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남부에서 전투 중 독이 묻은 화살을 맞고 쓰러진 알렉시스는 쭉 중태에 빠져 있었다. 현지에서 의사를 찾아 응급조치를 했지만, 처방이 효과가 없어 결국 마이어까지 데려와 치료했음에도 차도는 없었다.
‘갑옷도 챙겨 입지 않았다고 했어.’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실수했을 리 없으니, 어쩌면 지금 이리 눈을 뜨지 않는 것도 본인의 의지일지 모른다.
캐슬린은 커튼 너머로 해가 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로 허망하게 앉아 그의 얼굴만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켈리.”
그때 침실 문이 열리며 카시엘이 들어왔다.
“외숙부님, 오셨어요?”
“그래. 상태는 어떠냐?”
그가 굳은 낯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캐슬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카시엘은 가만히 알렉시스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나는 이만 돌아가려고 한다.”
“벌써요?”
예상치 못한 발언에 캐슬린이 놀라 물었다.
“북부에서 내려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는데 좀 더 머무르지 않으시고요.”
“원래부터 네 부탁을 들어주러 온 거였으니 이젠 갈 때가 됐지. 카르미네를 오래 비워 둘 수도 없고 말이다.”
애초에 그녀가 외숙부에게 부탁한 내용은 알렉시스에게 지원군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황실의 군마를 달려 되돌아가자, 카시엘은 그녀의 품에 안긴 루치를 보고서 말을 잇지 못했다. 굳이 설명도 필요 없었다. 우스문트 직계의 상징을 그대로 물려받은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외숙부에게 캐슬린은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죽음을 목표로 전장에 나섰다고.
뒤따른 요제프가 남부의 진군을 막지 못하면 마이어를 넘어 북부까지 전쟁의 화가 미칠 것이 분명하니, 수비대를 일부라도 보내자고 설득했다.
다소 갑작스러운 부탁인 데다가 제국에 대한 반감이 강한 상태인 카시엘이 받아 주지 않을 거라고 여겨 어렵게 꺼낸 말이었지만, 뜻밖에 그는 부탁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바로 수비대를 이끌고 내려가, 알렉시스를 구해 마이어로 돌아왔다.
“언제 돌아올 생각이니?”
카시엘의 말에 캐슬린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망설이는 조카의 모습을 본 그는 짐작했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요하지 않을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네…… 죄송해요, 외숙부님. 쉬운 결정은 아니셨을 텐데, 제가 부담을 드렸어요.”
“아니다. 이번 출정에서 우리도 깨달은 것이 있으니까.”
카시엘은 무언가를 내보였다. 황실의 문양이 찍힌 편지였다.
“황제가 주고 가더구나. 우스문트와 대화해 보고 싶다고.”
“페터…… 아니, 폐하께서요?”
“그래. 북부의 백성들과는 직접 대화해 볼 생각을 하지 못한 것도 사과했다. 남부에 신경을 썼던 만큼 북부도 살폈어야 하는데 너무 늦었다고 하더구나.”
카시엘은 제국의 황제가 호의적인 것에 대해 복잡한 심경인 듯했다. 겨울 요정족을 카르미네로 몰아내고 여성들을 멋대로 납치해 간 귀족들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으니 말이다.
“제 가족을 구해 주었으니 그러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카시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아들, 루치아노라고 했지. 그 아이는 카르미네로 데려와 기르는 편이 낫겠다.”
“……루치를, 받아 주실 생각이세요?”
“아무렴. 네 아이인데 내가 잘못 생각했어. 우스문트의 핏줄을 이은 게 분명한 외양인데 이곳에서 자라도록 할 수는 없지 않겠니.”
어차피 알렉시스가 살아날 가능성은 요원해 보였다. 그가 죽게 되면 황족인 루치는 황궁으로 들어가겠지. 그러기 전에 데리고 가는 편이 당연할 것이다.
캐슬린이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외숙부님.”
“감사 인사라니, 그만두렴. 그런데 켈리.”
카시엘이 망설이는 듯하다 가만히 물었다.
“너는 발텐 대공이 어떻게 되길 바라느냐?”
“네?”
“죽길 바란다면 이대로 두어도 될 것이다. 그럼 네가 아이를 더 쉽게 데려올 수 있겠지. 이대로 대공과의 악연도 끊어질 것이고. 하지만 그가 죽지 않기를 원한다면 네 능력으로 그를 살릴 수 있다.”
“제…… 능력이요?”
“그래. 율리아나와 같이 네가 가진 능력 말이다.”
그는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처음 카르미네에 왔을 때의 능력이라면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가능할 것이다. 넌 율리아나처럼 그 어떤 영역도 세심하게 통제해서 물체를 냉각할 수 있잖니. 들어 보니 대공의 혈관에 퍼진 독을 없애면 살 수 있을 것 같더구나.”
“그렇군요…….”
캐슬린은 외숙부의 말을 이해하고 멍하니 대답했다.
한때는 살아 있는 것의 온기를 빼앗아 싸늘하게 얼리는 저주라고 불렸던 능력. 그 힘이 알렉시스를 살릴 수 있다니.
“약제사 에디스라는 여자에게 들으니, 이전에 카르미네에서 얼음꽃을 구해서 약을 만든 적도 있다던데. 얼음꽃 군락지야 찾기 어렵지 않지. 그게 필요하다면 당장 내일 가져다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발텐 대공을 살리고 나면 그다음은 어쩌려느냐?”
그다음?
그가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분명했지만, 이전처럼 새장에 갇혀 살고 싶진 않았다. 루치를 그에게 남겨 두고 다시 떠날 생각도 없었다.
“잘 생각해 보렴. 네게 어떤 대답을 강요하진 않겠다. 다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길 바란다.”
카시엘은 부드럽게 캐슬린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침실을 나섰다.
캐슬린은 복잡한 마음으로 침대 가까이 놓인 의자에 앉았다. 알렉시스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찬찬히 제 마음을 돌아보았다.
요제프의 말을 들은 직후에도 사실은 서럽고 원망하는 마음이 컸지만, 정신을 잃은 채로 이송된 알렉시스를 보자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유언장을 이미 보았는데도 그가 죽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었다. 아니…… 사실은 믿고 싶지 않았다.
캐슬린의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저에게 그는,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한쪽으로 분명히 결정지어지는 순간이었다.
커튼 너머에 가려진 창은 별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그믐날이었다.
캐슬린이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앉자, 알렉시스의 입술이 약간 벌어지더니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발텐 공작이었던 남편이 늘 그믐이면 저택을 비웠던 것을 기억해냈다.
‘어쩌면 그믐날에 독이 더 활성화되는 걸지도 몰라.’
그렇다면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오늘이 가장 최적의 날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알렉시스의 상의를 헤쳤다. 이전에는 전장에서 입었던 상처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치유력 덕에 말끔해진 가슴이 드러났다. 캐슬린은 심장이 있을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늘 의심과 긴장 속에 살았던 만큼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키웠던 육체는 강인했다. 단단하게 짜인 근육 너머로 힘찬 펄떡임이 느껴졌다. 독을 품은 피를 온몸으로 내뿜고 다시 거두어들이고 있을 심장의 움직임이.
“……할 수 있어.”
캐슬린은 주문을 외우듯 작게 되뇌었다.
어머니의 기록을 자세히 읽고 비슷한 경우를 여러 번 연습해 봤다. 이파리가 붙은 식물을 땅 아래에 묻고 잎맥의 일부분을 얼린 것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식물과 사람은 다르지만 원리 자체는 같으니 시도해 볼 만했다.
‘남부 전갈의 독은 빙결의 성질을 만나면 소멸한다고 했어.’
그래서 얼음꽃을 약으로 썼을 것이다.
캐슬린은 알렉시스의 심장에 두 손을 얹으며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 아래서 서늘한 기운이 천천히 퍼져 나갔다. 혈관에 스며들었을 얼음은 살갗 표면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으나, 힘차게 뛰고 있던 심장의 박동은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독이 섞인 피를 얼렸다가 다시 되돌리면 돼.’
잘못하면 심장이 영원히 잠들게 될지도 몰랐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좀 더 팔과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어디가 경련하지는 않는지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때 평온하게 누워 있던 알렉시스의 몸이 경련하며 상체가 꿈틀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지금보다 더 격렬하게 움직였다가 얼어 있는 혈관이 부서진다면 다른 병이 생길지도 몰랐다. 아직 심장에서 손을 떼면 안 되는 상태여서, 캐슬린은 급한 마음에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 알렉시스의 몸을 타고 앉았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경련이 멎었다.
캐슬린은 천천히 빙결의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잠시 창백해졌던 얼굴에 핏기가 돌며 다시 이전처럼 돌아왔다.
‘성공한 걸까?’
캐슬린은 그의 몸에서 내려오며 심장의 박동을 확인했다. 다시 속도를 되찾은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상체의 구석구석에도 온기가 돌고 있었으며 숨소리도 한결 편안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캐슬린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가 눈 뜨기를 기다렸다.
어두웠던 밤하늘에 조금씩 새벽빛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렉시스의 금안이 쉽사리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이젠 캐슬린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어딜 잘못 건드린 건 아닐까?’
의학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직 수련도 완벽하게 끝내지 못한 빙결 능력으로 병을 고쳐 보겠다고 그에게 다른 아픔을 준 거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캐슬린은 억지로 저를 다잡았다.
‘외숙부님이 말씀해 주신 방법이니 아예 차도가 없지는 않을 거야.’
다는 아니라 해도, 남부 전갈의 독을 치료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캐슬린은 요제프나 에디스를 불러올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이기는 하지만 아마 둘 중 하나는 깨어 있을 테니 진료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막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손목이 강한 힘에 붙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