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02)화 (102/110)
  • 102화

    “그냥 무심하신 거였어요. 결혼 생활이 몇 년 차인데 아직도 그런 말씀이라니.”

    “캐슬린을 만나고 왔나?”

    알렉시스가 성마르게 묻자 에디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시스는 그 모습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는 카르미네에서 먼저 마이어로 내려온 상태였다. 궁정 회의에 새로운 변경백 탄생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작위 수여식을 진행하려면 절차상 준비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카시엘 우스문트는 동행하지 않았다. 궁정 회의에서 정확한 날짜가 정해지면 내려오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이다.

    어렵게 만난 조카딸을 다시 보내 주는 대신 카시엘 우스문트는 조건을 내걸었다.

    - 결혼식 전까지는 내가 데리고 있겠네.

    허락을 받자마자 당장 내려가 새로운 대공비로 이름을 올리려 계획하고 있던 알렉시스는 당황했으나,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캐슬린을 ‘내 딸’이라고 말하는 카시엘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어릴 적 저를 도와주었던 그녀의 어머니 율리아나가 떠올라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 걱정하지 마요. 외숙부님의 마음을 꼭 달래 놓을게요.

    아직도 미안한 듯 저를 달래며 떠나보내던 캐슬린의 얼굴이 선했다.

    설상가상으로 새로운 변경백에게는 마이어의 저택이 한 채 내려져서, 수여식 때 캐슬린이 함께 내려온다 해도 결혼식 전까지는 함께 지낼 수도 없었다. 물론 그건 루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잘 지내고 있던가?”

    “당연하죠.”

    너무나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의 모습에 알렉시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히 그녀도 떨어지는 걸 아쉬워했었는데. 저만 이리 애가 타는 거였나?

    “무슨 이야길 나눴지?”

    “그걸 보고하라고 부르신 거예요?”

    “네가 먼저 말하지 않았나. 결혼식에 대한 우스문트 백작 영애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아아. 그럼 생각을 바꿔 볼 생각이 있으신 거군요?”

    에디스가 양손을 짝 마주치며 흥미롭게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전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노집사 알스도프가 노크하고 들어와 알렸다.

    “들여라.”

    알렉시스가 짧게 대답하며 에디스를 돌아보았다.

    “그 이야기는 잠시 있다가 하지. 우선 함께 만나 볼 사람이 있으니.”

    “저도 동석하는 건가요?”

    “그래.”

    당연히 집무실을 나가려고 일어나던 에디스가 주춤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알스도프가 비켜서자 연녹색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가 들어섰다.

    “어, 요제프 신관님!”

    에디스가 요제프를 알아보고 반갑게 외쳤다.

    “에디스 양.”

    그 역시도 에디스가 함께일 줄은 몰랐는지 연둣빛 눈을 크게 떴다가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다 집무실에 저택의 주인이 함께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대공 전하.”

    “오랜만이군.”

    여유로운 태도로 알렉시스가 빈자리를 가리켰다.

    “거기 앉게.”

    “……예.”

    요제프가 다소 긴장한 자세로 의자에 앉자, 알스도프가 차를 내왔다. 그는 처음 발텐 공작저에 왔을 때와는 다른 대접에 놀라는 눈치였다.

    “듣자 하니 내가 떠난 이후에 카르미네에 들렀다 왔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알아. 거기 출산을 앞둔 부부가 있어 치료사를 도왔다지.”

    알렉시스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예. 돌봐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길 순 없어서 다시 찾아갔습니다.”

    요제프는 예전과 달리 캐슬린을 의심하지 않는 발텐 대공의 모습에 안심하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집안의 일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계속 델라포스에 머무를 생각인가?”

    “아직 정하지는 않았지만 방랑 수련을 계속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신전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마이어 바깥에 있으니까요.”

    이런 걸 왜 묻는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요제프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는 제가 멀리 떠날수록 기꺼워할 테니까.

    그러나 알렉시스는 요제프의 말에도 안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에디스에게도 물었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이지? 계속 대공저에 머무를 건가?”

    “글쎄요. 아마 종종 떠나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마이어에서는 약초를 수집하기엔 무리가 있으니까요.”

    “잘됐군.”

    알렉시스는 그녀와 요제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럼 둘 다 남부로 내려가도록 해.”

    “예?”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두 사람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알렉시스는 그들에게 서류 두 장씩을 내밀었다.

    “남부에 자치기구가 설치될 예정이다. 행정관은 셴베르크 자작이 임명되었고, 황제 직속이니만큼 궁정 회의의 영향력도 적지. 그곳에 신관과 약제사가 필요하다.”

    에디스와 요제프는 각자 받아 든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나는 지진으로 피해가 막심한 남부 백성과 다른 영지로 떠돌고 있는 옛 셴베르크 왕조의 유민들에게 다시 터전을 마련해 주는 내용의 계획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추천장이었다.

    “요제프 자넨 델라포스의 신관으로서 마이어의 빈민 거주지를 돌본 적 있으니, 임시 거처를 세우고 관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남부에는 여름마다 전염병이 돈다고 하니 자네의 경험과 능력이 도움 될 듯하군. 에디스 네 실력도 마찬가지고.”

    그제야 요제프는 알렉시스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황제의 새로운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제안하는 것이었다.

    신전에서 경전만 읽고 귀족들에게만 축복을 내리는 삶을 살 생각은 없었으니, 제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갈 수 있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 일이 황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더더욱이나. 하지만…….

    “진정 제가 그리해도 되는 겁니까?”

    정식으로 남부에 파견을 받아 내려가는 신관이 되면 대공비인 캐슬린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 빈민 구제 사업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황제의 행정관을 보좌하면서 종종 마이어에 돌아와 황궁을 오갈 테니 말이다.

    최대한 저를 캐슬린의 시야에서 치워 버리고 싶어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발텐 대공이 아니겠는가.

    요제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서류를 몇 번이나 다시 읽고 있었다.

    “그럼 내가 거절이나 듣자고 수고롭게 자네를 불렀겠나?”

    알렉시스는 서류의 아래쪽에 찍힌 제 서명을 가리켜 보였다.

    “추천장까지 써 주었는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그만두고.”

    “아닙니다.”

    요제프가 재빨리 서류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가겠습니다.”

    “좋아.”

    알렉시스는 이번에는 에디스를 바라보았다.

    “너는?”

    “저는…….”

    서류를 든 에디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알렉시스가 말했다.

    “나와 내 아들의 상태를 성심껏 살폈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에디스는 남부의 대평야 지대에 살던 농노의 딸이었다. 스러져 가던 왕조였지만 남부의 신분제는 제국보다 훨씬 엄격했으므로, 그녀는 정복자인 발텐 공작을 따라나서길 택했다.

    “제가, 돌아가도 되는 걸까요?”

    이미 정복당한 대평야는 그악스러운 영주가 사라진 지 오래였고, 포로로 삼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만 개미처럼 모여 근근이 살아가고 이을 터였다.

    그들을 남겨 둔 채 홀로 떠났던 에디스는 아련한 죄책감과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가서 네 고향 사람들을 돕도록 해. 물자는 요청하는 대로 지원할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전하.”

    눈가를 빠르게 닦아 낸 에디스는 목이 멘 채로 씩씩하게 답했다. 알렉시스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이미 황제 폐하께도 허락을 받은 사안이니, 언제든 떠나도 좋다. 셴베르크 자작도 이미 출발했으니. 준비는 알스도프가 도울 거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요제프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그래. 루치가 기다릴 테니 다시 들르게.”

    “……예.”

    미래를 기약하는 말에 요제프는 눈에 띄게 얼굴이 밝아지더니, 알스도프의 안내에 따라 집무실을 나갔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감사해요, 전하.”

    “잠깐.”

    남부로 내려갈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들뜬 마음에 에디스가 서둘러 일어나는데, 알렉시스가 저지했다.

    “넌 잠시 기다려.”

    “네? 왜요?”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잖아.”

    “무슨 말을…… 아! 결혼식이요?”

    그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 파견 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보다 더 진지한 낯이어서 에디스는 제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어쩌면 무심한 게 아니라 정말 몰랐던 건지도.’

    에디스는 알렉시스 발텐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면서 괜히 헛기침했다. 안 그래도 빙빙 돌아서 이루어진 부부인데, 새 시작에 조금의 도움을 줘서 나쁠 건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스문트 백작 영애께서 결혼식에 원하시는 건 단 하나예요. 화려한 장식, 비싼 드레스는 물론 아니고요.”

    “그럼?”

    “사람들이에요. 그분이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그날 한곳에 모여 있는 거죠.”

    에디스는 카르미네에 들렀을 때 캐슬린이 흘리듯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내 말했다.

    “첫 결혼식 때는 아랫사람을 시켜 모든 걸 준비하셨다면서요? 결혼식 초대장도 마찬가지고요.”

    “……그랬지.”

    “이번에는 그러시면 안 돼요. 세상에 전하처럼 운 좋은 사람은 없답니다. 같은 사람과 하는 두 번째 결혼이라니, 잘못을 만회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요.”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에디스는 몇 번이나 강조한 후 집무실을 떠났다.

    그러나 또다시 새로운 문제를 얻은 알렉시스는 책상 앞에 앉아야만 했다.

    ‘소박한 결혼식이 그런 뜻이었나.’

    넌지시 결혼식을 어찌했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들었던 대답을 곧이곧대로 해석했던 게 문제였다.

    당연히 결혼식을 초라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던 예전에도 부케와 드레스, 예물만큼은 최고급으로 준비했었으니까.

    그러나 첫 번째 결혼식과 두 번째 결혼식이 같아서는 안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