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은근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더 반응하기 시작했다. 캐슬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지만, 곧 턱이 붙잡혀 다시 시선을 맞부딪치고 말았다.
“응? 대답해 봐, 캐슬린.”
“그게…….”
“우스문트 성에는 통금이 있나?”
“그, 그런 건 아닌데…….”
뜨거운 입술이 어느새 뺨을 넘어 이마와 콧잔등, 눈두덩을 이어 귓불까지 닿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유혹에 캐슬린은 제대로 거절하지 못하고 휘말리기 시작했다.
“외숙부님이 루치를 봐주시면, 엄마가 굳이 옆에 있을 필요는 없을 거야.”
“으응…… 그렇긴 한데요.”
“지금 널 필요로 하는 건 누구보다 나야. 네 남편.”
캐슬린은 저를 원하는 알렉시스의 모습에 내심 당황했다.
‘지금껏 한 번도 이러지 않았는데.’
감정이 마비된 신경이 다시 살아나 완치되었다더니 성격도 바뀌었나 싶었다. 결혼한 지 벌써 다섯 해가 다 되어 가지만 밤을 함께 보낸 건 두 번뿐이어서인지 긴장되었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쁜 쪽에 가까웠다.
“아침에 돌아가.”
알렉시스가 은근하게 말했다.
“데려다줄 테니까.”
“자, 잠깐만요……!”
턱 끝을 오가던 입술이 목 쪽으로 내려가려 하자 캐슬린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밀어냈다. 혹시라도 흔적이 남으면 실내에서도 내내 목도리를 하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그녀의 거절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성급했군.”
그는 몸을 뒤로 물리며 사과했다. 그의 얼굴에는 미약한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네게는 달갑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텐데. 내 욕심이 너무 앞섰어.”
“아…….”
갑작스러운 사과에 의아해하던 그녀는, 그제야 알렉시스가 왜 멈추었는지 알아차렸다. 부부였던 그들이 보냈던 밤은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결혼하게 된 이유인 첫날밤은 미약 때문이었고, 루치가 생겼던 두 번째 밤은 반항심과 오기 때문이었으니까.
알렉시스로서는 제가 그 기억 때문에 깊어지는 접촉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여길 법했다. 그는 캐슬린을 품에 안고 가만가만 등을 쓸어 주었다.
“앞으로는 내 멋대로 행동하지 않을게. 그냥 지금은 이렇게 나와 함께 있어 줘.”
조금은 아쉬움이 있었으나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손길에 이대로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슬린은 팔을 들어 남편을 안았다.
“네. 그럴게요.”
그에 대한 마음이 심장에 한껏 차서 가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캐슬린은 더 깊이 알렉시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 *
“루치, 엄마는 오늘도 아침을 안 먹는다던?”
카시엘은 오늘도 아침 식사 자리에 불참한 캐슬린을 의아하게 여기고 손자에게 물었다. 루치는 오트밀 한 숟갈을 삼키고 대답했다.
“네. 엄마 아직 자요.”
“희한하구나. 매번 일찍 일어나던 아이인데.”
“엄만 밤에 놀다가 와서 그래요. 나보고는 맨날 일찍 자라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카시엘은 툴툴거리며 대답하는 루치의 말에 깜짝 놀랐다.
“뭐? 네 엄마가?”
그는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감지했다. 캐슬린은 요 며칠 매번 일찍 잠자리에 든다며 침실로 돌아갔는데, 대체 어딜 나가서 놀다 온다는 말인가? 그것도 혼자서…….
‘아. 혼자가 아니었겠군.’
헛웃음이 나왔다. 카시엘은 우스문트에 방문한 외부인 중, 캐슬린이 바깥에서 만나러 갈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알렉시스 발텐을 만난 거로군.”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그 불한당 같은 놈을 겨우 조카에게서 떼어 놨는데, 또 어느새 꼬여내 밖으로 데려가다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맞다! 엄마가 아빠랑 놀았나 봐요!”
루치가 손뼉을 짝 치며 잊고 있던 것을 깨달은 듯 말했다.
“그래, 그런가 보구나.”
카시엘은 이를 악물었다. 조카딸을 여태 고생시킨 것도 모자라 아예 홀려 놓았다. 이건 완전히 도둑놈이 아닌가 싶었다.
‘카르미네에 와서 조용히 있길래 얌전히 근신하고 있는가 싶더니…….’
한숨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놈이 홀로 마이어로 돌아가야 변경백 작위를 받겠다고 엄포를 놓고 싶었다.
“죄송해요, 외숙부님. 제가 늦었죠?”
그때 식당으로 캐슬린이 허둥지둥 들어왔다. 피곤한 듯 눈가가 거뭇했다.
“오늘은 꼭 함께 식사하겠다고 약속드렸는데 늦잠을 잤네요. 죄송해요. 내일은 꼭…… 에취!”
“감기라도 걸렸니?”
“아, 심각한 건 아니에요. 몸이 조금 으슬으슬한데, 쉬면 나을 거예요.”
발텐 대공만 생각하면 열이 뻗쳤으나, 막상 제 눈치를 보며 웃는 조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졌다. 더구나 이미 아이까지 낳은 사이니 멀어지기란 쉽지 않겠지.
카시엘은 한 번 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밤마다 만나러 가는 건 그만하거라. 날도 추운데 크게 앓아눕기라도 하면 어쩌니.”
“네?”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캐슬린을 보니 정곡을 찔린 티가 났다.
“……식사 마치면 발텐 대공을 불러오렴. 만나 봐야겠다.”
그의 말에 캐슬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네, 외숙부님! 바로 불러올게요. 감사합니다.”
“대신 식사 제대로 하고, 꼭 따뜻한 차도 다 마시거라.”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마음 같아서는 보름은 더 기다리게 하고 싶었지만, 결국 카시엘은 캐슬린에게 져 버렸다.
식사를 마친 후 응접실로 올라가 있자 얼마 안 있어서 발텐 대공이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알렉시스 발텐입니다.”
노크 후 문밖에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소개가 들려왔다. 카시엘은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다.
“들어오게.”
그러자 검은 머리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장신의 남자가 검은 제복을 입은 채 들어섰다. 저번에 보았던 것처럼 멀끔하긴 했지만 영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이었다.
“넌 나가 있으렴.”
“외숙부님…….”
“얼른.”
발텐 대공과 함께 들온 캐슬린은 카시엘의 단호한 말에 알렉시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시 응접실을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카시엘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발텐 대공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물어 왔다. 카시엘이 먼저 권하지 않을 걸 안다는 듯이.
“그러게.”
속내를 간파당한 카시엘이 마지못해 말했다. 발텐 대공은 예법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은 태도로 인사한 후, 자리에 앉아 황제의 서한과 칙서를 전달했다.
카시엘은 봉인을 뜯어 내용을 대충 읽어 내리고는 옆으로 치워 버렸다. 불편한 심기를 눈치챘을 텐데도 발텐 대공은 태연했다.
“황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 없으니, 이리 정식으로 사람을 보낼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그렇군요.”
“그 사람이 대공일 필요는 더더욱 없었고.”
“한 번은 보고 싶어 하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자네를?”
“예. 절 살려 주셨으니까요. 감사 인사도 할 겸 찾아뵈었습니다.”
말문이 막혔다. 그가 얼음꽃을 보내어 발텐 대공을 살리는 데 일조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저 뻔뻔한 얼굴이 예뻐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자네가 차라리 죽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 생각하네. 그래야 그 아이가 자유로워지니까.”
“알고 있습니다.”
카시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발텐 대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캐슬린은 제 옆에 있으면 자유를 제한받겠지요.”
“…….”
“그래도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붙잡아 살기로 했고, 이젠 남은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합니다.”
깍듯하게 말을 높이면서도 한 치도 물러남이 없었다. 진실한 모습에 카시엘은 마음이 놓이면서도 씁쓸해졌다. 이젠 그녀를 정말로 놓아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리아나, 네 딸 역시 너와 같이 세상으로 나가길 원하는구나.’
어쩌면 정말 그녀의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스문트도 언제까지 산맥에 숨어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율리아나와 캐슬린이 그 물꼬를 터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카시엘은 변경백 작위를 내리는 내용이 적힌 칙서에 잠깐 눈길을 준 후 말했다.
“그 아이는 내 동생의 딸이지만, 이젠 내 딸이나 다름없어. 그 아이의 아들 또한 내 손자로 생각하고. 그러니까.”
그는 발텐 대공에게 경고하듯 잠시 멈추었다가 빠르게 말했다.
“지난날처럼 다시 그 아이에게 상처를 준다면 이젠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 두게. 황제는 내게 작위와 권력을 주었지만 난 언제든 그걸 내던질 수 있네. 우스문트 가의 능력으로 마이어에 재앙을 내리는 건 어렵지도 않아. 알겠나?”
“그러겠습니다. 캐슬린은 제 아내고, 루치는 제 아들이니까요.”
발텐 대공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못마땅했지만 카시엘은 마지막으로 한 번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내 딸아이를 잘 부탁하네.”
카시엘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캐슬린 우스문트 영애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텐 대공은 기꺼이 평화를 위한 그 손을 잡았다.
불신과 분열을 넘어, 한 발짝을 나아가는 제국으로의 발돋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그 시각, 황궁.
“폐하께서는 정무로 바쁘십니다. 부관께서는 잠시 기다리시지요.”
셴베르크 백작은 알현을 벌써 다섯 번째 거절당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시종장은 엄격한 낯이었다.
“……알겠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그는 물러 나왔다. 남부에서 구출된 후 황제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품에 챙겨 넣은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 안에 알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퇴궁 시간 전까지는 버텨 볼 작정이었다.
‘배신자라 생각하시겠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직접 반란을 꾀한 건 아니었으나 그가 키운 군사들이 반란에 쓰였다. 황제로서는 저를 바로 처형해 버리지 않고 먼저 조사를 통해 진상을 조사한 것만 해도 큰 은혜를 베푼 거였다.
그런데 왜 황제가 저를 만나려 들지도 않는다는 것에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떠나야 한다.’
그 기분의 정체를 알아 버리기 전에 떠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수십 일을 고민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그랬다. 키웠던 군사도 무용지물로 돌아갔고, 남부에는 자치기구를 세워 옛 왕조의 백성을 보살핀다 하니 그의 목표는 사라졌다. 황제의 옆에 있을 이유도 더 없었다.
“그러니까 왜 속 시원히 검증하지 않으시냐 이 말이오.”
정처 없이 회랑을 거니는데, 멀리서 귀족들 한 무리가 다가오며 불만스럽게 떠드는 말이 크게 울렸다.
“황제 폐하든 대공 전하든, 입을 다물고 있으니 참 답답하지 않소?”
“아니, 아직도 그 소리요? 정말 폐하께서 남자가 아니라면 대공 전하가 가만히 계셨겠소?”
“그거야 서로 합의했을지 어떻게 아오? 그저 상의만 벗으시면 될 일을, 지금까지 끌고 있으니 의혹이 사라지지 않는 거 아니요!”
황제의 부름에 궁으로 들었을 텐데, 그런 주제에 거리낌 없이 성별 의혹을 떠벌리고 다니다니.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셴베르크 백작의 입매가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