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91)화 (91/110)
  • 91화

    알렉시스 발텐의 죽음이라니. 현실감이 없었다.

    ‘그가 죽을 리 없어.’

    캐슬린은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호프웰 백작의 군사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대공의 사병과 황제의 군사를 합치면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유언장은 그저 어깃장일지도 모른다. 저를 재단하고 이용했던 것처럼, 이번 반란 진압도 그에게는 어떤 기회일지도 모른다. 궁정 회의의 구성원이든, 페터든, 아니면 그 어떤 누구에게든…….

    “가요.”

    캐슬린은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겨우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일 것이 분명한 유언장도 다시 에밀리에게 돌려줬다.

    “정말 갈 수 있겠어요, 켈리?”

    그런데 저를 향해 돌아선 캐슬린을 보면서 요제프가 되물었다. 그는 한 번도 그녀가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전 당신이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아뇨. 후회 안 해요. 죽음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되지 않으니까.”

    “그 말이 진심이라고 믿어 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요제프는 몇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루치를 에밀리에게 넘겨주고 심호흡하더니 말했다.

    “사실은 발텐 대공이 이곳에서 절 쫓아냈을 때 한 말이 있었어요.”

    “……무슨 말인데요?”

    “겨울 요정족을 찾아서 다시 오라는 거였어요. 제가 그들을 찾아내고 돌아온다면 당신의 곁에 머무르게 해 주겠다고 했죠.”

    “…….”

    “그땐 그게 절 쫓아낼 핑계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신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마이어를 떠나면서 다짐했어요. 정말 그의 말대로 겨울 요정족을 찾아 다시 돌아오자고. 그럼 어쩔 수 없이 제 말을 지키겠지. 안 지킨다 해도 겨울 요정족들이 도와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카르미네로 다시 떠났어요.”

    그리고 요제프는 발치에 내려 두었던 종이봉투를 들고 와 거꾸로 쏟아부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마정석이 와르르 쏟아졌다. 캐슬린은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제 능력을 묶어 두기 위해 주변에 설치해 두었던 것들이었다.

    “이건……?”

    “발텐 대공이 보낸 거예요. 겨울 요정족을 찾으라고.”

    “그게, 무슨 소리죠?”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제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요제프에게는 다른 말을 했다니.

    “능력에 오래 노출되었던 마정석을 가지고 있으면 동족은 그 기척을 느낄 수 있다는군요. 그가 보낸 마정석은 제가 이미 카시엘 님을 만난 후에 도착해서 소용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요. 내게 겨울 요정족을 찾으라고 한 것 말이에요.”

    “…….”

    “카르미네에서 카시엘 님을 만난 곳을 알려 준 것도 그였어요.”

    심장이 쿵쾅거리며 불안정하게 뛰었다. 머릿속에 어지럽게 의문만 떠돌았다.

    요제프를 극도로 싫어하고 경계하면서, 내가 이곳에 갇힌 채 머무르길 바라 놓고.

    왜 그가 돌아올 길을 만들어 주고 제가 떠날 문을 열어 두었을까.

    “역시나 제가 생각했던 얼굴을 하고 있네요.”

    요제프가 흐릿하게 웃었다.

    “이래서 숨기고 싶었어요. ……한 번은 욕심을 부려 보고 싶어서. 그런데 지금은 또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켈리가 평생 후회하길 바라진 않으니까요.”

    그는 에밀리에게서 유언장을 다시 받아 캐슬린에게 돌려주었다.

    “미안해요. 이제야 말해서.”

    요제프의 사과와 함께 알렉시스가 했던 말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 이젠 너를 믿으니까. 그자를 해하려 하지도 않고 널 만나려는 것도 막지 않겠다.

    캐슬린은 숨을 헐떡이면서 찬찬히 시간을 되짚어 봤다.

    거짓말로 저를 속여넘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게 그 말을 했을 때, 이미 알렉시스는 요제프에게 겨울 요정족을 찾아 돌아오면 제 곁에 머무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였다.

    “켈리!”

    캐슬린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정말 죽을 생각이구나.’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알렉시스 발텐이 작성한 유언장은 진심이었다. 그토록 괴로웠던 전장으로 다시 돌아가 최후를 맞기로 결심한 거다.

    “……안 돼.”

    저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를 죽게 둘 순 없다. 이대로 어리석게 생을 마감하게 둘 순 없었다.

    “폐하께 가요.”

    요제프가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함께 가 주겠습니다.”

    그녀의 선택이 제가 아님을 안 요제프는 차라리 후련한 모습이었다. 캐슬린은 혼란스러운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하면서 볼 안쪽의 연한 살을 짓씹었다.

    페터는 그의 결심을 돌릴 수 없다. 반란의 명분부터가 황제의 자격 미달이었고, 유언장의 수신자가 작성자의 뜻을 몰랐을 리 없으니. 그런데도 출정했다는 건 페터가 막을 힘이 없단 이야기였다.

    캐슬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요제프. 전 카르미네로 가야겠어요.”

    “네?”

    요제프뿐 아니라 에밀리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는 와중에도 루치는 해맑게 웃으며 작은 손을 뻗어 울고 있는 에밀리의 뺨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알렉시스 발텐의 모습이 겹쳤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덕분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최대한 빨리 도착하려면 황궁에 사람을 보내 군마를 요청해야겠어요. 그다음에 카르미네로 가요.”

    지금쯤이면 이미 알렉시스는 남부에 도착해 전투를 시작했을 것이다. 선봉에 선 그에게 소식이 닿기엔 이미 늦었다. 그렇다면 그의 선택이 실패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외숙부님을 뵈어야겠어요.”

    이빨을 드러낸 맹수 앞에서 검을 내던진 채, 기꺼이 몸을 던질 각오를 한 알렉시스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제국 사람이 아니었다.

    제발, 늦지 않기를.

    속으로 그리 되뇌며 캐슬린은 돌아서 달렸다.

    * * *

    “백작님.”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고 있던 셴베르크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반색하며 돌아보았다.

    “그래, 울리크 장군은 어디 있지?”

    “장군님께서 백작님을 만나실 의향이 없다고 하십니다.”

    “……뭐?”

    “돌아가십시오.”

    남부연맹의 총지휘관, 울리크 장군의 수하는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지금 날 불청객 취급하는 것이냐?”

    기가 찬 셴베르크 백작이 싸늘하게 물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지그시 화를 참으려 애썼다.

    ‘여기서 일을 그르칠 순 없다.’

    황궁으로 들어가며 군사의 지휘 체계와 셴베르크 부흥책 설계를 모두 울리크에게 맡겼다. 남부에 계속 머무를 자가 이끄는 것이 더 적합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가 잠시 관심을 두지 못한 사이 다른 자와 손을 잡다니.

    “비켜라. 내가 울리크 장군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볼 것이다.”

    “안 되십니다.”

    “남부연맹이 모두 궤멸하는 꼴을 보고 싶은가!”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수하가 움찔했다. 셴베르크 백작은 그가 막고 있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성 밖의 야트막한 산맥 중턱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달리자, 병사들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셴베르크 왕조의 재건을 위해 키워 온 군사들이었다.

    ‘어느새 호프웰 백작과 울리크 장군의 야욕을 채울 도구가 되었군.’

    셴베르크 백작은 입술 끝을 비틀며 연단 위에 올라선 울리크 장군에게 다가갔다.

    “당장 멈추시오!”

    “이게 누구십니까. 백작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

    짐짓 놀란 체하며 돌아보는 울리크 장군은 제가 여기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옆에 섰던 호프웰 백작도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군, 셴베르크 백작. 폐하의 부관께서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는데.”

    “울리크 장군, 당장 그만둬야 하오. 이런 반란은 부흥책이 될 수 없소.”

    셴베르크 백작은 호프웰 백작을 무시한 채 울리크 장군에게 말했다.

    “제국 귀족과 손을 잡으면 남부연맹은 셴베르크 왕조가 아닌 제국의 일부로 흡수될 수밖에 없소. 그걸 왜 모르는 거요?”

    “아아, 고귀하신 왕족께서는 역시 그리 여기시겠지요.”

    울리크 장군이 미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백작님의 뜻 또한 셴베르크를 위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이리한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남부연맹은 옛 셴베르크 출신 백성들을 제국의 핍박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조직한 동맹이오! 난 남부 백성들이 지고 있는 조세의 부당함을 혁파하고 자치 기구를 세울 힘을 얻고자 군사를 키웠소. 그런데 장군이 지금 그걸 배신하겠다는 거요?”

    “이미 멸망한 나라의 백성을 위해 봤자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백작께서도 그래서 황제의 부관으로 들어가신 거 아닙니까?”

    “울리크 장군!”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함께하시지요. 백성들 보기에도 황제의 부관보다야 반란군의 책사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울리크 장군의 말이 끝나자, 호프웰 백작이 기사들에게 손짓해 셴베르크 백작을 붙들게 했다.

    “읍!”

    그들은 천으로 셴베르크 백작의 입을 막고 뒤에서 손목을 묶었다. 울리크 장군은 그를 옆에 세우고 병사에게 소리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황제의 부관인 셴베르크 백작께서 합류하셨다. 우리는 곧 신성한 전투의 후방으로 출격한다!”

    “와아아아!”

    공터를 뒤흔드는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리 붙잡혀서는 안 되는데…….’

    차라리 오지 말 것을 그랬다. 무엇보다 명분이 중요한 전투에서 황제의 부관이 배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마이어에서 보낸 군사는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부연맹의 군사를 설득할 수 있다고 여겨 무작정 내려온 것이 후회되었다. 셴베르크 백작의 고개가 무겁게 떨구어졌다.

    “으헉!”

    그때 별안간 병사 한 명이 화살을 맞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기, 기습이다!”

    “방어! 방어 진형을 꾸려라!”

    사방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하자 대열이 흐트러지며 분열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군사의 심장부에서 당한 습격에 울리크 장군과 호프웰 백작도 당황한 듯했다. 전선에 나서기도 전이라 퇴각을 명할 수도 없기에 더욱 그랬다.

    “침착하라! 습격은 소규모 부대일 테니, 우리 대군이 막아 내지 못할 바가 아니다!”

    울리크 장군이 목소리를 높이던 순간, 낮은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며 언덕을 뒤덮는 검은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장군. 발텐 대공입니다!”

    연단 위로 올라온 기사가 허둥지둥 고했다.

    “아군이 섬멸당했습니다! 발텐 대공이 이끄는 군사가 전방을 무너뜨리자마자 이곳으로 방향을 틀어 전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자가 이곳을 어떻게 안단 말이냐? 요새의 입구는 극비인데, 아무리 아군을 무찔렀다 해도 이리 빨리……!”

    호프웰 백작이 목소리를 높이다 말고 말을 멈췄다. 셴베르크 백작을 돌아보는 눈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네놈이 꼬리를 달고 왔구나!”

    그가 분노에 휩싸여 울리크 장군의 검을 빼앗아 달려들었다. 셴베르크 백작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막 셴베르크 백작에게 가까워지기도 전, 검끼리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더니 호프웰 백작이 휘청하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으윽!”

    셴베르크 백작은 시야에 들어차는 검붉은 망토에 눈을 크게 떴다.

    ‘발텐 대공?’

    알렉시스 발텐은 그를 잠깐 돌아보더니, 흐트러진 검을 고쳐 쥐고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두었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홀로 남부연맹의 군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