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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92)화 (92/110)
  • 92화

    휘하의 군사들이 뒤따르기도 전에 알렉시스는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장검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병사들이 제대로 검을 맞대 보지도 못한 채 낙엽처럼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호프웰 백작을 보호하려 둘러싼 병사들의 목이 하나둘씩 베여 나갔다. 어느새 알렉시스는 호프웰 백작의 앞에 서서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힘겨루기에서 밀려난 탓에 검을 놓치며 손목이 꺾였던 호프웰 백작은, 제대로 방어조차 하지 못한 채 뒷걸음질 치며 얼굴이 희게 질렸다.

    “대, 대공. 잠시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우리끼리 반목할 것이 아니라 협력하면……!”

    항복이라도 하려는 듯 두 손을 올리고 빠르게 말을 주워섬기던 그의 가슴에 알렉시스의 검이 꽂혔다. 호프웰 백작이 입가에서 검붉은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커헉…….”

    천천히 그의 몸이 땅에 쓰러졌다. 허망하게 쓰러지는 호프웰 백작의 모습에 좌중이 경악하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동요하지 마라! 방어 태세를 갖춰!”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울리크 장군이 황급히 부하에게서 검을 건네받으며 대열을 정비하려 애썼으나, 이미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통제하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다.

    “저, 저기 발텐 대공이다!”

    “호프웰 백작께서 전사하셨어!”

    멀리서 제국군을 맞아 싸우던 병사 중 하나가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연단으로 쏠렸다. 멀리서 몰려오는 제국군의 수장이 이미 아군의 중심부에 파고들어 수장 중 한 명을 죽였다는 사실에 공포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

    “도망치는 놈은 가만두지 않겠다! 남부의 영광을 포기하려느냐?”

    울리크 장군의 발악에 병사들이 차츰 정신을 차리고 창과 검을 고쳐 쥐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알렉시스는 호프웰 백작의 심장을 찌른 검을 다시 빼내었다. 그리고 제국군이 근접하기도 전에 다시 적진의 한가운데로 달려들었다.

    ‘목숨이 열 개는 되는 줄 아는 건가?’

    셴베르크 백작은 결박당한 채로 이리저리 밀쳐지면서도 황당한 눈으로 알렉시스 발텐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제 판단은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저에게 맞설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아는 듯이 갑옷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짚단이나 나무를 베는 듯이 피가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낯으로 무참히 검을 휘둘렀다. 검날이 번쩍일 때마다 병사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전장의 사신이라는 말이 진정이었군.’

    부친의 뒤를 이어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병사들이 이리 쉽게 무너지다니 허탈했다. 무모할 정도로 날뛰는 알렉시스가 대열을 무너뜨리며 중심부터 균열을 일으켰고, 남부연맹의 병사들은 더욱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발텐 대공이라는 말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는 이들도 많았다. 전투가 끝나기도 전이었으나 승패는 자명해 보였다.

    제국군은 코앞까지 당도했다. 그들은 연단 주위를 까맣게 둘러싸는 중이었다.

    “큭…….”

    마이어로 진군도 하기 전에 너무도 쉽게 실패를 맞이한 울리크 장군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셴베르크 백작을 밀치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활을 주워 어딘가로 겨눴다. 셴베르크 백작은 그의 화살이 향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는 알렉시스 발텐이 있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갑옷도 없이 적진의 한가운데를 누비던 사령관의 가슴에 꽂혔다.

    “대공 전하!”

    무장한 기사들이 달려 나갔다. 알렉시스는 휘청하는가 싶더니 손에 쥔 검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미 그의 무릎은 무너지고 있었다.

    “흐흐…… 역시 전장의 사신도 독에는 별수 없군.”

    쓰러지는 발텐 대공을 본 울리크 장군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연단 위로 뛰어 올라온 기사 몇이 그의 목숨을 앗았다.

    그러나 사령관이 쓰러졌음을 안 제국군이 술렁이기 시작한 틈을 타, 능선 너머에 남아 있던 남부연맹의 마지막 병사들 수십이 연단 쪽으로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아래쪽의 알렉시스와 위쪽에 서 있던 셴베르크 백작은 순식간에 그들에게 둘러싸였다.

    “후방 부대는 언제 옵니까? 황군 말입니다!”

    발텐 가의 기사 중 하나가 재갈을 풀어 주자마자 방어를 위해 내려가려는 것을 붙들고 셴베르크 백작이 다급히 물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출전한 것은 발텐 가의 군사가 다요.”

    “그럴 리가요!”

    “빠른 출전을 위해 대공 전하께서 그러시길 원했소. 황제 폐하께서 후방 부대를 따로 편성하셨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오.”

    기사는 서둘러 몰려오는 병사를 상대하러 연단을 내려갔다. 셴베르크 백작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고 그를 따라갔다.

    “대공 전하!”

    가까이 가서 본 알렉시스 발텐의 낯이 파리했다. 독이 이미 퍼진 듯했다.

    “정신 잃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지원군을 보내셨을 테니 그때까지만 정신을 차리고 계세요.”

    전장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죽으려는 생각이 아니고서야 왜 갑옷을 입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셴베르크 백작은 그의 상태를 살피며 가슴에 꽂힌 화살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려 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손을 뻗어 그 화살을 뽑아 버렸다.

    “대공 전하!”

    “전하! 안 됩니다!”

    셴베르크 백작과 기사단장이 놀라 소리치는데도 알렉시스만은 평온했다. 그는 가물거리는 정신에도 생각했다.

    ‘……이제 캐슬린에게 갈 때인가.’

    그의 눈꺼풀이 점점 느리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기사단장이 애타게 외침과 동시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부연맹의 병사들이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전세는 이미 제국군에 기울었으나 사령관인 알렉시스가 포위당했으니 사태가 뒤바뀔 수도 있었다.

    “아군이 올 때까지만 버텨 봅시다.”

    셴베르크 백작은 검을 들고 일어섰다. 제가 뱉은 말이 무슨 뜻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그에게 아군은 남부가 아닌 마이어의 군사를 의미하게 되어 버렸다.

    “좋소.”

    기사단장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와 등을 맞댔다. 한때는 셴베르크 재건의 기반이 되어 주리라 믿었던 이들을 제 손으로 베어 넘기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뿔 나팔 소리가 들리더니, 흰옷을 입은 군사들이 남부연맹의 병사들 뒤편으로 밀어닥쳤다.

    “지원군입니다!”

    누군가 소리쳤다. 셴베르크 백작은 포위를 뚫고 오는 이들의 몇몇이 은발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제국군을 도와 순식간에 다시 남부연맹의 병사를 격퇴하는 이들의 기세는 거침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남부연맹의 병사들을 모두 베어 넘기고, 선두에서 지원군을 지휘하던 이가 피가 흐르는 검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너머의 알렉시스를 살피더니 물어 왔다.

    “죽었나?”

    “아닙니다. 하지만 독이 묻은 화살을 맞았습니다.”

    셴베르크 백작이 답하자 푸른 눈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기사단장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물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카시엘 우스문트.”

    짧게 답한 그가 알렉시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덧붙여 말했다.

    “대공을 일으키시오. 마이어로 데려가지 않으면 곧 죽을 테니.”

    * * *

    “상처 자체는 깊지 않은데,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문제네요.”

    카벨 선생에 이어 진찰을 시작했던 에디스가 물러나며 말했다.

    “아무리 살펴도 처음 보는 독이라, 해독약을 당장 제조하기는 어려울 듯해요.”

    “제가 살펴보지요.”

    요제프가 침대에 누운 알렉시스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의 손에서 치유의 힘이 깃든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자 화살에 맞은 상처에 순식간에 새 살갗이 돋아나며 말끔히 나았다. 드러난 상체에 입은 부상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알렉시스의 눈은 뜨이질 않았다. 요제프는 몇 번 시도하다가 고개를 젓고 물러났다. 에디스가 다시 다가가 몇 가지를 살피더니 어두워진 낯으로 말했다.

    “두 가지 종류의 독이 섞이면서 오히려 남부 전갈의 독이 더 활성화된 것 같아요. 신관의 치유력으로도 차도가 보이지 않으니, 시간을 갖고 지켜보는 편이 낫겠어요.”

    멀찍이 물러나 있던 캐슬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언제나 당당하게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곤 하던 남자가 저리 죽은 듯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것이.

    - 마치 죽으려고 작정하신 것 같았습니다. 휘하 군사들이 따르기도 전에 홀로 적진에 뛰어드셨으니까요.

    외숙부님과 함께 이미 정신을 잃은 알렉시스를 호송해 데려온 셴베르크 백작의 증언은 캐슬린의 예상과 들어맞았다. 그는 정말로 죽을 생각이었다. 페터가 여자로 의심받고 있는 상태에서 황군을 움직여 후방을 지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홀로 남부로 내려갔으니.

    낯빛이 희게 질린 캐슬린의 시선이 알렉시스에게 꽂혀 있는 것을 보던 페터가 입을 뗐다.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지. 특히 요제프 자넨 카르미네를 오가느라 힘들었을 테니 가서 쉬게.”

    페터는 카벨 선생과 에디스, 요제프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자신도 침실 문을 나서려다 뒤돌아 캐슬린에게 다가왔다.

    “캐슬린.”

    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낯빛이 안 좋아요.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캐슬린도 가서 쉬도록 해요.”

    “전 괜찮아요.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형님은 깨어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두 손을 잡아오는 페터는 그녀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그 말 역시 스스로 위안을 찾고자 하는 위로에 불과했다. 벌써 며칠째 황궁의와 여러 의료진들이 달라붙어 그를 치료했으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캐슬린. 만약, 만약 말이에요. 염치없는 말이지만, 형님이 눈을 뜨게 된다면…….”

    페터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말했다.

    “그때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잘 가라는 말을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요.”

    서글픈 미소를 짓는 페터의 금안이 젖어 있었다.

    “황궁의가 말하길 완치는 어려울 거라고 하더군요. 에디스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독이 기존의 독과 합쳐지면서 병증을 악화시켰어요. 지금껏 형님이 치료하여 중화시켰던 남부 전갈의 독이 다시 혈관에서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눈을 뜨게 되면…… 그게 마지막일 거예요. 그 순간만큼은 부디 편안하게 보내 주었으면 합니다.”

    페터의 말을 이해한 순간 숨이 막혔다.

    “부탁합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페터가 간절하게 말하고 침실을 나갔다.

    마지막.

    알렉시스 발텐의 마지막…….

    몇 번이고 페터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던 캐슬린이 뒤돌아 침대에 누운 알렉시스에게 다가갔다.

    ‘왜 당신이 죽어?’

    캐슬린은 멍하니 그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오해했던 거라면 반박했어야지. 원망하거나 증오하기라도 하면서 살아야지…… 왜 그렇게 쉽게 죽을 생각을 하냔 말이야.’

    루치가 제 아들이란 것도 알았으면서 대체 왜.

    대답이 들려올 리 없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는 캐슬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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