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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94)화 (94/110)
  • 94화

    “아…….”

    반사적으로 내려다본 손목을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주체할 수도 없이 울컥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알렉시스의 금안이 정확히 저를 향하고 있었다.

    “꿈……인가…….”

    알렉시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샅샅이 훑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렇게.

    “꿈이겠지……. 아니면 어떻게.”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캐슬린은 떨리는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꿈이 아니에요.”

    알렉시스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이해한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정적인 반응이었다.

    “난 죽지 않았어요.”

    손목을 붙잡은 손을 떼어 두 손으로 잡으면서, 캐슬린은 저도 모르게 흐느꼈다.

    “살아 있었어요…….”

    알렉시스의 시선이 다시 그녀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흩어졌다. 그녀가 붙잡은 손에서 힘이 풀리고,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알렉시스!”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심장이 제대로 뛰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맥은 제대로 뛰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하지만 그가 이대로 다시 눈을 뜨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캐슬린은 그의 몸을 흔들었다. 잠들었다면 다시 깨우고, 홀로 저승으로 떠나려는 거라면 붙잡아 오고 싶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흔드는 대로 움직이기만 할 뿐이었다.

    캐슬린은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알렉시스 발텐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누구든 확인해 주었으면 했다.

    ‘날 두고 떠나지 마요…….’

    캐슬린은 간절히 바라며 달려 나갔다.

    * * *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의도했으나 예상치 못한 죽음은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편안해졌다.

    화살을 맞은 순간, 심장에서부터 퍼져 나간 열기가 곧 익숙한 고통으로 변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남부의 울리크 장군이 독을 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차라리 잘됐어.’

    평범한 공격이었다면 누군가 저를 살려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독이라면 기존의 병증을 더 악화시켜서 완벽한 죽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암흑 속으로 빠져든 정신이 점차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끝이겠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사후의 세상에 도착할 것이다. 그곳이 천국일 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지옥은 아니었으면 했다. 앗은 목숨이 여럿이니 그만한 죗값은 치러야겠지만, 분명히 캐슬린은 그곳에 없을 테니까.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이유가 있다면, 캐슬린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먼발치에서나마 보아도 좋으니 그녀를 만나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다음 세상에서는 기회를 한 번만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그렇게 신에게 빌었을 때였다.

    심장이 펄떡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뜨거운 피가 돌다가 순식간에 차가워져 얼어붙었다. 살을 에는 듯한 시린 느낌이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면서 이내 다시 피를 데웠다. 겪은 적 없는 이상한 감각에 온몸이 들끓었다.

    ‘어떻게 된 거지?’

    흐릿해졌던 정신이 다시 선명하게 살아났다. 몸을 움직일 순 없었지만 생각만은 자유로웠다.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언제 이런 적이 있었나를 떠올려 보다 깨달았다. 처음 카르미네 산맥에 발을 들였을 때, 산사태가 일어나고 눈 속에 파묻혀 정신을 잃었을 동안 이랬던 것 같다.

    그때도 그녀를 떠올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지. 황후의 첩자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다가 눈을 떴더니 그녀가 제 품에 안겨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희망인 걸 알면서도 알렉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알렉시스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떴다.

    그러자 밝아진 시야가 펼쳐졌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마이어의 대공저, 그리고 제 침실이었다.

    제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에, 반복해서 오가던 열기와 냉기가 사라진 육체가 느껴졌다. 화살을 맞았을 때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이 묵직한 기분에 정신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잡고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 그녀가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정말로 있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발에 반짝이는 연한 푸른색 눈을 가진 그의 아내가.

    저를 보지 못한 듯 돌아서는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겁이 났다. 알렉시스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놀란 것처럼 저를 보는 얼굴이 황홀할 정도로 예뻤다.

    신이 제게 베푼 마지막 은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꿈……인가…….”

    이런 꿈을 선물로 주는 신이라면 지금껏 원망하고 가소롭게 여겼던 것이 죄스러워질 정도였다.

    저를 보고도 원망의 눈빛을 보내지 않고, 손을 뿌리치거나 도망치지 않는 캐슬린.

    “꿈이겠지……. 아니면 어떻게.”

    씁쓸했다. 제가 그녀를 의심하고 냉대하지만 않았다면 캐슬린과 저는 죽음을 사이에 둔 관계가 되지 않았을 텐데.

    “꿈이 아니에요. 난 죽지 않았어요.”

    수천, 수만 번을 듣고 싶었던 말이 귓가에 울렸지만 혼몽해지는 정신이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알렉시스!”

    시야가 점멸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알렉시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훨씬 맑은 정신으로 둘러보자 여전히 대공저의 침실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는 약병을 발견했다.

    “이건…….”

    약병에는 푸른빛을 띠는 불투명한 흰색 액체가 반쯤 담겨 있었다. 얼음꽃을 달여서 만든 약이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멍청하긴. 무슨 기대를 한 건가.’

    얼음꽃이 아니면 애초에 제 상태를 회복시킬 방법이 있을 리 없는데.

    왜 그때처럼 그녀가 저를 살렸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라일런트 자작이 어떻게든 구해 온 것을 에디스가 만들었겠지.’

    예전에 약을 마셨을 때와는 달리 몸이 한결 더 가뿐했지만, 캐슬린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알렉시스는 무거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상황이 어찌 되었는지 살펴봐야 했다. 남부에서 쓰러졌을 때 이끌고 갔던 군사들은 어찌 되었으며 반란군은 소탕했는지, 그리고 페터는 어찌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그리고 그것들보다 제일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은 루치였다. 그녀와 제 사이에서 낳은 아이.

    아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알렉시스는 발걸음을 빨리하며 침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크게 뜬 동그란 연청색 눈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쪽으로 가지런히 모아 리본으로 묶은 은색 머리칼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깼어요?”

    “…….”

    “몸은 어때요? 좀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다급한 손이 어깨와 가슴을 훑었다. 상처를 살피려는 듯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으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대공 전하?”

    문을 붙잡은 채로 멍청하니 서 있으니 캐슬린이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알렉시스는 감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무어라 말을 꺼내는 순간, 루치의 얼굴을 바꾸어 버렸던 깨진 거울 조각처럼 현실이 산산이 부서질까 두려웠다.

    “열은 없는데.”

    캐슬린이 까치발을 들어 이마를 짚더니 걱정스레 말했다.

    “이리 와 봐요.”

    봄바람처럼 가벼운 손길이었으나 알렉시스는 너무도 쉽게 딸려 갔다. 그녀는 그를 다시 침대에 앉히고 찬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알렉시스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컵을 비워 냈다.

    “……이상하다.”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캐슬린은 이번엔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 내밀었다. 이번에도 알렉시스는 그것을 단번에 비웠다.

    “약도 잘 먹었으니 별일 없을 거라고 그랬는데. 아직도 어디가 아파요?”

    “…….”

    “알렉?”

    분홍빛 입술이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알렉시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캐슬린의 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연약한 몸은 대번에 끌려왔다.

    “앗. 갑자기 이게 무슨…… 읍.”

    그녀를 무릎에 앉히자마자 턱을 붙잡고 입술을 맞추었다. 저를 예상하지 못하고 놀라 살짝 벌어진 틈을 침범하며 혀를 단번에 붙잡아 얽었다.

    어느덧 바르작거리던 그녀의 팔이 알렉시스의 목에 둘러졌다. 오가며 뒤섞이는 숨결에 점차 열기가 어렸다. 알렉시스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아내는 꿈이 아니었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현실이었다.

    “캐슬린.”

    입술을 떼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쓸면서 알렉시스는 아내의 이름을 발음했다.

    “정말 네가 맞아?”

    “……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캐슬린이 분명히 말했다.

    사과처럼 붉은 뺨과 가을 하늘처럼 맑은 눈이 보였다. 알렉시스는 믿기지 않아 계속해서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네가 어떻게…….”

    “꿈이 아니에요.”

    캐슬린이 그의 손을 붙잡아 내리며 힘을 주어 말했다. 알렉시스는 그토록 바랐던 소원을 현실이라 말해주는 음성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캐슬린을 으스러질 정도로 꼭 껴안았다.

    “가지 마, 이젠.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목이 메어 더는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알렉시스 발텐은 여섯 살의 알렉으로 돌아간 것처럼 떠나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안 가요. 있을게요, 당신 곁에.”

    캐슬린은 화답하듯 그를 마주 안아 주며, 알렉시스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다시 다가온 입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방금처럼 조급하지 않았다. 서로를 서로에게 오롯이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짙은 입맞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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