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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04)화 (104/110)
  • 104화

    “엄마, 뭐가 더 예뻐요?”

    아침이 되자마자 달려온 루치는 깜찍한 미소를 지으며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언제 이렇게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지?’

    밤새 악몽을 꾸고 잠을 설치느라 피곤했지만, 아이의 모습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우리 루치가 뭘 그렸을까?”

    캐슬린은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가 멈칫했다.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정성껏 뭔가를 그린 것 같기는 한데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응? 뭐가 더 예뻐요?”

    루치가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졸라 댔다. 캐슬린은 아이를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갈등 끝에 하나를 골랐다.

    “엄마는 이거.”

    “왜요?”

    “응?”

    “왜 이게 더 예뻐?”

    루치는 요즘 들어 ‘왜’에 꽂혀 있었다. 역시 이번도 지나치지 않고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아들의 모습에 식은땀이 흘렀다. 적당히 선택의 근거를 대 줘야 하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으니, 결국 캐슬린은 절충안을 내놓았다.

    “으응, 사실 두 개 다 예뻐.”

    “아까는 이게 더 예쁘다고 했잖아요. 하나만 골라야 돼요.”

    “엄마는 루치가 그린 거면 다 좋은데?”

    “아이참.”

    평소답지 않게 루치가 짜증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캐슬린은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치는 진지한 얼굴로 종이를 펼쳐 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거는 분홍색이랑 빨간색 꽃이에요. 그리고 이거는 하얀색이랑 노란색 꽃.”

    “아아, 꽃이었구나.”

    “뭐가 더 예뻐요? 딱 하나만.”

    “그럼 엄마는 하얀색이랑 노란색. 깔끔하고 수수해 보여서 좋아.”

    루치는 수수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 듯했지만, 그래도 캐슬린이 하나를 골라 줬다는 데 만족하는 것 같았다.

    “알았어요!”

    “어디 가? 아침은?”

    루치는 엄마의 말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뛰어갔다. 뒷모습에 대고 불러 봤지만 이미 아이는 사라진 후였다.

    “뭐가 또 저렇게 바쁜 거지?”

    마이어와는 다른 카르미네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 루치는 성안보다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처음에는 캐슬린도 아이와 함께 놀러 다녔지만, 네 살짜리 아들은 외숙부님과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요즘은 그들이 함께하도록 빠져 주었지만, 대부분 아침 식사까지는 함께하곤 했는데 오늘은 그것도 아니라니.

    어쩐지 쓸쓸해진 기분으로 캐슬린은 홀로 아침 식사를 했다.

    “마님, 여기 주인님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일주일 전 카르미네로 도착했던 루치의 유모가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오늘 아침에 마이어에서 사람이 오면서 전해 주었다고 하네요.”

    “그래?”

    어차피 결혼식이 사흘 뒤니까 내일 아침에 출발할 텐데 굳이 편지를 또 보내다니.

    의아했지만 일단 봉투를 뜯어 내용을 읽어 보았다. 안부 인사를 한 줄 쓴 다음, 알렉시스는 매우 불만스러운 어조로 본론을 써 놓았다.

    [마이어에 도착하면 별관에 따로 머무르게 될 거야. 얼마 전 작위 수여식에 참석하러 마이어에 오셨을 때, 외숙부님께서 관습은 관습이니 결혼식이 끝나기 전에는 침실을 같이 쓰지 말라고 하시더군.]

    결혼식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별관에 따로 침실을 마련한 건 제 의지가 아님을 다시 한번 피력해 두었다.

    ‘하여튼.’

    캐슬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아무래도 외숙부님은 알렉시스에 대한 감정이 아직 좋지만은 않으신 것 같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시겠지?’

    루치는 제 아빠의 얼굴을 쏙 빼닮았는데도 예뻐하시니, 가능성은 있었다. 캐슬린은 이번 결혼식을 기회로 알렉시스의 점수를 따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루치는 아침을 먹었어? 또 밖으로 나가는 것 같던데.”

    “예. 도련님은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벌써 아침을 드셨답니다.”

    “정말? 밤새 잠이라도 못 잔 거야? 루치가 그리 일찍 일어나는 성격은 아니잖아.”

    “아니에요. 도련님은 아주 푹 잘 주무시고 일어나셨답니다. 아무래도 마이어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니까 이곳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신 건 아닐까요?”

    “그런가?”

    캐슬린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유모는 갑자기 카르미네엔 어떻게 온 거지? 생각해 보니 물어보지 않은 것 같아서.”

    “아. 저도 이곳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아서 먼저 오겠다고 했답니다.”

    “응? 익숙해지다니?”

    “도련님께선 발텐 공자님이시기도 하지만, 우스문트 백작님의 조카가 되기도 하시니까요. 카르미네에 자주 오가실 테니 동행하려면 이곳을 알아 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하긴 그렇지.”

    캐슬린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루치는 아직 어려서 우스문트의 능력을 물려받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그래도 가족인 외숙부님이나 겨울 요정족과 가까워지면 좋을 테니 말이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유모가 인사하고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캐슬린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으나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알지 못했다.

    ‘마음이 복잡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라.’

    방으로 돌아가 숄을 걸치고 나온 캐슬린은 성안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생각했다.

    이미 한 번 치러 본 결혼식이지만, 또다시 치른다고 생각하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던 경험이기에 더욱 그랬다.

    어느덧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캐슬린은 정원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무척이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웨딩드레스와 커다란 보석을 받았던 결혼식 전날 밤.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번쩍거리는 귀한 물건들 사이에 홀로 앉아, 신부로 나설 준비를 하는 초라한 주방 하녀에겐 설렘과 기대보다는 두려움과 경계심이 앞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대신관 앞에서 서약을 읊을 때조차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무심한 남편과 비어 있던 신부 측 하객 자리.

    제 손을 붙잡은 남자는 식이 끝나자 바로 돌아가 버렸고, 그녀만 홀로 남아 공작 부인으로서 피로연을 주관했다.

    당시엔 알렉시스를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서러운 기억으로 남았던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알렉시스 발텐은 더는 무심한 남편이 아니었고, 그녀의 곁에는 귀여운 아들과 믿음직스러운 친구이자 가족, 페터도 있으니까 말이다.

    캐슬린은 부정적인 기억은 지우려 애쓰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을 조금만 더 하고 방으로 돌아가 마지막으로 챙겨 놓은 짐을 살필 생각이었다.

    “……게 하세요.”

    “이렇게?”

    “네. 이쪽으로…….”

    정원 깊숙한 곳에서 드문드문 말소리가 들렸다. 유모와 루치 같았다.

    ‘외숙부님과 놀러 간 게 아니었나?’

    종일 쏘다니는 루치의 체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무얼 하고 있나 궁금한 나머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수풀 사이로 보이는 루치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가려는데 유모가 신신당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절대 마님께는 말씀하시면 안 돼요?”

    “응! 아빠랑 약속했으니까.”

    “네에, 공자님께서 비밀을 지켜 주시면, 마님도 행복해하실 거예요.”

    “엄마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루치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의지를 다지더니 벌떡 일어섰다.

    “나 다시 연습할래!”

    “좋아요. 도와드릴게요!”

    비밀? 연습?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지금 제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될 듯했다.

    캐슬린은 급하게 몸을 낮추어 숨은 뒤 수풀 사이로 조심스럽게 내다보았다.

    루치는 작은 바구니를 팔에 끼고 땅에 표시해 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바구니에 든 풀을 조심스럽게 뿌렸다.

    ‘저건……!’

    캐슬린은 그제야 아이가 뭘 연습하는지 알아차렸다.

    “잘하셨어요, 공자님. 화동은 이렇게 길을 따라서 꽃을 뿌리면 되는 거랍니다. 마님이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유모가 갑자기 이곳으로 온 것도, 루치가 아침에 갑작스레 꽃을 고르라고 한 것도 다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아마도 이건 알렉시스가 계획한 일이겠지.

    첫 번째 결혼식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무의식에 남아, 두 번째 결혼식을 망치는 악몽을 꾸었던 거였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캐슬린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발소리를 죽여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루치는 내내 보이지 않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어서야 식당에 나타났는데, 묻지 않았음에도 무얼 하고 놀았는지를 먼저 알려 주었다. 캐슬린은 모르는 척 아이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마이어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들떠 있는 루치는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럼 내일 봐, 루치.”

    “네. 엄마도 안녕히 주무세요.”

    아이를 침대에 눕힌 후, 뺨에 키스해 준 캐슬린은 따뜻해진 마음으로 아이의 침실을 나왔다.

    “캐슬린.”

    “외숙부님.”

    작위 수여식을 위해 홀로 마이어로 떠났다 돌아온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외숙부, 카시엘이 그녀의 침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마이어로 떠나게 되는구나. 다시 이별이라니…… 도통 잠이 안 올 것 같아 와 봤다.”

    “외숙부님도 함께 가시잖아요. 대공저에서 원하시는 만큼 머무르실 텐데 이별이라니요.”

    “이별이지.”

    그가 캐슬린의 두 손을 잡으며 아쉬운 듯 말했다.

    “어쨌건 너에겐 가족이 있으니까 말이다. 율리아나에게 해 주지 못했던 것을 너에게 더 해 주고 싶었는데. 아쉽기만 하구나.”

    “외숙부님도 제 가족이세요. 언제까지나요.”

    캐슬린이 그의 손을 겹쳐 잡으며 따뜻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외숙부님은 이미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어요. 감사할 뿐인걸요. 외숙부님은 제 아버지나 다름없으세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다.”

    카시엘은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목멘 소리로 말했다.

    “내 욕심으로 너를 이곳에 붙잡아 두었어.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란다. 이젠 발텐 대공을 쫓아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아니에요. 외숙부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제게는 정말 행복했어요.”

    진심이었다. 정말 외숙부님이 제 아버지였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앞으로 마이어에 자주 와 주실 거죠? 루치도 할아버지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릴 거예요. 이젠 백작님이 되시니 바쁘시겠지만요.”

    “그래. 그러마.”

    푸근한 품에 안기면서, 캐슬린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마이어로 떠나기 전날의 밤은 아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악몽도, 뒤척임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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