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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03)화 (103/110)
  • 103화

    알렉시스는 어찌하면 두 번째 결혼식을 캐슬린에게 최고의 시간으로 선물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라.’

    에디스의 말을 몇 번 곱씹어 보자 그녀가 어떤 결혼식을 원하는지 점차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첫 번째 결혼식 때 신부 측의 하객으로 참석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친부 에버튼 윈스턴이었는데, 혼주로서는 아니었다.

    그때 그는 변경백의 임무가 바빠 마이어에 늦게 도착할 거라고 전해 왔다. 당시의 저는 결혼식에 그리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았기에 별생각 없이 허락했고, 그렇게 발텐 공작 부인은 친지 없는 결혼식을 치렀다.

    알렉시스는 종이 한 장을 앞에 두고 고민하다가 설렁줄을 당겼다.

    얼마 안 있어서 에밀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찾으셨어요, 주인님?”

    “거기 앉아.”

    “네?”

    에밀리는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렉시스가 가리킨 건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하는 소파였기 때문이다.

    사용인으로서 청소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가 본 적도 없는 에밀리로서는, 알렉시스가 잘못 가리킨 게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알렉시스는 깃펜과 종이를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고 앉았다. 그러자 에밀리도 주춤거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네게 물을 것이 있다.”

    “네. 말씀하세요.”

    “초대장을 쓰려고 하는데.”

    “초대장을요? 혹시 결혼식 초대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주인님께서 직접이요?”

    알렉시스의 고개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아래위로 잠깐 움직였다. 에밀리는 순간 입을 딱 벌린 채로 충격에 빠져 있다가, 그의 미간이 약간 구겨지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때야 에밀리는 발텐 대공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했다.

    “캐슬린은 결혼식 전까지 마이어로 내려오지 못할 테니, 먼저 목록을 작성해 발송할 예정이다.”

    “넵, 그럼 마님께서 초대하고 싶을 만한 손님 목록 작성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십여 년에 가까운 사용인 생활 끝에 눈치는 뛰어난 에밀리가 재빨리 말했다.

    “이전의 결혼식 땐, 저도 준비할 일이 너무 많아 전날 밤에 마님을 뵙지 못했어요. 아마 그때 많이 쓸쓸하셨을 거예요.”

    에밀리는 빠르게 깃펜을 쥐고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이번 결혼식 때는 마님 곁에 많은 분이 계셨으면 좋겠네요.”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알렉시스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자도 불러야 하나?”

    “예.”

    에밀리는 꿋꿋이 대답했다. 막 ‘요제프 델라포스 에일라트’를 적어 넣은 참이었다.

    “신관님이 계신다면 마님께선 더 기뻐하실 거예요.”

    “…….”

    그녀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알렉시스도 캐슬린이 그에게 많이 의지했고, 미안해하며, 고마워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마이어에 자주 오갈 수 있도록 남부 파견 건을 주선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치의 아버지, 켈리의 남편 역할을 했던 그가 여전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캐슬린과 요제프 사이에 존재하는 기묘한 유대감. 알렉시스는 그것이 싫었다. 캐슬린이 그런 소중한 감정 따윈 신관 따위가 아닌 남편인 제게만 품도록 하고 싶었다.

    그녀가 곁에 없는 지금, 한밤중에 몸서리치며 잠에서 깨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이젠 그의 아내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알지만, 꿈속에서 물기 어린 눈으로 보던 예전의 그녀가 나타날 때면 숨이 막히곤 했다. 아마도 평생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잘못일 텐데.

    요제프란 놈은 그런 감정 따위 없이 그녀에겐 고마운 존재일 뿐일 테니.

    ‘……어쩔 수 없지.’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알렉시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건 그녀가 택한 건 요제프가 아니라 저니까.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써.”

    “넵.”

    에밀리는 계속해서 종이를 채워 나갔고, 그것을 보는 알렉시스의 얼굴도 시시각각으로 변해 나갔다.

    * * *

    “뭐라고요, 형님?”

    페터는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에밀리에 이어 두 번째여서 이젠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알렉시스는 말없이 종이를 내밀었다.

    “결혼식 초대를 도와 달라 말했다.”

    “그럼 이게…….”

    페터는 아직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종이를 받아 들었다가 입을 딱 벌렸다.

    “진정 이렇게 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될 건 뭐지.”

    “그렇지만, 대공가의 결혼식인데 평민들이 참석하면 아무래도 말이 돌 겁니다.”

    “이미 사교계에서 발텐 대공가를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파격적인 초대 목록을 훑으며 페터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알렉시스가 힘주어 말했다.

    “캐슬린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이 결혼은 의미 없어.”

    페터를 통해 초대할 사람들은 오솔레 마을의 주민들이었다. 캐슬린과 요제프가 숨어 살았던 곳의 이웃사촌들.

    “너 외에는 그들과 안면 있는 자들이 없어 부탁하는 거다. 들어 보니 그 마을에서 잘 적응하도록 도와준 이들이 많았다더군.”

    “예. 그랬습니다.”

    “그 마을에선 요제프가 캐슬린의 남편으로 행세했으니, 결혼식 초대를 하러 가기엔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겠나.”

    남편, 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알렉시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페터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오해 없도록 잘 말해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

    발텐 대공이 과거의 발텐 공작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페터는 낯섦을 느끼면서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젠 캐슬린이 상처받을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럼 결혼식까지 날짜가 빠듯하니 미리 마이어로 데려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마이어에서 오솔레까진 멀지 않으니 그리 서두르진 않아도 돼. 그보다 먼저 논의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서두르려던 페터는 저를 만류하는 뉘앙스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떤 일 말입니까?”

    “그대로 남자 옷을 입고 지낼 것이냐?”

    “…….”

    다소 직설적인 물음에 페터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알렉시스는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여자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제국법에는 황녀가 황위를 이어받지 못한다는 내용이 없으니.”

    발텐 대공이 돕겠다면 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세간의 의혹이 사실이라 밝힌다면 잠깐은 혼란과 반발이 있겠으나, 제국의 군사권을 모두 쥔 최고위 귀족이 뜻을 같이한다면 그들을 잠재우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페터 역시 열아홉 해 동안 여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페터는 호프웰 백작의 반란이 일어난 순간부터 정리했던 생각을 처음 입 밖으로 꺼내 놓았다.

    “저는 이대로 살겠습니다. 남자로서, 정통성에 조금도 흠집이 나지 않은 황제로 말이에요.”

    “후회하지 않겠느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

    “강력한 황권을 행사하려면 제가 여자여선 안 됩니다.”

    페터는 다부지게 말했다.

    트리벨리언 역사상 여자 황제는 없었다. 제국 이전의 왕조일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귀족들도 황자만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여겼고, 법전도 그리 제정되었다.

    “제국법에 황녀가 황위를 받지 못한다는 내용은 없으나, 모든 면에서 황자에 비해 우선권은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후대를 위해 계승법을 전면 수정할 생각입니다. 성별에 상관없이 출생 순서에 따라 우선권을 주도록 말이지요.”

    제 다음 대에는 갓 태어난 아이가 성별을 속일 일은 없어야 했다. 그리고 제국을 위한다는 핑계로 함부로 자식을 낳고 내버리는 황족도 없어야 했다.

    “형님이 지지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리하지.”

    들려온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페터는 더없이 든든한 아군을 얻은 마음에 미소 지었다.

    알렉시스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혼식을 위해 에밀리가 일러 준 것들을 떠올리니 시간이 촉박했다.

    “이만 가봐야겠다. 할 일이 많아서.”

    “예. 그리하십시오. 오솔레에는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남부에는 아직 황제의 허락이 없으면 출입이 어려우니, 그쪽에도 사람을 보내거라.”

    “알겠습니다. 키어런이 요제프와 에디스를 맡기로 했으니 말을 전해 놓지요.”

    별생각 없이 집무실을 나서려던 알렉시스는 동생의 말에서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고는 멈춰 섰다.

    “키어런?”

    “셴베르크 자작 말입니다.”

    “언제부터 그자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지?”

    “부르지 않았습니다. 말이 헛나온 겁니다.”

    “…….”

    “얼른 가 보셔야지요, 형님.”

    서둘러 저를 돌려보내려는 동생의 얼굴은 천연덕스러웠다. 하지만 페터는 태연한 것과는 별개로 시선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보지.”

    더 물어봤자 제대로 답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알렉시스는 일단 황궁을 나섰다.

    “전하! 도련님께는 유모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라일런트 자작이 다가와 보고했다.

    “에밀리가 계획을 다 설명했으니, 마님 몰래 도련님께 잘 알려 드릴 겁니다.”

    “곧바로 카르미네로 떠나도록 했겠지?”

    “예. 마님께도 들키지 않도록 하겠다고 굳게 맹세했습니다.”

    라일런트 자작은 유모와 함께 완벽한 변명거리를 짜내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가면서 피로연 진행안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알렉시스는 진지한 낯으로 라일런트 자작의 보고를 들으며 대공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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