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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01)화 (101/110)

101화

“록시아스 후작님.”

셴베르크 백작은 페터의 의혹에 대해 제일 집요하게 파고들던 귀족을 불러 세웠다. 이름이 불린 이가 돌아보더니 그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곁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셴베르크 백작? 그대가 어찌 여기에?”

“부관이 폐하를 뵈러 온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요.”

셴베르크 백작은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폐하를 뵈러 오셨습니까?”

“그렇소만.”

저를 훑어보는 눈빛이 차가웠다. 호프웰 백작의 반란이 남부에서 양성되고 있던 사병을 이용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반란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남부 옛 왕실의 후손으로서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으니 기꺼이 감내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아마 잠시 대기하셔야 할 겁니다. 폐하께선 어젯밤에 가이젤 자작과 사냥을 다녀오셨다더군요.”

“사냥? 가이젤 자작과?”

“예. 정무로 지치신 터라 환기가 필요하신 듯해 다녀오셨겠지요. 그래도 말을 달리고 돌아와 욕탕에서 시간을 보내시니 활기를 되찾으셨다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가이젤 자작과 욕탕에도 함께 들었소?”

가이젤 자작은 황제의 부관 중 한 명으로, 셴베르크 백작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이였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록시아스 후작은 의심하지 않고 물어 왔다. 셴베르크 백작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습을 어찌할 것인지는 따져볼 새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다더군요.”

더없이 분명한 대답에 다른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역대 황제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와 동행한 신하에게 황궁의 욕탕까지 사용을 허락하는 경우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황제는 황태자 시절부터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최근에 불거진 성별 의혹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었다. 그런데 욕탕까지 함께 든 신하가 있다니,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상한 점은 없다던가?”

“무엇이 말입니까?”

“백작도 알지 않소. 그러니까 폐하께서.”

“아. 하긴 이상하긴 하더군요. 이런 말은 조심스럽지만 전해 듣기로는…….”

“그래, 조심스럽지만?”

셴베르크 백작이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자, 록시아스 후작이 조바심을 내며 귀를 기울였다. 혼란스러워하던 다른 귀족들도 흥미로운 낯으로 셴베르크 백작의 말을 기다렸다.

“더없이 강건하신 하체에 비해 그리 무욕하신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던데요. 역시 어릴 적부터 제왕학을 배우신 터라 매사에 초연한 법을 아시는 듯했습니다.”

“……더없이 강건했다? 그게 정말이오?”

“예, 물론이지요. 듣기만 했는데도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아쉬움을 섞어 대답하자 다른 귀족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타박을 놓았다.

“거 보십시오. 말도 안 되는 말씀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다 지나간 이야기를 하시다가 괜한 불똥이 튀면 어쩌시려고.”

록시아스 후작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나는 중대한 사안인 만큼 정확히 검증하는 것이 좋으니 한 말이오.”

“아차, 여러분. 제가 드린 말씀은 부디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십시오,”

셴베르크 백작이 조급하게 말했다.

“폐하께선 고결하신지라 당신에 대한 말이 어디론가 새어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거든요. 사실 가이젤 자작이 실수하여 신신당부한 것을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만, 너무도 대단하고 존경스러운지라 제가 그만 실수하였습니다.”

“뭐, 그러겠소.”

록시아스 후작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마 얼마 안 있어 황제의 강건한 하체에 대해 황궁 안팎으로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궁정의 가십은 신분을 따질 것 없이 관심을 가지는 이가 많았다. 사내들의 입이란 가볍기 마련이니 꽤 효과가 좋을 터였다.

“록시아스 후작.”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셴베르크 백작은 재빨리 등 뒤를 돌아보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금빛 눈이 저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시선이 마주친 것은 분명 잠시인데 순간 아주 오랫동안인 것처럼 느껴졌다. 저를 샅샅이 꿰뚫는 듯한 눈빛에 온몸의 잔털이 쭈뼛 솟아오를 만큼 오싹함이 느껴졌다.

셴베르크 백작은 얼른 시선을 내려 고개를 숙이며 비켜섰다.

“폐하, 어찌 여기까지 내려오셨습니까.”

방금까지 큰소리를 내며 황제를 의심하던 모습을 거둔 록시아스 후작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내 그대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하오. 알현 시간을 미루었으면 하는데.”

“아아. 예, 피곤하시다 들었습니다.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회의 준비는 이미 마쳐 두었으니 걱정 마시지요.”

“고맙소.”

페터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러나 몇 발짝 가다가 멈추어 섰다.

“셴베르크 백작, 안 오고 뭐 하나?”

“예?”

저를 향한 말에 셴베르크 백작은 멍하니 되물었다. 황제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정무를 그리 소홀히 하면서 어찌 황제의 부관이라고 할 수 있지?”

“아…… 죄송합니다, 폐하.”

그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페터를 허둥지둥 따라나섰다.

“다들 물러나라.”

“예, 폐하.”

막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페터는 시종을 모두 물렸다. 곧 침묵만 가득한 집무실에서 두 사람은 마주했다.

“알현을 청한 이유가 무엇이지?”

한참 만에 페터가 먼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내 분명, 먼저 부르기 전에는 황궁에 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럼 시종장이 전달한 대로 기다리지 않고 록시아스 후작을 만나 헛소릴 지껄인 이유는 뭔가?”

“…….”

들었구나.

셴베르크 백작은 그만 혀를 깨물고 싶은 지경이 됐다.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향해 페터는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대답해, 키어런 셴베르크.”

“……그저 부관으로서 폐하를 돕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나를 보좌한다는 자가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하고 단독행동을 하나?”

날 선 목소리에 각오를 다진 셴베르크 백작은 품에서 사직서를 꺼냈다. 그것을 두 손으로 바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어떠한 처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

사직서를 내려다본 페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말뿐인가?”

“……폐하.”

“나를 속이고 등에 칼을 꽂으려 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할 말이 없냐는 뜻이야!”

늘 후계자답게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던 페터가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금안을 들어 그를 노려보는 얼굴이 낯설었다.

“그래 놓고서 이리 도망치겠다고? 도망쳐서 다시 남부에 숨을 작정인가? 내 목숨줄을 쥐고 흔들면서?”

“아닙니다, 폐하.”

셴베르크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가 감히 어떻게 더 폐하의 곁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뒤늦게나마 죄를 청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부관 자리든, 백작 작위든, 앗아 가셔도 반발하지 않겠습니다. 사병을 키운 것은 저이니 그 죄를 물어 주십시오.”

진심이었다.

황제의 부관이 되어 왕조의 재건을 꾀하려던 목적은 이미 스러진 지 오래였다. 셴베르크 백작이 모신 황제, 페터 트리벨리언은 제가 지금껏 생각했던 것과 다른 지도자였다.

복속한 영토를 본토와 같은 제도로 다스릴 것이며, 백성들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으려 했다. 복종이 아닌 포용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처음부터 제국의 황제가 그러한 정책을 폈다면 셴베르크 가가 백 년 이상 시간을 흘려보낼 필요도, 키아나가 홀로 외롭도록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폐하께서 남부의 백성들에 올바른 치세를 약속하셨으니 여한이 없습니다. 뜻대로 처분하여 주십시오.”

“죽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단 하나 남은 가족을 혼자 너무 오래 두었다. 죽기 전에도, 후에도. 이제는 곁에 있어 줄 때가 된 것 같아 셴베르크 백작은 홀가분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주먹 쥔 페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황궁을 나가게.”

역시 곁을 떠나라는 명이 떨어졌다. 예상했던 결과임에도 허탈해지는 기분은 막을 수 없었다.

“자네 행동에 책임은 져야 할 테니.”

무릎 위로 두꺼운 종이가 떨어져 내렸다. 황제의 인장이 붉게 찍혀 있었다.

“이건.”

“셴베르크의 가의 작위를 자작으로 내리며, 남부에 새로 설립될 자치기구의 행정관으로 임명한다.”

작위를 강등당하면 후손에 작위를 세습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남부 자치기구의 행정관이라면 단순한 백작이었을 때와는 달리 남부 전체의 실상을 직접 살피고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네 임무와 책임을 다해.”

“……폐하.”

“왕손으로 태어났다면 회피하려 들지 말고.”

언젠가 발텐 대공이 했던 말이었다. 그의 동생답다는 생각과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하겠습니다.”

받아 든 임명장에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떨어졌다.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 믿어 주신다면, 그 명 받들겠습니다.”

무엇보다 소중하게 임명장을 품에 안는 모습에 페터는 힘주었던 주먹을 풀었다.

- 폐하께서 가이젤 자작과 욕탕에도 함께 들었소?

-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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