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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96)화 (96/110)
  • 96화

    의사와 약제사, 신관의 긍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스는 며칠간 더 안정을 취해야 했다. 중독과 외상은 완전히 치료되었다 하더라도 중태에 빠져 누워 있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몸이 멀쩡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환자 신세로 침실에 머물러야 하니, 늘 바쁘다 못해 급박한 생활을 이어 가던 알렉시스로서는 갑갑한 일이었다.

    그래서 캐슬린은 매일 그의 침실에 머무르며 시간을 보냈다.

    “잘 잤어요? 오늘 기분은 어때요?”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 묻자, 알렉시스는 한쪽 팔을 베고 잠든 루치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이 소곤거렸다.

    “아주 좋아.”

    무척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곁에 잠든 루치의 잠든 얼굴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어젯밤엔 루치가 아빠와 함께 자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하는 수 없이 두고 왔는데, 별일 없이 잘 잔 모양이었다.

    캐슬린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며 물었다.

    “불편하진 않았어요? 요즘 루치가 잠버릇이 심한데.”

    “괜찮았어. 아이가 발로 차는 것쯤이야 별거 아니지.”

    그가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에디스가 처방한 약은 어젯밤 자기 전 마지막으로 다 먹였어. 지켜봤는데 부작용은 없더군. 루치는 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요제프도 봐주고 갔고, 카벨 선생님이 하루에 한 번씩 진찰하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왠지 저보다 그가 더 루치를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캐슬린은 그를 안심시키려 자세히 말해 주었다.

    잠시 후 유모가 도착해 루치를 데려가고, 캐슬린은 그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창가에서 차를 준비하며 기다렸다.

    다기 잔 안에 퍼지는 향긋한 차향을 맡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가운이 벗겨져 드러난 알렉시스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너른 등에는 열상과 자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구르며 겪은 아픔은 치유력을 써도 단번에 지워지지 않은 탓이었다.

    돌아선 채로 상의를 꿰입는 알렉시스의 흉골과 늑골에도 상처가 아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왜 그래?”

    캐슬린의 표정을 알아챈 알렉시스가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오며 기민하게 물었다.

    “울 것 같잖아.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

    “아뇨.”

    “그럼 왜?”

    만족스럽던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조급함만이 남았다. 알렉시스는 찻잔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당신이, 안쓰러워서요.”

    어릴 적부터 홀로였던 그가 살아남으려 갖은 고생을 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전장에 나선 후부터는 곁에 머무르는 것이 죽음뿐이었으니 더욱 외로웠을 것이다. 독 때문에 깨닫지만 못했을 뿐.

    제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죽으려 했다고 착각했을 때, 그는 넋을 잃은 것처럼 말했었다. 자신을 두고 떠나지 말라고.

    그 말이 뒤늦게 가슴을 짓눌렀다.

    “너만 옆에 있으면 괜찮아.”

    알렉시스는 단호하게 말하며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앞으로는 더 이상 같은 잘못을 하지 않을 거니까.”

    “네.”

    캐슬린은 물기 어린 음성을 삼키려 애쓰며 그를 마주 안았다. 그가 외로워했던 동안 곁에 있어 주지 못했으니,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차 마시자.”

    알렉시스가 미소 지으며 손을 잡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요즈음 그는 아침을 먹기 전, 그녀와 담소를 나누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던 중 캐슬린이 말했다.

    “아, 맞다. 아침 식사 전에 잠깐 정원에 갔다 올게요. 루치와 먼저 식사하고 있어요.”

    “정원엔 왜?”

    알렉시스는 득달같이 물었다. 차를 다 마신 후 당연히 다이닝 룸으로 함께 내려가리라 생각했는데 동선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꽃을 가져오려고요. 알스도프가 새로운 모종을 많이 심었다길래.”

    “에밀리를 시켜.”

    “직접 꾸며 보고 싶어서 그래요.”

    별일 아닌 일이고,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닌데 슬며시 불안한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곧이곧대로 드러낼 순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유모가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루치를 데려다주자 캐슬린은 정원으로 향했다. 알렉시스는 아이를 받아 안으면서도 신경이 내내 그쪽으로 쏠렸다. 그래서 결국 다이닝 룸으로 내려가서도 내내 문 쪽을 흘깃거렸다.

    “아빠?”

    어젯밤과 달리 제게 미묘하게 건성인 태도를 알아챈 루치가 물었다. 그제야 알렉시스는 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루치, 우리 엄마 찾으러 갈까?”

    “엄마 어디 갔는데요?”

    “정원에.”

    그는 루치가 대답하기도 전에 안아 들고 정원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하얗고 노란 꽃을 한 아름 안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던 캐슬린과 마주쳤다.

    “알렉? 어디 가요?”

    그녀의 연푸른색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루치가 끼어들었다.

    “아빠가 엄마 찾으러 가자고 했어요!”

    캐슬린은 눈을 깜빡이며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어딜 다녀오겠다고 미리 말했고, 그리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벌써 쫓아오다니.

    “음식이 식을까 봐.”

    알렉시스는 뒤늦게 말했다. 누가 들어도 변명인 걸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어색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어린 불안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곁에 있겠다고 약속도 했고, 깨어난 이후 줄곧 같이 있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제가 어딘가로 떠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예전처럼 속박하지는 않았으며 자유롭게 놓아두었다.

    하루 내내 시간을 같이 보낸 후, 밤에 각자의 침실로 돌아가면 알렉시스는 한참 후 몰래 찾아와 그녀가 잘 잠들어 있는지 살펴보고 돌아가곤 했다. 그것 역시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온실에 가 봤어요.”

    캐슬린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정석이 다 사라졌던데요.”

    “……응.”

    “근처에 있던 것들도 다 없어졌고.”

    “치운 지 좀 됐어.”

    루치를 고쳐 안으며 대답하는 모습에서도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이전이라면 은밀히 뒤에서 저를 살피는 모습에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완전히 뉘우쳤으며 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예전처럼 두렵지 않았다. 그에게는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알렉시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고마워요. 믿어 줘서. 이제 아침 먹으러 갈까요?”

    그 말에 그의 낯빛이 안도하는 기색으로 바뀌었다.

    가져온 꽃으로 테이블을 장식하고, 간단한 아침을 먹으며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편안한 일상은 그녀가 꿈꿨던 행복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었다.

    “알렉, 할 말이 있어요.”

    그래서 캐슬린은 식사를 마친 루치를 먼저 돌려보낸 후, 조심스럽게 화두를 꺼냈다.

    “사실 당신이 전장에 나섰다는 걸 알고 외숙부님께 지원을 부탁드렸어요. 폐하는 의혹을 받고 있어서 군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 알고 있어.”

    “외숙부님께는 약초를 구하러 간다고 말씀드리고 몰래 마이어로 온 거였어요. 결국 외숙부님은 제 부탁을 들어주시긴 하셨지만, 상처가 크셨을 거예요.”

    캐슬린은 간략하게 어머니의 일과 겨울 요정족인 우스문트 가의 사람들이 제국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지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카르미네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살기로 했던 그녀가 결정을 번복하는 것이 카시엘에게 얼마나 큰 상실감을 주었을지도.

    “그러니까 외숙부님을 직접 찾아뵙고 당신의 곁에 있겠다고 결정한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루치와 함께요.”

    다시 카르미네로 가겠다는 캐슬린의 말에 알렉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잔을 쥔 손도 약간 떨렸다.

    같은 집 안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힘들어하는데, 죽음을 넘나들었던 공간으로 다시 찾아간다고 하니 마음이 복잡할 터였다.

    “외숙부님께 꼭 허락을 받아 올게요. 조금은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요.”

    캐슬린이 확신하듯 말했다. 그녀에게는 알렉시스나 루치 못지않게 카시엘도 소중했다. 그러니 잘 설득해 이해시킨 후 알렉시스와도 좋은 관계가 되게 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듣던 알렉시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그럼 내가…….”

    그리고 막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떼었을 때였다.

    “전하, 담소 중에 죄송합니다. 황궁에서 급히 사람을 보냈습니다.”

    알스도프가 헐레벌떡 다이닝 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궁에서?”

    “예. 폐하께서 황명을 내리셨다 합니다.”

    알렉시스와 캐슬린의 눈이 마주쳤다. 반란은 잘 마무리되었지만 아직 불거진 황제의 성별 의혹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면 큰일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전하, 칙서가 도착했습니다. 바로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라일런트 자작이 다급한 표정으로 황제의 인장이 찍힌 두루마리 두 개를 가져왔다. 알렉시스는 다급한 손길로 그중 하나를 펼쳤다. 그리고 맨 첫 번째 줄을 읽자마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게 뭐지? 정략혼이라니?”

    뜻밖의 말에 캐슬린을 포함해 모두가 놀랐다. 알렉시스는 더 읽을 것도 없다는 듯이 칙서를 라일런트 자작에게 던졌다.

    “마저 읽고 처리해.”

    “예? 아, 예.”

    황제가 내린 문서를 직접 읽지 않고 부관에게 넘기는 것은 중죄였다. 라일런트 자작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가 직접 읽으면 더 큰일이 날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칙서를 받아 들었다.

    “알렉,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마저 들어 봐요.”

    캐슬린은 다이닝 룸을 나가려는 알렉시스의 손을 끌어 붙잡아 앉혔다. 그리고 라일런트 자작에게 어서 읽으라고 눈짓했다.

    불안한 기색으로 칙서를 훑어 읽으며 목을 가다듬던 자작의 낯빛이 순간 환해졌다. 그는 칙서의 내용을 또박또박 읽어 내렸다.

    “황실의 방계이자 제국의 최고위 귀족이며, 세상에 비할 바 없는 충신인 발텐 대공이 상처하여 옆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전의 대공비인 캐슬린 윈스턴이 사망하였으니, 대공은 북부의 캐슬린 우스문트를 새로운 대공비로 맞아 황실과 제국에 충성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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