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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99)화 (99/110)
  • 99화

    어이가 없음을 넘어 황당했지만 알렉시스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하겠다고 전하라.”

    “예. 머무르실 곳은 따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경비병은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캐슬린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부글거렸으나, 알렉시스는 순순히 말고삐를 돌렸다. 이런 일로 캐슬린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접견하고 나면 달라지겠지.’

    황제의 서한과 칙서가 있으니 언제까지고 이리 냉담하게 굴 수는 없을 거라고 애써 생각하면서, 그는 순순히 경비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네가 그를 선택하게 될 줄 알았다.”

    알렉시스의 곁에 머무르고 싶다고 말하자, 카시엘은 체념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를 살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어. 그래도 그가 깨어나지 않으면 카르미네로 돌아오겠거니 여겼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외숙부님…….”

    “네 선택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쓸쓸해 보이는 카시엘의 모습에 캐슬린이 서둘러 말했다.

    “마이어에 머무른다 해도 외숙부님을 자주 뵈러 올 거예요. 폐하께서 외숙부님께 변경백의 작위를 제안하셨으니 외숙부님께서도 저를 언제든 보러 오실 수 있을 거고요.”

    “그래. 그 작위가 없다면 너를 다시 마이어로 돌려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카시엘이 불신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변경백 작위라도 없다면, 발텐 대공이 나를 대공저에 들이지도 않을지 어찌 알겠느냐?”

    “외숙부님, 알렉은…….”

    “아마 그자는 지금도 널 어찌하면 내 옆에서 빼 올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을 거다.”

    카시엘은 우스문트 가의 가주로서 황제의 제안은 수락할 의향인 듯했지만, 사절로 온 알렉시스에게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외숙부님.”

    캐슬린은 난처한 얼굴로 카시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알렉, 아니 대공 전하를 계속 성 밖에 머무르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손님을 맞을 준비는 제가 할 테니까 불러들이시면 안 될까요?”

    “이 성에 그가 머물 방이 없는데 어떡하겠느냐.”

    카시엘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성안의 침실 열 개 중 여덟 개가 비어 있으며, 그 외 휴게실이나 응접실도 따로 쓰는 이가 없다는 사실은 깡그리 무시한 채였다.

    “성 밖에 마련된 숙소도 꽤 좋은 곳이다. 그만하면 그에게는 분에 넘치지.”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머물기엔 불편하실 텐데…….”

    “군소리 없이 갔다고 했으니 저도 동의한 게지.”

    카시엘은 알렉시스를 황제의 형이자 제국의 대공이 아닌, 조카를 괴롭힌 남편으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캐슬린은 난처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카시엘은 속이 타는 조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캐슬린의 품에 안겨 있던 루치가 잠에서 깬 기색을 보이자 반색했다.

    “루치, 일어났니? 우리 다시 만났구나. 할아버지에게 와 보련?”

    “할아버지?”

    잠깐 낯설어하던 아이는 곧 카시엘을 기억해 내고 푸른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옳지. 이제 생각이 났구나.”

    카시엘은 남부에서 알렉시스를 구해 급히 마이어로 왔다가 다시 카르미네로 돌아가느라 루치와 두어 번 마주친 게 다였다. 처음 보았을 때는 얼핏 보아도 알렉시스와 너무 닮아 망설였지만, 얼굴에서 캐슬린과 율리아나를 닮은 구석을 발견해 내면서 그의 시선에도 애정이 어렸다.

    “저번에 뵀었지? 카시엘 할아버지야.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의 오빠야.”

    캐슬린이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루치는 아직 어려서 가족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저와 같은 머리와 눈 색을 지니고 있으니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할아버지!”

    루치는 붙임성 좋게 웃으며 달려가 안겼다. 카시엘도 반가워하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곧 네 살이 된다고 했지? 아주 튼튼하고 활달하구나. 네 할머니를 많이 닮았어.”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된다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 카시엘은 무척이나 루치를 귀여워하는 기색이었다.

    “같이 차 마시러 가겠느냐? 할아비가 네게 주려고 간식도 준비했는데.”

    “좋아요!”

    두 사람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 모습에 안심하면서도, 알렉시스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강경한 태도를 어찌 누그러뜨려야 할지 슬그머니 걱정되기 시작했다.

    ‘알렉은 지금쯤 잘 쉬고 있을까?’

    산을 넘어야 하니 많은 인원은 필요 없다며 제 시중을 들 하인은 데리고 오지 않은 알렉시스였다. 그런데 성안이 아닌 바깥의 숙소에 머물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가 어찌 지내는지 걱정되어 몰래 빠져나갈까 생각하는데, 앞장서가던 카시엘이 돌아보며 엄하게 말했다.

    “얼른 오지 않고 뭘 하니?”

    “아, 네! 가요.”

    캐슬린은 당혹스런 낯으로 그를 따랐다. 아무래도 카시엘이 마음을 풀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 * *

    ‘차라리 성으로 쳐들어갈 걸 그랬나.’

    알렉시스는 대충 침대에 걸터앉아 열린 창문으로 까맣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침 그믐이어서 달도 안 뜨는 바람에 더 적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얼마나 더 냉담해질지 모르니.’

    카시엘 우스문트는 겨울 요정족의 직계 후손이어서 그런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양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나 성격만큼은 한겨울처럼 싸늘했다. 그러니 황제와의 협상에서도 단번에 목표를 성취했을 터였다.

    알렉시스는 일단은 내일 오후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황제의 칙서를 살필 준비를 한다는 건 핑계고, 지금 카시엘 우스문트는 캐슬린을 데려가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 상태를 더 건드려서 좋을 건 없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마차가 그렇게 성안으로 사라지고 며칠 동안 안 나올 줄 알았더라면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보낼 걸 그랬다. 눈앞에 캐슬린과 루치의 얼굴이 아른거려 답답했다.

    결국 알렉시스는 오늘도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가 머무는 곳은 애초에 손님 접대용으로 마련한 것이 아니라, 평민들이 지내는 집을 하나 적당히 정리해 둔 것이어서 딱히 넓지도 않아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몇 시간쯤 흘렀을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리더니 문을 두들겼다.

    똑똑.

    아주 조심스러운 기척이었다. 알렉시스는 익숙한 손길에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캐슬린?”

    코끝이 빨개진 캐슬린이 달려왔는지 숨을 몰아쉬며 그 앞에 서 있었다. 알렉시스는 반가움도 잠시, 여린 몸이 찬 바람에 떨리는 것을 보고 얼른 안으로 들였다.

    문을 닫으면서 손을 잡았는데 얼음장 같았다. 안쓰러운 마음이 몰려왔다.

    “무슨 일 있어? 이 밤중에 혼자 내려오다니.”

    “당신이 쓸쓸할 것 같아서요.”

    그러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니 걱정스럽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불편하진 않아요? 집도 좁고, 시중을 들어줄 사람도 없잖아요.”

    “괜찮아. 이보다 더 좁고 더러운 곳에서 굴렀던 적도 있는데.”

    “알렉…….”

    무심코 지하 감옥을 입에 올렸다가 그녀의 얼굴이 흐려지려 하자 알렉시스는 얼른 덧붙였다.

    “지루하긴 하더군. 언제 성에서 소식이 올까 기다리고 있어야 하잖아. 그래도 이렇게 네가 와 주었으니 괜찮아졌어.”

    “더 빨리 찾아왔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외숙부님이 루치와 시간을 보내시는데 곁에 함께 있다 보니 깜빡 잊었어요.”

    알렉시스는 캐슬린과 루치가 카시엘 우스문트와 내내 함께 있는 광경을 떠올려 보았다. 셋은 머리 색과 눈 색이 똑 닮았다. 완벽히 아버지와 딸, 그리고 손자의 모습이라 할 만했다.

    ‘다른 이들이 보면 내가 빠져도 완벽한 가족이라 할 수 있을 정도군.’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긴 듯해 질투심이 일었다.

    “외숙부님 기분이 풀리신다면 난 상관없어.”

    하지만 알렉시스는 그런 기색을 숨긴 채 태연하게 대꾸했다. 친족에게 질투 따위나 하는 못난 모습을 캐슬린에게 들키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녀는 안심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제가 꼭 외숙부님의 마음을 돌려놓을게요.”

    “너무 애쓰지 마. 외숙부님도 적응하실 시간이 필요하겠지.”

    알렉시스는 너그러운 모습을 꽤 익숙하게 흉내 냈다. 어차피 캐슬린은 외숙부가 아닌 저를 택했으니 최후의 승자는 카시엘 우스문트가 아니었다. 캐슬린의 감동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잠깐의 시간쯤은 양보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텐 대공이 머무는 집에는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소파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소파는 카르미네로 올 때 탔던 마차의 의자보다 더 작아서 서로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시스는 처음으로 이 좁아터진 집이 흡족해졌다.

    “외숙부님이 루치와 벌써 꽤 친해지셨어요. 미리 간식도 준비해 두시고, 정원에 그네도 매어 두셨더라고요.”

    “그래?”

    “네. 루치가 그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봤어요. 엄마는 아예 잊어버린 것 같더라고요.”

    “그럼 아빠도 잊어버렸겠네.”

    “아, 아뇨. 루치는 당연히 아빠가 안 보여서 실망했는데 할아버지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니 반가워서 잠깐…….”

    알렉시스가 마음이 상했을까 봐 얼른 변명하던 캐슬린은 제 허리를 감아 오는 손길에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시스의 금빛 눈이 어느새 열기를 품은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끔은 루치가 우릴 잊어버려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군. 특히 지금 같은 순간에는.”

    “지금, 같은 순간이요?”

    “응. 지금처럼 우리만 있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답하더니 그녀의 허리를 한쪽 팔로 들어 허벅지에 앉혔다. 엉겁결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된 캐슬린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너만 여기 있어 주면 외롭지 않을 것 같은데.”

    알렉시스가 어느새 그녀의 붉어진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오랜만에 만난 남편이니 잠깐 놀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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