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06)화 (106/110)

에필로그. 공작저에서 연애가 금지된 이유 (1)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께선 방금 본관 침실로 올라가셨습니다.”

에밀리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했다. 페터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3층에는 하루 동안 누구도 가까이 오지 말라는 명이 있었어요. 공자님을 어떻게 말리죠, 폐하?”

과자를 먹다 꽃을 가지고 노는 데 정신이 팔린 루치는 방금까지만 해도 엄마를 찾았다. 겨우 과자로 시선을 돌려놨는데, 3층으로 뛰어가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일단 저대로 두었다가 떼를 쓰면 내가 맡아 보마. 정 안 되면 요제프를 다시 불러오지.”

“감사합니다, 폐하.”

에밀리는 한숨을 돌리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최근 발텐 공자는 유독 고집이 세져서 유모와 합세해도 뜯어말리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너도 종일 뛰어다녔을 텐데, 앉아서 쉬어라.”

페터가 근처의 빈 의자를 턱짓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캐슬린과 오래전부터 친구였다지. 그러니 너도 이 결혼식을 즐길 권리가 있지 않겠니.”

싱긋 웃는 젊은 황제의 모습에 시녀에 대한 거리낌 따윈 없었다. 에밀리는 하는 수 없이 조심스레 페터의 곁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구나. 넌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

아무리 빨래방 하녀 출신의 시녀라고 해도 대공비의 측근인 만큼 괜찮은 혼사 자리가 들어올 법했다. 그런데 아직 혼자인 것이 의아했다.

“없는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대공저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느냐? 보통은 근처에서 인연을 찾기 마련인데. 아, 눈에 차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소개해 줄 수도 있고.”

“아아, 대공저에서요.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에밀리가 난처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 듯해서 페터는 흥미로워졌다.

“왜? 대공저의 사람을 만나지 못한 이유라도 있느냐?”

“사실은 그게 말이지요, 폐하.”

“괜찮으니 말해 보아라. 궁금하구나.”

이걸 말해도 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잠깐 고민하던 에밀리가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 * *

“며칠 뒤면 네 생일인데 받고 싶은 선물 있어, 켈리?”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각자의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룸메이트인 에밀리가 물었다.

캐슬린은 주방장이 새로 구입한 무쇠 주물 팬을 닦느라 온종일을 보냈던 터라,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며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글쎄. 딱히 없는데.”

“에이. 그러지 말고, 하나라도 있을 거 아니야.”

“정말 없어. 그냥 오늘처럼 별일 없이 평온하게 지나가면 좋겠다. 저녁에 맛있는 거나 만들어 먹고.”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에밀리가 벌떡 몸을 일으켜 앉더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열아홉 살이면 성인이 되는 거라고! 내가 그땐 얼마나 가슴이 설��는데? 요즘 애들은 다 너 같은 거야?”

“에밀리. 너랑 나, 생일 넉 달밖에 차이 안 나는 거 알지?”

“그래도 말도 안 돼.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야. 난 절대 네 생일을 평범하게 지나가게 둘 수 없어.”

그녀는 불끈 주먹을 쥐며 몇 번이나 의지를 다지더니 스르르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빨래방은 주방보다 더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는 곳이었기에, 에밀리는 종종 저렇게 말을 하다가도 깜빡 잠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너도 참.”

캐슬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에밀리의 목 아래까지 끌어다 덮어 주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태어나서 한 번도 생일을 즐겁거나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한 적은 없었다. 특히나 성인이 되는 열아홉 살 생일이라면 더더욱 제겐 행복한 순간이 될 수 없었다.

저를 정략혼의 제물로 팔아넘기려 했던 친부, 윈스턴 백작이 그리도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으니까.

캐슬린은 딱딱한 시트 위에서 자세를 고쳐 누우며 옛날의 기억을 지우려 애썼다.

‘난 안전해.’

제아무리 변경백이라 해도 마이어의 발텐 공작저까지 뒤져 볼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캐슬린은 에밀리의 잠꼬대를 들으며 미소 짓다가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

다음 날 깨어났을 때, 룸메이트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바쁜가?’

에밀리는 아침잠이 많아 제가 깨우기 전에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편이었다. 한데 오늘은 신기하게도 먼저 씻고 일어나 나간 모양이었다.

이따가 점심시간에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캐슬린은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방장님.”

“어, 그래, 켈리. 팬은 다 닦았니?”

“거의 끝났어요.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다 하고 나면 향신료 상점에 가서 로즈메리를 사 와라. 갑자기 오늘 아침에 손이 미끄러져서 남은 걸 다 쏟아 버렸지 뭐냐.”

“네.”

캐슬린은 재빨리 헝겊과 기름을 찾아 들고 산더미처럼 쌓인 주물 팬 사이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이윽고 다른 주방 하녀들도 하나둘씩 들어와 각자의 일을 시작했다. 캐슬린은 얼굴과 치맛자락에 기름 얼룩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팬을 닦았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놀리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켈리, 켈리!”

사용인 전용 식당에 들어섰을 무렵 에밀리가 상기된 얼굴로 뛰어왔다.

“에밀리, 오늘도 일이 많아?”

캐슬린은 앞치마 끈도 대충 묶은 데다가 머리가 온통 헝클어진 에밀리를 보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

“아니, 아니, 됐어.”

에밀리는 머리를 정돈해 주는 캐슬린의 손을 대수롭지 않게 걷어 내더니 말했다.

“잠깐 이리 와 봐. 물어볼 게 있어.”

“뭔데 그래?”

에밀리는 재빨리 캐슬린의 팔을 잡아끌고는 구석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주위를 살피더니 속삭였다.

“너, 이따가 오후에 시간 돼?”

“오후? 응. 주방장님이 마침 심부름을 시키셨거든. 잠깐이라면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왜?”

“후후. 잘됐다. 내가 마침 널 위해 준비한 게 있거든.”

“준비한 거라니? 에밀리, 선물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됐어! 내가 네 잔소리에 질 거라면 애초에 이런 걸 준비하지도 않았을 거야.”

에밀리가 딱 잘라 거절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소프너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를 예약할 거야. 너도 알지? 새로 생긴 곳이잖아. 케이크가 엄청 맛있대.”

“물론 알지만…….”

주방장이 극찬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제국의 유일한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용인이 만족스러워할 정도라면, 맛은 충분히 믿을 만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평민을 주 고객층으로 둔 베이커리인데도 불구하고 가격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다.

“에밀리, 정말 난 괜찮아. 그런 값비싼 케이크가 없어도 네가 나랑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나도 똑같이 말했지만, 너도 내 생일에 옷을 사 줬잖아.”

에밀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잔말 말고 이따가 시장에 갈 때 소프너 베이커리로 가. 원래 갑작스러운 예약은 안 받는데, 오늘은 특별히 몇 자리가 남았다나 봐.”

“에밀리…….”

“나도 가야 하는데, 오늘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그러진 못해. 대신 같이 가 줄 사람을 구했어. 그 사람이랑 같이 가.”

“같이 갈 사람이라니?”

“케이크값이 얼만지 알면 넌 그걸 갚으려고 할 거잖아? 그 사람한테 미리 돈을 주고 대신 계산을 부탁했어.”

캐슬린의 성향을 죄다 꿰고 있는 룸메이트다웠다. 에밀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한 시간쯤 뒤에 동쪽 샛길에 나가면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앞치마는 벗고 예쁜 옷 입고 가! 알았지?”

그러더니 에밀리는 남은 빵을 집어 들고는 부리나케 식당을 빠져나갔다.

“케이크 예약하러 가는 데 웬 예쁜 옷?”

황당했지만,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면 주문자의 외양을 따지는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슬린은 얼른 점심을 마저 먹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다 닦은 주물 팬을 정리하고, 주방장에게 돈을 받은 후에 방으로 돌아갔다. 에밀리의 말대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상점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가 날 기다린다는 거지?’

에밀리와 그녀가 함께 친한 사람은 없었다. 근무하는 곳이 다르다 보니 마주치는 경우가 적기도 했고, 대화를 자주 나눌 기회도 없었다.

‘일단 안면이 있는 사람이긴 할 테니까, 가 보면 알겠지.’

캐슬린은 갈색 바구니를 들고 서둘러 동쪽 샛길로 향했다. 담쟁이덩굴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켈리 양?”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돌아보니 갈색 고수머리에 순한 인상의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정원사 아저씨의 조카로, 얼마 전부터 공작저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브래디라고 합니다. 에밀리의 부탁을 받고 나왔어요. 함께 베이커리에 가 달라고 하더군요.”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제 소개를 했다. 캐슬린도 황급히 인사했다.

“아아, 브래디 씨.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하, 저는 처음이 아닌걸요.”

“네?”

“삼촌한테 켈리 양 이야기를 종종 들었답니다.”

정원사 아저씨가 그렇게 저를 잘 아는 사람이었던가?

아무리 떠올려 봐도 주방장님의 부탁으로 파이를 몇 번 가져다주며 잡담을 나누느라 낯을 익혔을 뿐, 딱히 개인적인 친분이 있진 않았다.

“상점에서 볼일도 보셔야 한다면서요? 얼른 나가시죠.”

“아, 네. 가요.”

어쨌든 에밀리가 특별히 부탁까지 해서 시간을 내주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캐슬린은 그와 함께 시장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캐슬린은 공작저에 정기적으로 향신료를 납품하는 가게에 찾아가 로즈메리 한 병을 샀다.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에이. 연약한 분께 이런 무거운 걸 들게 해서야 신사라고 할 수 없죠.”

브래디는 기어코 유리병이 든 바구니를 대신 들겠다며 빼앗아 갔다. 갑작스러운 호의에 캐슬린은 부담을 느끼면서 장갑 낀 손을 꼼지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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