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10)화 (110/110)
  • 에필로그. 공작저에서 연애가 금지된 이유 (5)

    ‘내가 어제 무슨 말을 했었지.’

    알렉시스는 손에 든 깃펜에서 잉크가 흐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궁정 회의에서 파렴치한들이 제게 뒤집어씌우려는 횡령 혐의가 여럿이었다. 그것을 제대로 살피고 반박할 자료를 만드는 데만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다음에 말씀드릴까요?”

    응답이 없자 충실한 노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알렉시스는 서류 귀퉁이를 까맣게 물들이고 있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알스도프는 굳이 쓸모없는 말을 꺼낼 리 없으니 들어 볼 필요는 있었다.

    “아니. 지금 보고해.”

    “현재 공작저에서 근무하는 사용인 중, 성인은 80%입니다.”

    “그래서?”

    “그중 50%는 기혼자인데, 배우자가 공작저 외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미혼인 사용인들이 외부에서 결혼 상대를 찾을 경우, 공작저의 대외비를 노출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입니다. 브래디 톰슨도 내부인이었기에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렉시스는 노집사의 말에 기억을 더듬었다. 브래디 톰슨이 누구였는지는 진작에 잊었다. 하나 동쪽의 덧문이라 하니 생각나는 치는 있었다. 덜떨어진 주제에 욕심에 눈만 벌건, 그가 제일 혐오하는 유의 인간이었다.

    “그럼 규율의 내용을 바꾸지.”

    알렉시스는 깃펜을 다시 잡고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말하자, 알스도프가 반가운 어조로 물었다.

    “사용인들 간의 이성적 교제 금지를 철회할까요?”

    “그러든지.”

    그의 관심은 이미 서류로 향한 뒤였다. 투란 백작이 제기한 혐의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가로 받은 공작령이 몇인데 산지가 대부분인 영지를 빼앗으려 하위 귀족을 핍박했다니. 반박하는 것도 입 아플 지경이었다.

    알렉시스는 투란 백작의 서류에 몇 가지 코멘트를 단 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대신 현재 시간부로 미혼인 사용인이 스스로 교제하는 것을 밝히거나 결혼을 원할 시에는 공작저에서 해고한다.”

    “예?”

    “상대가 공작저 내부인이든, 외부인이든 구분 없이 시행해.”

    “가, 각하. 그러면 금지를 철회하는 의미가…….”

    “네 말대로라면 미혼인 사용인이 배우자를 찾는 과정에서 공작저의 정보가 누출되는 것이 문제라는 뜻 아닌가?”

    “…….”

    불난 데 물을 부으려다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고 알스도프는 생각했다.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용인 중 누구도 해고를 원하는 이들은 없다. 제국에서 최고의 급여를 쳐주는 데다가 시녀의 경우에는 훗날 나이가 들어 퇴직하게 되면, 다른 귀족가로 근무 장소를 옮겨 정보를 흘리지 않도록 넉넉한 자금까지 쥐여 주지 않는가.

    “알겠습니다.”

    알스도프는 여기서 그만 물러나기로 했다. 어쨌든 이성 교제 금지를 전면에서 금지하는 것은 아니니, 한결 나아진 처사였다. 나머지는 사용인들끼리 알아서 하겠지 싶었다.

    십수 년 동안 곁에서 모신 주인이 이리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딱히 뚜렷한 지시를 내린 건 없었지만, 알스도프는 주인이 그 하녀에게 조금은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서둘러서 좋을 건 없지.’

    그러나 주인의 관심이 호감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설령 호감이 맞다 치더라도, 그 아이에게는 악재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쉬십시오.”

    인사를 올리는 중에도 발텐 공작은 서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방 하녀에 대해 조금이라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알스도프는 조용히 물러 나오며 생각했다. 어쩌면 안주인이 탄생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 * *

    오래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페터는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정말 발텐 가의 규율이 그런 일 때문에 생겼단 말이냐?”

    “네, 폐하. 그래서 당시 미혼이었던 사용인들은 대부분 결혼하지 않는 편을 택했답니다. 물론 퇴직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요.”

    에밀리는 한숨을 폭 내쉬며, 그래도 자신은 이만한 일자리를 포기할 순 없었다고 덧붙였다.

    “캐슬린, 아니, 마님께선 그래도 저보다 결혼에 더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저를 두고 혼자 떠나실 줄은 꿈에도 몰랐죠.”

    “하하. 많이 억울했겠구나. 연애를 할 수 없으니까 룸메이트를 많이 의지했을 텐데.”

    “물론 그랬습니다. 사실 연애를 안 해 본 건 아닌데 그래도…… 합!”

    저도 모르게 비밀을 털어놓아 버린 에밀리가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고 제 입을 틀어막고 눈치를 봤다. 페터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내가 설마 이런 불합리한 규율을 어겼다고 형님께 일러바치겠느냐?”

    “저, 정말 말씀 안 하시는 거지요, 폐하?”

    “그렇대도.”

    알렉시스 발텐이 제 마음을 자각하기 훨씬 전에도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했다.

    물론 당사자도 그 사실을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캐슬린이 공작 부인이 된 이후에는 그 규율을 없애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었느냐?”

    “물론 그러고 싶었지만, 처음엔 주위에서 다들 말렸어요. 듀록 남작 부인 때문이었죠.”

    “형님의 유모였던 여자 말이냐?”

    “네. 남작 부인은 그 규율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

    “일리 있구나. 그럼 그녀가 죽은 다음에는?”

    “마님께서 공작 부인이 되시고 한동안은 감히 말씀도 올리지 못했어요. 차차 적응하시면 나중에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비밀 연애라는 게 어렵더라고요.”

    “헤어졌느냐?”

    “네. 아무래도 발텐 가의 기사들은 마이어를 떠나 있는 경우도 잦으니까요.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더라고요.”

    “저런. 아쉬웠겠구나.”

    “괜찮습니다. 이젠 마님께서 완벽한 대공비 전하가 되셨으니까, 그 규율을 완전히 없애 주실 거라고 믿어요.”

    페터는 당차고 눈치 빠른 대공비의 시녀가 무척 마음에 들기 시작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황제가 꽤 호의적인 반응이자, 에밀리는 신이 나서 더 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들켰다가는 해고될 테니 늘 숨겨 왔던 연애인 데다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캐슬린 앞에서 털어놓을 수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페터는 에밀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흙탕물을 밟으러 달려가는 루치를 발견하고 기겁하며 저지했다. 그리고 유모를 불러 맡겼다.

    “루치는 오늘 본관 1층에만 머물게 해라. 그리고 에밀리는 나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그리 알고.”

    “예, 폐하. 공자님은 제가 성심성의껏 돌보겠습니다.”

    유모가 루치를 데리고 물러나자마자 페터는 다시 에밀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앉은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디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께서는 에밀리 양이 하는 이야기가 뭐가 그리도 재밌으실까요?”

    “글쎄요.”

    요제프는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포크로 찍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새 친구가 필요하신지도 모릅니다.”

    “새 친구요?”

    “셴베르크 백작, 아니, 자작이 좌천당했잖습니까. 마이어에서 남부는 머니까 때론 적적하시겠죠.”

    “두 분이 친구셨구나.”

    에디스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자세를 바로 해 테이블 앞에 앉으며 샴페인을 마셨다.

    “어쩐지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시더라고요. 공문서는 따로 올리는 것 같던데.”

    “그러시겠죠. 친밀하셨으니.”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신 것 같던데. 슬쩍 편지를 엿봤는데 아주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 말투였어요.”

    “그거 지금 보안 유지법을 어겼다고 고백하시는 겁니까?”

    “설마요. 그냥 지나가다가 봤는데 그런 것 같았다는 말이죠.”

    능수능란하게 빠져나가는 말솜씨는 약제사가 아니라 책사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그런데 신관님.”

    “예.”

    “아직도 대공비 전하께 마음이 있으세요?”

    “예?”

    “아니, 피로연 내내 야채만 뒤적이고 있으시길래요. 최고급 스테이크는 입에도 안 대시고.”

    “반역죄가 될 만한 말을 몇 번이나 그리 아무렇지 않게 해도 되는 겁니까, 에디스 양?”

    요제프는 당황해서 빠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황제의 옆 테이블이라 아무도 가까이 온 자가 없어, 누군가 들었을 것 같진 않았다. 황제는 황제대로 대화하느라 바빴고 말이다.

    “그러다 일이라도 커지면 어쩌려고요.”

    “안 커지게 도와드릴 생각이었죠.”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제프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접시에 신경을 집중하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잘라 낼 테니까요.”

    “그 스테이크처럼요?”

    “……에디스 양.”

    “비밀은 지켜 드릴게요. 어차피 동료가 파면당하면 슬퍼지는 건 저니까.”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네에. 저흰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요.”

    에디스는 잠자코 대꾸하며 지나치는 시종에게 샴페인을 한 잔 더 주문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네요.”

    새로운 잔을 받아 든 그녀가 말했다.

    “폐하께서도 편안하시고, 대공저도 사랑이 넘치고. 그래야 남부까지 그 평화가 내려올 수 있을 텐데.”

    “그러려고 저희가 남부에 머무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

    “그렇죠. 그러니까 평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오래오래 있어야죠…….”

    그녀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싱긋 웃으며 요제프 쪽으로 잔을 내밀었다.

    “우리 건배할까요, 신관님?”

    “건배요?”

    요제프가 장난스럽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제 신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면서 술을 권하십니까?”

    “앗, 맞다. 그렇네요.”

    에디스가 당황해하며 잔을 내리려는데, 요제프가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었다. 크리스털 잔이 맞부딪치며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신 이렇게 함께하겠습니다. 에디스 양의 바람.”

    단숨에 물잔을 비우는 요제프의 모습을 본 에디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샴페인 잔을 함께 비웠다.

    평화롭고, 따뜻하고, 정겨운 시간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땅에서 삶을 버텨 온 남자가 일구어 낸 결실이 이처럼 온유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발텐 대공가의 결혼식을 축복하러 모인 이들은 모두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으로 이루어진 평화가 계속되기를 기원했다.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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