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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05)화 (105/110)
  • 105화

    결혼식 날 아침이 밝았다.

    누가 깨우러 오기도 전이었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캐슬린은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푸른 하늘은 오늘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평화로웠다.

    “캐슬린, 벌써 일어났어요?”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그녀가 먼저 일어나 있는 것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

    “제대로 못 잔 건 아니죠?”

    “응. 괜찮아. 푹 잘 잤어.”

    어제 마이어에 도착했을 때는 괜히 긴장되는 마음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신기하게도 맑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다행이네요. 우스문트 백작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거든요.”

    “외숙부님께 잘 말해 줘. 난 괜찮다고.”

    “네에. 먼저 캐슬린이 아름다운 신부로 변신하도록 도와드린 후에 백작님을 안심시켜 드리러 갈게요. 그럼 얼른 준비하러 갈까요?”

    에밀리는 들뜬 기색으로 캐슬린을 욕실로 이끌었다. 안쪽에서는 다른 시녀들이 갖가지 세정제와 향유, 향수를 준비해 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단장이 끝나면 백작님도 더 걱정하지 않으실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부가 되실 테니까.”

    에밀리가 캐슬린을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는 욕조에 들어가도록 도와주며 말했다.

    그녀는 첫 번째 결혼식과 달리 아침부터 캐슬린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것을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네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에밀리.”

    “전 캐슬린의 친구잖아요.”

    저번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늘 함께였던 친구가 다정하게 손을 잡아 왔다. 캐슬린은 목이 메어 겨우 대답했다.

    “……응.”

    “어어, 울지 마세요. 벌써 눈물을 보이셨다간 얼굴이 붓는다고요.”

    에밀리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목욕을 돕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몸을 맡긴 캐슬린의 눈물이 쏙 들어갈 만큼 재빠른 단장이 시작되었다.

    에밀리와 여러 시녀가 합심하여 캐슬린의 반짝이는 은발을 부드럽게 정리한 후 틀어 올렸다. 창백할 정도로 하�R던 피부에는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배고 자연스러운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피부 정돈이 다 끝나고 에밀리가 별관 드레스룸에 숨겨져 있던 예복을 가지고 왔다.

    “주인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웨딩드레스예요.”

    지금까지 선물받았던 드레스도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눈앞의 순백색 드레스에 비하면 보잘것없을 정도라 할 법했다. 이전의 결혼식 때 입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이 세상의 직물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부드러운 실크에 얼음 결정처럼 섬세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가 여기저기서 반짝거렸다.

    “아마 역대 황후 폐하들도 이런 드레스는 입지 못하셨을 거예요.”

    에밀리가 뿌듯해하며 캐슬린이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흰색 공단 구두까지 신은 캐슬린은 한 떨기 백합처럼 아름다웠다.

    “잘 어울리실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주인님께서 제국 전역의 디자이너를 불러들이신 보람이 있네요.”

    다른 시녀들도 감탄하며 입 다물 줄을 몰랐다.

    “그리고 이건 어젯밤에 우스문트 백작님이 제게 부탁하신 거예요.”

    그녀가 내민 벨벳 상자에는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커다란 사파이어를 중심으로 백금 장식과 자잘한 다이아몬드가 둘러싸고 있는 디자인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사파이어의 색이 어머니의 눈 색깔과 같았으니까 말이다.

    “걸어 줄래?”

    “네. 드레스와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묵직한 사파이어가 가슴께에 드리워졌다. 거울에 비친 목걸이는 드레스의 다이아몬드와 짝을 맞춘 것처럼 반짝였다.

    단장을 마치자 비로소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캐슬린이 드레스룸을 나와 침실로 돌아오자, 에밀리가 준비한 핑거푸드를 내밀며 말했다.

    “잠깐 드시고 계세요. 부케를 가져올게요.”

    그러나 결혼식이 얼마 안 있어 시작된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긴장이 돼서인지 물 외에는 아무것도 넘길 수가 없었다. 차가워지는 손을 주무르며 기다리는데, 에밀리가 부케를 가지고 돌아왔다.

    “……아.”

    캐슬린은 부케를 장식한 꽃을 보자마자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얀색과 연노란색 카라 꽃, 들꽃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연푸른색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루치가 그렸던 그림이 부케였구나.’

    코끝이 찡해졌다. 부케를 받아 들고 살펴보는데, 침실 문이 열렸다.

    “엄마!”

    루치가 뛰어들어 왔다. 흰 예복을 차려입은 꼬마 공자님은 작은 하늘색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아이는 앞에 멈춰 서더니 감탄을 내뱉었다.

    “엄마, 너무 예뻐요. 공주님 같아.”

    “우리 루치도 왕자님 같아.”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바람에 에밀리가 기겁하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꼭 눌러 주었다.

    “캐슬린, 준비는 다 됐니?”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카시엘이 들어왔다.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아빠가, 할아버지랑 나한테 엄마 부탁한다고 했어요!”

    루치가 싱글벙글 웃으며 뿌듯한 얼굴로 외쳤다.

    “고마워, 루치.”

    캐슬린은 아들을 향해 다정하게 말한 후 심호흡하며 부케를 꼭 쥐었다.

    “네, 외숙부님. 준비 다 됐어요.”

    카시엘이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조심스레 잡고 이끌었다.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일어나 계단을 걷는데, 꽃바구니를 든 루치가 그녀의 곁을 따르며 다부지게 말했다.

    “엄마 앞에 뿌려 줄 거예요.”

    카시엘도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도닥였다.

    “너무 긴장하지 말렴.”

    루치가 넘어지진 않는지 살펴 주던 에밀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함께한다는 것이 이토록 의지가 된다는 사실을, 캐슬린은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는 이제 더는 외롭지 않았다.

    별관 입구에서부터 식장인 정원까지는 발텐 가의 문양이 금색 실로 수놓인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신이 난 루치가 앞장서 걸으며 바구니의 꽃잎을 뿌리자, 카펫의 군데군데 흩뿌려진 우윳빛 진주 가루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캐슬린은 착석해 있던 하객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그런데 마이어의 귀족들을 지나치자 점점 눈에 들어오는 하객들의 얼굴이 낯익었다.

    앤더슨 아주머니, 브라우닝 씨, 엠마 아주머니.

    그리고 오솔레에서 함께했던 이웃사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웃음을 담고 저를 바라보며 축복해 주고 있었다. 놀란 마음도 잠시, 이들을 초대한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은 캐슬린은 겨우 멈춰 놓은 눈물이 다시금 흐를 것 같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캐슬린.”

    하객석의 맨 상석에 앉아 있던 페터가 일어났다. 그의 뒤에선 요제프와 에디스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본 캐슬린의 가슴이 더 벅차올랐다.

    “다시 저의 형수님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페터가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더니 떨어졌다. 카시엘은 계속해서 캐슬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리고 카펫의 끝에는 그가 서 있었다.

    알렉시스 발텐. 그녀가 선택한 남자이자 이 나라의 대공, 루치의 아버지.

    이전과 달리 그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알렉시스는 먼저 도착한 루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다음, 허리를 굽혀 무언가 속삭였다. 그러자 루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구니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주었다.

    알렉시스는 상자 안에서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카시엘이 넘겨준 캐슬린의 손에서 레이스 장갑을 벗겨 냈다.

    뜨거운 입술이 손등에 와 닿더니,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졌다. 발텐 가의 문양이 새겨진 두 번째 결혼반지였다.

    “다시 내게 와 줘서 고마워, 캐슬린.”

    알렉시스가 속삭였다. 햇살 아래 비친 그의 황금빛 눈은 더는 무감하지 않았다.

    “사랑해.”

    “저도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가 젖혀지고, 입술이 맞닿았다. 익숙한 듯 허리를 감아 오는 팔에서 열기가 느껴졌고, 틈을 파고든 숨결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집요했다. 캐슬린은 기꺼이 그에 화답했다.

    이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새로운 시작이었다.

    * * *

    점심께부터 시작되었던 결혼식은 본격적인 식이 끝나고 피로연으로 이어졌다. 발텐 대공저는 처음으로 많은 손님을 맞아 북적거렸으며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결혼 서약도 전에 키스부터 나눈 부부는 피로연이 한참 무르익을 무렵, 본관의 새로 차려진 침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흐읏…….”

    알렉시스는 거칠게 문을 닫아건 후 캐슬린의 입술을 덮쳤다. 오랫동안 억눌렀던 욕망이 합법적인 기회를 얻자 불타오른 것이다.

    “하아, 알렉…… 우리,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서…….”

    뜨거운 숨결이 입술을 거쳐 희게 빛나는 목을 간질였다. 캐슬린은 문을 등지고 그에게 안긴 상태였다.

    점점 아래로 향하는 입술이 부푼 가슴에 닿았다. 그를 기억하는 몸이 기대로 달아올랐다.

    “하루 동안 아무도 본관 3층에는 얼씬거리지 않도록 해 뒀어.”

    알렉시스가 조급하게 속삭였다. 그의 손길이 드레스 안쪽으로 향했다. 캐슬린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아……!”

    “다시 널 안을 날이 오기를 얼마나 인내해 왔는지 넌 모를 거야.”

    나비 날개처럼 섬세한 실크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캐슬린의 양쪽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알렉시스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받쳐 안은 후, 뒤돌아 침대로 향했다.

    캐슬린은 어느덧 가슴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한 드레스를 겨우 붙잡았다. 그렇게 막 드레스가 벗겨지기 전 푹신한 시트에 등이 닿았다.

    잠시 멈추었던 입맞춤이 온몸에 쏟아지자 캐슬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을 타고 오른 알렉시스는 열기 오른 손길로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쓸면서, 다른 한쪽 손으로 상의를 벗어 던졌다.

    “……처음에도 널 이렇게 만났으면 어땠을까.”

    낮아진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때의 널 다시 만난다면, 다신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텐데.”

    “이젠 괜찮아요, 알렉.”

    진심이었다. 그녀는 이미 과거의 발텐 공작도, 지금의 알렉시스도 모두 제가 사랑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니까.

    “이젠 과거의 당신이 왜 그랬었는지 아니까. 결국은 그런 당신마저도 사랑했으니, 괜찮아요.”

    첫 번째 결혼 생활은 대부분 오해와 눈물로 얼룩진 기억이었지만, 캐슬린은 그것이 앞으로의 시간을 단단하게 다져 나갈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었다.

    알렉시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서렸다. 캐슬린도 그를 올려다보며 마주 웃었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걸림돌도, 방해물도 없었다.

    열린 커튼 사이로 비쳐 보이는 하늘은 아름다운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그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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