서 과거의 용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고용주가 없으면 그녀는 돈을 벌지 못했다. 그리고 모험가 협회 내에서 그녀의 평판은 현재 최악이었다.

‘하여간. 그 의뢰가 실패한 이후부턴 되는 일이 없어.’

세이나는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갔다.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굴리다 보니 또 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태어났어.’

그리고 빙의자일지 모른다.

‘아마도.’

죽은 후 책 속에 떨어졌다던 무수한 전개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그 주인공들은 대부분 자신처럼,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아니, 능력이 없어도 괜찮다. 혹시 이 세계가 그녀가 전생에서 읽었던 책 속이라면 그녀는 미래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던 셈이니.

그럼, 도대체 무슨 책일까.

‘헌터가 있으니 장르는 판타지일 것 같은데. 아포칼립스물일지도?’

적어도 그녀가 살아온 인생은 그런 장르였다. 죽은 동료들도 부지기수, 팔다리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도 많았다.

등급별로 나누어져 있는 헌터 단계. 마정석. 협회. 검과 마법까지.

합리적인 추리였다.

이건 확실히, 아포칼립스 헌터물이다.

세이나는 더욱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마주쳐 버린 것이다.

*

세이나의 집 앞.

느리고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옆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대단히 무거운 분위기였다. 잘 살펴보니 여자 쪽은 몇 달 전쯤 이사 온 이웃이었다. 이름은…….

“엘렌.”

그런 이름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꽃집을 하고 매우 친절하다. 그리고 남자 쪽은…….

“디온 님.”

그 순간 벼락이 치듯 어떤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껏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었다.

웃고 있는 옆집 여자. 그녀에게 구애하는 남자들.

엘렌과 디온.

설마.

‘내 옆집 이웃이 여주인공이었어?’

옆집 아가씨 엘렌. 아니, 엘렌 유클레스.

유클레스 후작의 사생아로, 어릴 때부터 온갖 괴롭힘에 시달리던 주인공. 그리고 결국,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피해자.

그리고 도망치고도 과거를 이겨 내지 못하고 스스로 마녀를 찾아가 기억을 지운 여자.

디온.

과거 엘렌의 유일한 친구. 아주 예전부터 엘렌을 좋아했던 남자.

그럼 나는?

‘나 혹시……. 엑스트라?’

상태창! 이라고 외쳐도 상태창 따위 나타나지 않았고.

대단한 마법 실력도 없고, 하늘이 내린 검술 재능도 없고.

망나니처럼 제멋대로 살긴 했지만, 으리으리한 집안의 자제도 아닌, 악역 같다는 말도 가끔 들었지만 영애도 아니고.

흔한 검은 머리칼에, 평범한 외모.

주어진 특징은 딱 하나. 여주인공의 옆집 주민.

‘그럼 사기 스킬은?’

전생에서 수많은 소설을 보았다.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들로 순식간에 강자가 되는 환생자와 빙의자들을 세이나는 무수히 접했다.

그러나 그중 자신에게 해당하는 사례는 없었다.

여주인공의 옆집에 사는데 어마어마하게 강해서 성공한 사람, 있던가?

‘없어…….’

여주인공의 옆집에 사는데 부자가 된 사람, 있던가?

‘없다고.’

여주인공의 옆집에 사는데…….

‘상태창. 없어?’

그때, 그 남자가 말했다.

“엘렌.”

엘렌이 답했다.

“네, 디온 님.”

세이나도 답해 보았다.

“망할 인생.”

어떤 남녀의 애절한 로맨스의 현장에는, 제 머리를 부여잡고 울상이 된 여자가 하나 섞여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조금도 설레지 않았다.

내가 엑스트라라니. 빙의했는데 무능력이라니.

그녀의 절망과 별개로 스토리는 계속 진행되었다.

남자는 슬픈 눈으로 여자를 붙잡았고 여자는 당황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세이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점점 더 비관적으로 변했다.

“좋아합니다. 엘렌.”

어쩌라고.

“미안해요. 디온 님.”

응. 좀 꺼져.

“역시,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너희들끼리 뭘 하든 관심 없으니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솔직히 좀 안 어울리는 듯.

“그럼…….”

제발 우리 집 앞에서 좀 꺼져라.

차라리 빙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살래, 시X.

빙의했는데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니, 이게 말이 돼?

게다가 나는 헌터인데?!

“정말 미안해요.”

세이나가 말도 안 되는 텔레파시를 시도한 건 옆집 여자가 고개를 숙여 보인 직후였다.

옆집 여자는 안절부절못하다 곧 몸을 돌렸다. 향하는 방향은 당연히 몇 걸음 앞에 있는 집의 현관이었다.

이제 거리에 남은 이는 단둘.

세이나는 몸을 일으켰다.

남자와 현관 사이의 거리가 좁지만 파고들기 어렵진 않다. 정신도 차렸겠다, 소설의 정체도 알았겠다, 더는 그를 구경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에겐 더 큰 고민이 있었다.

‘젠장, 스킬이 없으면 뭐로 돈을 벌지? 그 소설 내용이 어떻더라?’

그런데, 그녀가 채 한 발자국을 내딛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움직였다.

실연당한 남자의 고개는 줄곧 아래로 향해 있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걸어가다가…….

털썩.

세이나의 집 앞에 주저앉았다.

“미친,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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