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09)화 (109/110)

에필로그. 공작저에서 연애가 금지된 이유 (4)

시녀장이 잠깐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눈총을 준 후 다시 설명했다.

“공작저 내에서 일하는 사용인들끼리는 교제할 수 없다는 말이야! 이의 있으면 지금 나와서 말하거라. 유모님께서 바로 사직 처리를 해 주실 터이니.”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시녀장은 그 반응이 무척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당을 나섰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뭐 이런 법이 다 있어?”

에밀리가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주위의 다른 사용인들도 웅성거리며 놀란 기색이었다. 이미 서로 교제하고 있다고 알려진 사용인들 몇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거나, 황급히 자리를 뜨는 이들도 있었다.

“폭정 시대에도 안 이랬겠다.”

“쉿! 들릴라.”

캐슬린은 기겁해서 친구를 말리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브래디가 경솔하게 행동한 건 맞지만, 그건 그 사람 하나의 문제이니 모든 사용인에게 뒤집어씌워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 브래디가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따지고 보면 제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솔직히 따지고 보면 나랑 브래디 씨는 교제하는 사이도 아니었잖아.’

주방에서 물에 넣어 둔 감자를 꺼내 숟가락으로 껍질을 벗기며 캐슬린은 생각했다. 손가락이 얼얼해질수록 결심은 굳어졌다.

캐슬린은 주방장이 어지럽혀 놓은 주방을 다 치우고, 드디어 일과를 끝마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주방을 나와 본관으로 향했다.

‘집사님께 재고를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려야겠어.’

어쩌면 이건 제 책임이었다. 캐슬린은 알스도프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사용인들을 총괄하는 집사인 만큼 그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캐슬린은 이튿날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를 찾으러 다녔다.

‘유모님께 들키기라도 하면 사달이 날 텐데.’

근무지 외의 다른 곳을 괜히 돌아다니다 들키면 큰일이었다. 신입도 아니고 이미 공작저에서 일한 지 4년이나 됐는데 길을 잃었다는 변명도 통할 리 없었다.

“으앗!”

마지막으로 정원을 둘러보고 주방으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돌렸던 캐슬린은, 정원 입구에서 시커먼 인영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그건 정원사 아저씨였다. 그는 사다리를 접어서 세워 놓은 채 우울하게 앉아 있었다.

캐슬린은 반색하며 그의 앞에 다가가 몸을 낮추고 앉았다.

“아저씨!”

“아, 켈리구나.”

“아저씨, 브래디 씨가 해고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괜찮으세요?”

“으응. 그렇다마다.”

“브래디 씨는 다치진 않으셨고요?”

“그래. 해고 수당까지 챙겨 주셨단다. 에휴, 내일부터 새로운 수목이 들어오면 그놈을 시켜서 정리하려고 했는데. 나 혼자라니 눈앞이 막막하구나.”

정원사 아저씨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가지치기용 가위를 정리했다.

“그 멍청한 놈, 마이어에서는 정신 차리고 사나 했더니 또 그런 짓을 할 줄이야.”

“또, 라고요?”

캐슬린은 그의 말 중에서 이상한 부분을 잡아내고 물었다. 정원사 아저씨의 반응도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놈, 마음에 드는 여자만 생기면 그렇게 앞뒤 안 보고 달려들어. 고향에서는 제 형한테 밀려서 무료해 그러나 싶어서 데리고 온 건데 공작저에서도 그럴 줄은. 이번에도 어떤 여자 눈에 들겠다고 그 난리를 친 모양이다. 분명 출입문 관련해서는 설명을 해 줬는데 그걸 또 모르는 척…… 아이고. 어쩌겠니, 내가 잘못 판단한걸.”

올 게 왔다는 태도로 푸념하듯 털어놓는 정원사 아저씨는 차라리 홀가분해 보일 정도였다. 캐슬린은 원래 정원사 아저씨가 브래디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을 줄 알고 위로라도 해 주려고 했는데, 뜻밖의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모르고 한 일인 줄 알았는데 저한테 잘 보이려고 일부러 그랬단 말인가?

캐슬린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자물쇠를 부순 건 순진한 사람이 의욕이 앞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규율까지 어겨 가면서 구애한 걸 알면 감동할 줄 알고 벌인 짓이었다.

“그런데 켈리, 뭐 볼일이라도 있니? 여긴 왜 왔어?”

“아. 아니에요, 산책 중이었어요.”

캐슬린은 얼버무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원사 아저씨는 다른 후계자를 찾아봐야겠다며 얼른 돌아가라고 이르곤 사라졌다. 아저씨는 다행히 따로 불이익을 받은 건 없어 보였다.

‘……집사님에게 브래디 씨 편을 드는 건 그만둬야겠어.’

사용인들 간의 교제를 금한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게 나을 듯했다.

다행히 정원을 나와 마구간 근처를 살피는데, 멀리서 알스도프가 보였다.

“집사님!”

캐슬린은 한달음에 그쪽으로 달려갔다. 알스도프가 그녀를 돌아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너는?”

“주방에서 일하는 켈리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어제 시녀장님으로부터 사용인 규율에 한 항목이 더 추가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알스도프는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캐슬린은 심호흡하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용인들 간의 이성적 교제가 긴장감을 누그러뜨려서 근무 중 실수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제를 전면 금지하는 것은 과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영구 금지보다는…… 일시적인 조치로 본보기를 보이시는 게 어떨까요?”

“흠.”

알스도프는 외알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싶더니 물었다.

“혹시 해고 처리된 견습 정원사와 교제하는 사이였니?”

“아, 아닙니다. 다만 그분이 한 일 때문에 다른 사용인들이 함께 피해를 보는 것이 불합리하다 생각돼서요.”

“불합리하다…….”

“집사님도 아시다시피 사용인들이 내부에서 짝을 찾아 결혼하게 되면 충성도도 더 높아지고 근속 기간도 늘어나는 편이지요. 이를 막는다면 집사님께서도 인력을 관리하실 때 좋은 방향은 아닐 것 같아, 재고해 주십사 찾아왔습니다.”

보통 귀족가라면 사용인들끼리의 교제, 특히 결혼을 권장하는 편이었다. 윈스턴 영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시녀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가문의 은밀한 사정까지 다 알고 있는 측근이 외부 사람과 결혼하여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정보를 흘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말이다.

변경백 가문인 윈스턴 가도 그러한데 마이어의 중심, 황실과 연결된 최고위 귀족인 발텐 공작가는 오죽할까.

백작 영애였던 캐슬린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이유라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알스도프는 뜻밖의 답을 내어놓았다.

“네 말도 틀리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구나.”

“네?”

“교제 금지 규율은 각하의 뜻이란다.”

“그, 그럼…….”

“바뀔 일이 없을 거란 뜻이지.”

맥이 탁 풀렸다.

아무리 집사님이 사용인들의 말을 잘 들어 주는 너그러운 관리자라 해도 주인인 발텐 공작의 뜻을 번복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캐슬린은 풀이 죽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렴.”

알스도프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각하께서 충동적으로 내린 명이니, 바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란다. 언젠가 안주인이 들어오시면 번복할 수도 있는 일이지.”

“정말 그럴까요?”

“그렇단다. 그러니 네가 결혼하지 못할 일은 없을 거야.”

제 결혼 따윈 아무래도 좋았지만, 에밀리의 결혼은 확실히 문제가 되는 일이었으니 캐슬린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작 부인께서는 생각이 다르실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사용인들의 교제 금지 규율이 그대로 시행되는 걸 보면 유모님도 공작님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럼 결국엔 유모님의 뜻을 꺾을 만한 사람, 공작 부인이 들어와야 이 일이 해결되겠지.

‘그게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에밀리가 매일 밤마다 짝사랑하는 기사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서러움을 토로하다 잠들지도 모른다.

캐슬린은 그나마 이 희망적인 소식을 에밀리에게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사님.”

“그럼 돌아가 보렴. 아, 혹시 넌 지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

뜻밖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캐슬린은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요. 없습니다.”

“다행이구나.”

“네?”

“그만 가 보거라. 늦었구나.”

“예…….”

캐슬린은 갑자기 집사가 왜 제게 그런 것을 묻는지 의아했지만, 군말 없이 돌아섰다.

한편 알스도프는 차분하게 인사하고 돌아가는 주방 하녀의 뒷모습을 보며 턱수염을 매만졌다.

사용인들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주인이 갑작스레 그런 명을 내린 건, 저 아이와 연관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방이라…….”

주방 하녀는 그의 주인과 전혀 접점이 없는 곳에서 근무하는 사용인이었다. 발텐 공작은 미식과는 거리가 멀었고, 독이 든 음식만 아니면 배를 채우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상관없어했으니.

‘그런데 갑자기 왜 저 아이가 눈에 띄셨을까.’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방금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흔한 이름이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케이티? 케이시?

‘나이가 드니 건망증이 심해졌군.’

추측이 맞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알게 되겠지 싶었다. 알스도프는 서둘러 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로 시행하기로 한 규율에 대해 보고를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집무실 앞에 이르러 가볍게 문을 두들겼다.

“각하. 알스도프입니다.”

“들어와.”

안쪽으로 들어가니,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정신없이 깃펜을 휘갈기고 있는 주인이 보였다. 알스도프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헛기침을 했다.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각하.”

“뭐지?”

“어제 말씀하신 규율에 관해서입니다.”

그제야 발텐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냉철한 금안이 더 자세한 내용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때 알스도프의 머릿속에 불현듯 4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 저 아이는 어디서 왔지?

갓 공작저의 하녀가 되었던 아이에게 잠깐의 관심을 두었던 발텐 공작이.

알스도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어쩌면 이건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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