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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95)화 (95/110)

95화

그들은 긴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은 대화라기보다는 사과와 고백과 만류에 가까웠지만.

“다 내 잘못이니 넌 사과하지 마.”

알렉시스는 캐슬린이 다시 사라질까 두려운 것처럼, 그녀를 침대의 제 옆에 앉힌 다음 손을 꼭 잡으며 반복해서 말했다.

“처음부터 내가 솔직했다면 모두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으니까.”

“다 당신 잘못이라고 할 순 없어요. 저도…….”

“그만.”

그는 강경하게 캐슬린의 말을 잘랐다. 더는 듣지 않겠다는 금색 눈동자가 고집스러웠다. 캐슬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젠 죽을 생각은 하지 말아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에요.”

“그럴 생각이야. 물론 너 없는 세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알렉!”

“그래도 걱정은 마. 이제부터는 넌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할 테니까 나도 죽을 일은 없겠지.”

도돌이표였다. 아무리 달래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애초에 제가 죽었다고 여겨서 신변을 정리하고 따라 죽을 생각이었다는 것만 해도 기함할 일인데, 앞으로도 얼마든지 또 그러겠다는 태도여서 어이가 없었다. 예전에 싸늘하게 저를 내려다보며 밀어내던 남자와 지금 제 옆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남자가 동일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의 몸 상태는 한결 나아진 듯 보여서 마음은 놓였다.

“있잖아요, 알렉.”

캐슬린은 조심스럽게 서두를 꺼냈다. 그는 처음부터 제 잘못이라고 말했지만, 캐슬린은 첫 만남의 단추가 끼워지게 된 이유를 알리지 않은 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니 이제는 말할 때였다.

“사실, 우리가 처음 밤을 보낸 날. 제가 왜 당신의 침실로 갔었는지 말해 주고 싶어요.”

“하녀 일이 힘들어서라고 했잖아.”

“죽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그녀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발텐 공작저의 충실한 주방 하녀였던 스물한 살의 켈리부터, 새 주인인 호프웰 공작의 기행, 그리고 에밀리의 죽음까지.

혼란스러운 얼굴로 귀 기울여 듣던 알렉시스는 호프웰 공작이 에밀리를 죽였다는 대목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가 캐슬린을 범하려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엔 이를 악물었다. 사나워진 눈빛은 금방이라도 침실을 뛰쳐나갈 것처럼 보여서, 캐슬린은 그의 손을 꼭 잡아 누르며 말을 맺었다.

“처음에는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지레 포기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솔직해지고 싶어서 말하는 거예요. ……어차피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믿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알렉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태도에 캐슬린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아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럼 넌 날 두 번 살린 거야.”

그의 따뜻한 손가락이 눈가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고마워, 캐슬린.”

알렉시스가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고 가만가만 등을 쓸어 주었다.

“사랑해.”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 고백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캐슬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겨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알렉시스는 그런 그녀에게 계속해서 속삭였다.

“사랑해, 캐슬린.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이어지는 고백에는 캐슬린이 그토록 원했던 절절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제 생에서 알렉시스 발텐이라는 남자를 지워 버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 * *

알렉시스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대공저는 발칵 뒤집혔다. 상주하고 있던 황궁의들이 뛰어와 상태를 살피고 카벨 선생과 에디스가 그 뒤를 따랐다.

“대공 전하께서는 완전히 정상이십니다.”

“기적입니다. 다시 눈을 뜨신 것만 해도 놀랄 일인데 내상이 모두 치료되셨어요.”

황궁의와 카벨 선생이 입을 모아 말하자 에디스가 덧붙였다.

“혈관에 흐르던 독이 거의 사라진 듯하지만, 당분간은 카시엘 님이 보내 주신 얼음꽃 약을 계속 드시는 게 낫겠어요. 그 후에 완치 판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네요.”

호전을 넘어 완치를 말하는 여러 의견에 캐슬린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특히 카르미네로 돌아가자마자 얼음꽃을 찾아 보내 준 카시엘에게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젠 된 거지, 캐슬린? 멀쩡하다니까.”

반강제로 침대에 누워 있던 알렉시스가 일어나며 말했다.

“내 몸이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완전히 다 나았어.”

“아직 마지막 확인이 안 끝났어요.”

캐슬린은 단호하게 그를 다시 침대에 앉히며 말했다. 모든 일은 정확하게 끝맺음을 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루치를 보고 있을 테니까, 곧 올 거예요.”

“누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침실 문이 열리고 요제프가 들어섰다.

“신성력으로도 확인을 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서로를 마주하는 금빛과 연둣빛 눈동자가 다소 경직된 것을 보고, 캐슬린이 말했다.

“요제프, 살펴봐 줄 거죠?”

“그럼요.”

요제프는 긴장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에디스가 눈치를 보며 카벨 선생과 황궁의를 데리고 나갔다.

조용해진 침실에서 요제프가 마지막으로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요제프가 신성력을 거두어들이며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넸다.

“더 이상의 진료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군요. 완전히 회복하셨습니다.”

“다행이군. 자네가 그리 말할 정도라면 말이지.”

“예. 아마 사는 동안은 신관을 다시 만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물러났다.

“루치도 건강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시엘 님이 얼음꽃을 넉넉하게 보내 주셨거든요. 다행히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흡수가 훨씬 빨라서 경과가 더 좋습니다.”

“……그래.”

알렉시스는 루치를 친근하게 부르는 모양새에 심기가 불편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애써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요제프 신관. 자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군.”

“……예?”

“그동안 내 아내와 아이를 돌봐 주었지. 그 은혜는 원하는 대로 갚겠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이었으니까요.”

정중한 제안과 부드러운 거절이 오가는 두 사람의 말에는 모두 뼈가 느껴졌지만, 그들은 선을 넘지 않았다.

“받은 것을 돌려주는 일은 당연하지. 보답으로 델라포스에 돌아가도록 해 주겠네.”

알렉시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요제프는 멈칫하더니 망설이는 듯 보였다. 캐슬린은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저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요제프. 부디 거절하지 말아요.”

요제프는 누가 뭐래도 힘겨운 시간을 함께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저를 위해 했다는 걸 캐슬린은 잘 알았다. 그래서 더 고마웠고, 미안했다.

“……네. 그럼 그 보답, 감사히 받지요.”

요제프도 알렉시스가 내민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놓았다. 긴 시간 이어졌던 불신과 경계, 갈등과 의심이 비로소 녹아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요제프는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돌아섰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쉬십시오, 전하. 다음에 봐요, 켈리.”

그는 인사하고 침실을 나섰다. 이상할 것 없는 태도였지만 캐슬린은 곁을 스칠 때 본 그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알렉,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갔다 올게요.”

“그래. 얼른 가 봐.”

요제프의 인사가 마지막을 암시하고 있다는 걸 알렉시스도 아는 것 같았다. 캐슬린은 다급하게 문밖을 나섰다. 이미 그의 모습은 복도 끝에서도 사라지고 없었다.

“요제프!”

캐슬린은 계단참에서 막 내려가려는 그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소리쳐 불렀다. 빠르게 걸어가던 그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요제프, 잠깐 기다려요.”

치맛자락을 붙잡아 잡고 달려갔다. 요제프는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어린 채로 다가오는 캐슬린을 맞았다.

“이런. 따라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걱정스러운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섞여, 다짜고짜 따지듯 물어 버렸다.

“떠날 거라면 먼저 말은 해 주고 가야죠.”

“그럼 몰래 떠나는 의미가 없잖습니까.”

“요제프!”

“우선은 카르미네로 갈 겁니다. 출산을 기다리는 부부가 저를 필요로 하니까요. 하지만 그 후는…… 아직은 모르겠네요. 델라포스로 갈지, 북부의 신전 중 어디 한 곳으로 갈지.”

“그럼 여기에 조금만 더 함께 머물러도 괜찮아요. 그동안 지쳤을 텐데 바로 먼 길을 떠나는 건…….”

“아니요. 저는 떠날 겁니다.”

캐슬린은 안타까운 마음에 치맛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어떤 마음일지 짐작하지만, 동시에 걱정되어 붙잡고 싶었다.

“더 머무르면 욕심이 커질 것 같아서 그래요, 켈리.”

요제프가 부드럽게 말했다.

“가도록 해 주세요.”

“……미안해요.”

“오히려 용서를 빌어야 하는 건 저입니다. 그런데 사과를 받다뇨.”

“끝까지 숨기지 않았잖아요. 제일 중요한 순간에 사실을 말해 주었으니까 됐어요.”

캐슬린은 요제프를 이해했다. 저 역시 알렉시스에 대한 제 감정이 어떤지 확신하지 못했는데 요제프는 오죽할까.

그러니 탓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루치를 돌봐 주고 카시엘을 설득해 수비대를 보내도록 노력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더 컸다.

“당신은 늘 저를 작아지게 만들어요. 그래서 아직 전 수련이 더 필요한가 봅니다.”

요제프는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의 마음이 이루어졌으니, 전 그것으로 됐습니다.”

그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캐슬린의 손을 꼭 잡았다.

“진심이었습니다. 당신의 곁에 있겠다고 한 말 말이에요.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게 됐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제겐 허락되지 않았던 마음인데, 너무 큰 욕심을 부렸어요. 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요제프. 그래도 루치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씩은 찾아와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캐슬린의 간절한 부탁에 요제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행복해요, 켈리.”

그러고는 잡았던 손을 놓고 돌아섰다. 요제프는 서둘러 한 발짝씩 멀어져 계단을 내려갔다. 내내 준비라도 해 두었던 것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캐슬린.”

뒤따라온 알렉시스가 손을 잡아 왔다.

그는 다소 성마르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가 어딜 가든, 제국 안에서는 편하게 지내도록 일러둘 테니.”

알렉시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대공의 비호가 있다면 요제프가 신전에서 제적당하거나 징계를 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캐슬린.”

그가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네 친구도 행복하도록 내가 살필게. 그게 누구든 말이야.”

캐슬린은 그 말에 가슴이 먹먹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금빛 눈은 진심을 담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가 그를 원망하거나 거절할 것이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나 요제프만 행복하길 바라지 말아요.”

“응?”

“당신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제야 캐슬린을 마주 보는 알렉시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창문 유리에 비친 햇살이 부부의 어깨 위로 내리쬐어 아름답게 반짝였다. 다시 찾은,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행복을 반기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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