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07)화 (107/110)
  • 에필로그. 공작저에서 연애가 금지된 이유 (2)

    그는 호기롭게 소프너 베이커리로 그녀를 데려갔다. 이미 입구에서부터 주문한 빵을 찾아가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브래디는 그들 사이에서 기어코 메뉴판 하나를 얻어 와 내밀었다.

    “무슨 케이크를 좋아하시죠?”

    “음, 저는 치즈케이크요.”

    고민 끝에 캐슬린은 적당해 보이는 것 하나를 골랐다. 에밀리의 급료가 뻔히 얼마인지 아는데 최고급 과일을 얹은 생크림 케이크나, 비싼 초콜릿을 아낌없이 넣어 만든 케이크를 고를 순 없었다.

    “그럼 저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예약하고 오겠습니다.”

    브래디가 싱글벙글 웃으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 캐슬린은 그의 미소에 당황해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친절한 분이네.’

    정원사 아저씨와는 딴판이었다. 공작저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에밀리와 친한 사이도 아닐 텐데 이런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다니.

    ‘혹시 에밀리를 좋아하는 걸까?’

    일리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정원사 아저씨의 조카라지만 일과 중에 이리 짬을 내서 생판 남을 도와줄 리가 없지 않은가.

    수더분해 보이는 모습이 에밀리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캐슬린은 에밀리만 좋다면 둘을 응원해 줘야겠다고 다짐하며 길가에 오가는 사람을 구경했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어…….”

    숨이 정지하는 것만 같았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종종거리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 이는, 부친인 윈스턴 백작을 보좌하는 부관 중 한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그가 저를 보고 있지도 않은데 발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른 눈에 띄지 않게 숨어야 하는데 몸이 덜덜 떨렸다. 부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순간이었다.

    “켈리 양!”

    그때 브래디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동시에 빵을 사가는 사람들이 그녀의 등 뒤를 지나갔다. 덕분에 부관의 시선이 향하기 전에 캐슬린은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예약 다 했어요. 케이크는 내일 아침에 찾으러 오면 된다고 하네요.”

    “아…… 네…… 고마워요.”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창백한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고마워요, 브래디 씨.”

    캐슬린은 심호흡하며 안심하려 애썼다. 사람들 사이로 살펴보니 이미 부관은 사라진 후였다.

    ‘못 본 것 같아.’

    다시 공작저로 돌아가야만 했다. 캐슬린은 브래디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얼른 돌아가야겠어요.”

    “간만의 외출인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시려고요?”

    “주방장님이 로즈메리를 사 왔는지 찾으실 거예요.”

    브래디는 아쉬운 표정이었으나 캐슬린의 말대로 공작저로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바구니는 끝끝내 자신이 들겠다고 우겨댔다.

    “생일에 맞춰 만든 케이크는 아니지만, 좋아하시면 좋겠네요.”

    “네, 감사해요.”

    “그런데 원래 치즈를 좋아하시나요? 사실 저도 좋아하거든요. 치즈를 녹여 빵을 찍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죠.”

    “네, 그렇죠…….”

    사실 브래디가 뭐라 하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캐슬린은 최선을 다해 대꾸해 주면서 생각했다.

    ‘들어서기만 하면 끝이야. 공작저는 안전하니까…….’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공작저의 커다란 문이 보였다.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막 그 앞에 다가서던 찰나였다.

    철문이 열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에 황금색 눈을 가진, 이 저택의 주인이자 그녀의 고용주.

    발텐 공작이었다.

    차가운 금안이 문고리를 잡으려 치켜든 캐슬린의 손을 훑어보았다.

    캐슬린은 황급히 뒤로 한 발짝을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브래디 역시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각하, 후문에 기사단을 대기시켜 두었다고 합니다.”

    집사 알스도프가 문에서 뒤따라 나오며 보고하다가, 캐슬린과 브래디를 보고 멈칫했다.

    “이들은 뭐지?”

    조금의 온기도 담기지 않은 음성이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캐슬린의 모아 잡은 두 손이 달달 떨렸다. 근무 시간에 외출하는 것은 상사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이번 외출 또한 주방장의 심부름 때문이기는 했으나, 다른 사용인과 함께 다녀와도 좋다는 허락은 받지 않았으니 덜컥 겁이 났다. 게다가 그 사실을 고용주에게 직접 들키게 되었으니 더더욱.

    “주방 하녀와 견습 정원사입니다.”

    알스도프가 눈치채고 간략히 설명했다.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발텐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집사가 얼른 손짓했다. 들어가 보라는 뜻이었다.

    “가요.”

    브래디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캐슬린은 그대로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발텐 공작에게 인사하고 종종걸음쳤다.

    철문 너머로 들어선 이후에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저와는 달리 하늘처럼 높은 신분이어서 그런가, 발텐 공작 앞에만 서면 어쩐지 심장이 졸아붙는 느낌이었다.

    “공작님이시라니. 깜짝 놀랐네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는 브래디의 얼굴은 전혀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공작저의 규율을 잘 모르는 듯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전장의 사신이라는 이야기가 도는 발텐 공작이라면 유모인 듀록 남작 부인보다 훨씬 엄격한 성격일 게 분명한데 저렇게 태평한 소리라니.

    “네. 큰일 날 뻔했어요.”

    캐슬린은 얼른 브래디의 손에서 바구니를 건네받으며 애써 감사 인사를 했다.

    “이만 가 볼게요. 오늘 함께 가 주신 것 정말 감사했어요.”

    “켈리 양, 저기…….”

    “케이크는 제가 내일 찾으러 가 보겠습니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붙잡으려 했지만, 캐슬린은 얼른 돌아섰다. 윈스턴 백작의 부관을 본 후 놀란 데다 발텐 공작과 마주쳐서인지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팬을 더 닦아야겠어.’

    기름 냄새에 머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평정을 찾는 데 단순 노동보다 좋은 건 없었다. 캐슬린은 주방을 향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 * *

    “뭐어? 그냥 그대로 와 버렸단 말이야?”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온 에밀리가 입을 딱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야? 브래디 씨가 무슨 말을 더 하진 않았어? 언제 다시 만나자거나.”

    “응. 하지만 걱정하지 마, 에밀리.”

    “걱정? 무슨 걱정?”

    “네 부탁이라면서 날 아주 열심히 도와주던데? 그런 걸 보면 너에 대한 마음이 아주 큰 것 같았어.”

    “이 바보!”

    에밀리가 한탄하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아니라 너야. 브래디 씨는 너를 좋아한다고.”

    “……뭐?”

    “그래서 내가 일부러 너를 도와 달라고 부탁한 거란 말이야!”

    뜻밖의 말에 캐슬린은 연푸른색 눈을 크게 뜨고 깜박였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너 그럼, 일부러 브래디 씨를 나와 함께 외출하게 한 거야?”

    “그렇다니까. 케이크는 꼭 소프너 베이커리가 아니어도 살 수 있는데 굳이 내가 왜 거길 고집했겠어? 브래디 씨가 날 찾아왔었어. 널 보고 첫눈에 반했대.”

    “…….”

    “어땠어? 응? 내가 보기엔 브래디 씨만큼 착한 사람이 없더라. 키도 크고 기술도 있으니까 꽤 괜찮아.”

    에밀리가 팔을 끌어 제 옆에 앉히면서 답을 채근했다.

    “열아홉 살이 되면 결혼할 수 있잖아. 지금부터 빨리빨리 공작저에서 함께할 사람을 찾아 놓으면 좋지.”

    “결혼이라니. 난 아직 그럴 생각이 없어, 에밀리.”

    “미래를 어떻게 장담하니?”

    넉 달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에밀리는 꽤 자주 어른처럼 굴려고 하곤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공작저의 하녀 자리가 꽤 수입 좋은 직장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기댈 곳 하나 만들어 놓으면 좋지.”

    캐슬린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기댈 곳이라.

    윈스턴 백작 쪽에서 저를 찾아내면 발텐 공작은 저를 기꺼이 내어 주고도 남을 것이다. 하녀란 그렇게 가치 없는 존재니까.

    에밀리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귀족가의 정원사는 실력과 체력은 물론이고 인맥까지 갖춘 사람만 될 수 있으니, 발텐 공작저의 차기 정원사로 낙점된 브래디면 경제적으로는 꽤 안정적으로 기댈 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캐슬린은 그 누군가도 저를 위해 윈스턴 백작과 맞서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작지만 소중한 월급을 모아 홀로 반듯하게 서고 싶었다.

    “그러면 네가 한번 만나 보는 건 어때, 에밀리?”

    “에이. 너 좋다고 찾아온 사람을 내가 어떻게 뺏니?”

    “그 사람은 아무리 봐도 내 취향이 아니야.”

    “또 그 소리. 사실 넌 누굴 데려다 놔도 싫다고 할 거잖아.”

    에밀리가 푹푹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관두자, 관둬. 친구한테 애인 만들어 주려고 기껏 머리 썼는데 헛수고만 했네.”

    “그래도 너밖에 없어, 에밀리. 케이크도 사 주고.”

    “됐어.”

    “예약한 케이크는 아침에 내가 찾아올 테니까, 우리끼리 점심으로 몰래 먹자. 알았지?”

    생일 선물까지 내어놓으며 달래려는 모습에 에밀리는 어쩔 수 없이 캐슬린에게 지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캐슬린은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내일쯤이면 윈스턴 영지로 돌아갔겠지?’

    케이크를 찾으러 갔다가 또 마주치면 낭패인데, 이미 값을 치렀으니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걱정에 선잠을 이룬 캐슬린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소프너 베이커리는 일찍 문을 여니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다녀올 생각이었다. 캐슬린은 얼마 후면 통금이 풀릴 시간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아침도 먹지 않고 서둘러 동쪽 샛길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야심 찬 계획은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무참히 깨어져 버렸다.

    “켈리 양!”

    브래디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쪽 손을 크게 흔들었다. 나머지 한쪽 손에는 분홍색 끈으로 묶은 흰 종이 상자가 들려 있었다.

    “브래디 씨?”

    혹시 저 손에 들린 게 케이크는 아니겠지.

    캐슬린은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순박한 미소를 지은 청년은 신이 나서 외쳤다.

    “제가 케이크를 찾아왔습니다. 아직 아침 이슬이 찬데, 그런 곳에 숙녀분을 보낼 순 없죠.”

    “설마…… 브래디 씨, 벌써 소프너 베이커리에 다녀오신 건 아니죠?”

    “맞습니다.”

    캐슬린은 브래디가 뿌듯한 얼굴로 내민 상자를 받아 들었다. 눈앞이 핑핑 도는 듯했다. 다행히 아직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누구 찾아요, 켈리 양?”

    “이를 어째…… 브래디 씨, 지금 아주 큰 실수를 하셨어요. 경비병들이 알면 큰일 날 거라구요.”

    “예?”

    “아직 공작저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 시각인데, 어떻게 밖에 나가셨어요?”

    “문이 잠겨 있는 것 같아 그냥 세게 밀어봤습니다. 그러니까 자물쇠가 쉽게 떨어지던데요?”

    한숨이 나왔다. 캐슬린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건 새벽에 경비병들이 설치해 두었다가 아침에 풀어 주는 거예요. 교대하느라 자리를 비웠을 때 사용인들이 오가지 못하도록요. 맘대로 열고 나가도 되는 게 아니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