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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90)화 (90/110)
  • 90화

    마이어에 도착하고 사흘째 되는 날 요제프와 캐슬린은 대공저로 숨어들었다. 이미 발텐 대공이 손수 사병을 이끌고 출병한 이후여서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불안했으나, 그만큼 수비 인력이 줄어들어 저택의 경계는 덜했다.

    캐슬린은 공작가의 주방 하녀였을 때 드나들었던 샛길로 향했다. 부식품을 운반하는 사용인처럼 꾸며 저택으로 들어온 다음, 동쪽의 담벼락에 뒤덮인 담쟁이덩굴을 들쳤다. 그러자 작은 문이 드러났다.

    “이쪽으로 들어가면 돼요.”

    캐슬린이 속삭이며 앞장섰다. 요제프는 종이봉투를 들고 뒤를 한번 살펴본 후, 그녀를 따라왔다.

    길게 이어진 길은 복잡했으나,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어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캐슬린은 눈에 익은 광경이 드러날수록 더욱 숨을 죽였다.

    그들의 초조한 기분과 달리 하얀 새털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요제프와 함께 정원과 별관, 본관의 1층을 둘러보았으나 루치는 보이지 않았다. 요제프가 초조해진 얼굴로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흩어져서 찾아봐요, 켈리. 오늘은 반드시 카르미네로 돌아가야 합니다.”

    “알았어요. 점심이 되기 전에 아까 그 출입구에서 만나요.”

    그와 헤어진 후, 루치가 지금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캐슬린은 정원 한구석에 로브를 벗어 치우고, 최대한 하녀처럼 보이려 애쓰면서 자연스럽게 머리를 늘어뜨려 얼굴을 가렸다.

    조심스럽게 본관에 들어섰는데 사용인들이 거의 없었다. 주인이 없다 보니 바쁘게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발걸음을 재촉해 막 3층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이의 방은 살짝 문이 열려 있었고 그 틈에서는 즐거운 듯 소리 높여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이다.’

    캐슬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루치는 비밀을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은 세 살이니 아이가 제 얼굴에 대해 의문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하루하루가 초조했다. 그런데 아직 이렇게 발텐 가의 도련님으로 잘 있는 걸 보니, 원래 얼굴로 돌아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공자님, 잠시만 에밀리랑 계세요. 그네 탈 준비가 다 되었나 확인하고 올게요.”

    그때 유모가 방에서 나왔다. 캐슬린은 재빨리 벽 모퉁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이 다소 급해 보였다. 돌아오기 전에 아이를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캐슬린은 발소리를 죽여 아이의 방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넌 누구지?”

    루치와 함께 있던 에밀리가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경계심 어린 태도로 일어나며 물었다.

    “공자님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 했을 텐데?”

    “신입 하녀입니다. 유모님이 공자님을 모셔 오라고 하셔서요.”

    “그럴 리 없어. 주인님께선 유모님과 나 외에 누구도 공자님께 접근하지 말라셨다.”

    알렉시스가 그렇게까지 해 두었을 줄은 몰랐다.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 것 같기는 해도 과잉보호까지는 한 적 없었는데.

    캐슬린은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궁리하며 아기 의자에 앉아 있는 루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본 아들과 눈을 마주하고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충격에 휩싸였다.

    ‘얼굴이 달라졌어.’

    낯설지만 익숙했다. 은색으로 빛나고 푸르게 반짝이는 눈은 그대로인데, 얼굴은 반년 전 제 품에서 잠들던 아이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입매와 갸름해진 턱. 콧날과 이마의 모양새는 오솔레 마을에서의 루치였다.

    ‘왜?’

    에밀리의 기색을 살폈지만, 그녀는 저를 향한 경계심만 내보이고 있을 뿐이지 루치의 얼굴에 대한 놀라움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미 얼굴이 드러난 지 오래되었다는 이야긴데.

    ‘……루치가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변하지 않았어?’

    제 피를 이은 아이는 원하지 않으면서, 질투심과 소유욕 때문에 다른 남자의 자식이 제 자식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던 남자였다. 그러면서 선황후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도구로 여겼던 그였다.

    그런데 제가 사라진 이후, 자신의 얼굴을 빼다 박은 아이를 그대로 가까이하고 있을 줄은.

    못박인 듯 그 자리에 서 있는 캐슬린을 한참 보고 있던 루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엄마?”

    “공자님?”

    에밀리가 당황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잖아?”

    “아니에요. 공자님, 마님께선…….”

    “엄마 맞아!”

    루치는 팔을 쭉 뻗으며 발버둥 쳤다. 제 확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로.

    에밀리는 안타까운 기색으로 아이를 달랬다.

    “공자님, 잘못 보신 거예요. 저 사람은 마님이 아니라 새로 뽑은 하녀…… 잠깐만, 너……!”

    캐슬린은 아이의 커다란 눈에 가득 담긴 제 모습을 보았다. 얼굴을 바꾸었는데도 단번에 알아본 아들이 애틋해서인지, 가슴이 아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에!”

    거울이나 맑은 물에 비쳐 보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바뀌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밀리가 경악한 듯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

    “루치.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울컥하는 것을 참으며 달려가 아이를 꼭 껴안았다. 루치도 울먹거리며 품에 파고들었다.

    “마님, 캐슬린, 아니, 켈리……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에밀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횡설수설하며 물었다.

    “카르미네에서 그렇게 사라지고…… 다들 정말 켈리가 가 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폐하께서 탐색대를 보냈는데도 찾을 수가 없어서 정말 땅속으로 영영 숨어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었을 줄이야…….”

    “그간의 사정을 말하자면 길어, 에밀리. 알리지 못해서 미안해.”

    캐슬린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준 후 빠르게 말했다.

    “시간이 없어. 이만 가야 해.”

    “네? 돌아오신 게 아니에요?”

    “떠나겠다는 말은 아직 유효해.”

    캐슬린은 아이를 품에 안고 일어났다.

    “카르미네에서 가족을 찾았어. 루치를 데리고 가려고 왔고. 그러니 함께 가자, 에밀리.”

    “하, 하지만…….”

    에밀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캐슬린은 그녀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그 사람이 돌아오면 더 이상은 없어. 알잖아, 그때 그가 우릴 어떻게 쫓아왔는지.”

    “아빠가 책 읽어 준다고 했어요.”

    루치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기다리라고 했는데. 아빠랑 같이 가면 안 돼요?”

    아이는 그새 말이 많이 늘어 있었다. 캐슬린은 루치의 말에 당황스러워졌다. 그가 책을 읽어 주었다니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켈리, 어떤 마음인지 알지만 이대로 떠나선 안 될 것 같아요.”

    망설이던 에밀리가 간절하게 말했다.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을게요. 며칠만 기다리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 줘요. 그러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생각을 바꾸면 뭐가 달라져?”

    캐슬린은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하며 물었다.

    “그 사람이 내게 한 짓은 변하지 않잖아. 내가 여기 머무른다 해도 결국은 도돌이표야. 그가 돌아오면 난 다시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갇혀 살아야 해. 내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잖아.”

    “알아요. 하지만 이대로 떠나면 분명 후회할 거예요.”

    열린 창문 너머의 햇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요제프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다.

    “난 가야 해, 에밀리. 함께 가려면 지금 따라와.”

    캐슬린은 루치를 안고 방을 나섰다.

    “어머!”

    안으로 들어서려던 유모가 캐슬린의 얼굴을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저앉았다. 상관하지 않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황급히 에밀리가 뒤를 따르는 듯했다.

    출병 때문에 고요해진 저택에서 최대한 자취를 죽이려는 듯, 사용인들도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캐슬린은 어렵지 않게 본관을 나올 수 있었다. 정원을 지나 샛길로 향하려던 찰나에 에밀리에게 붙잡혔다.

    “잠깐, 잠깐만요. 켈리, 이것만 봐주세요.”

    에밀리가 울먹이면서 치마 주머니를 뒤졌다. 이윽고 돌돌 말린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 표면에는 발텐 가의 문양이 새겨진 봉인이 붙어 있었다.

    유언장이었다.

    캐슬린은 굳은 혀를 움직여 겨우 물었다.

    “이게…… 뭐야?”

    “유언장이에요. 출정하시기 전 주인님께서 제게 주고 가셨어요.”

    백작의 딸로 자라 공작의 부인으로 살았던 캐슬린이었다. 전장에 나선 사령관이 유언장을 남겨 두고 간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죽겠다고? 그곳에서 죽으려는 거야?’

    그런데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유언장과 알렉시스에 대한 생각이 뒤섞여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버린 것만 같았다.

    “켈리.”

    뒤에서 요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그가 복잡한 낯으로 서 있었다.

    “아, 요제프…… 루치를, 찾았어요.”

    “요제프?”

    이름을 따라 부른 루치가 고개를 갸웃하며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낯이었다.

    “내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에밀리가 내민 유언장을 한참 물끄러미 보더니, 루치를 받아 안으며 말했다.

    “읽어요, 켈리.”

    “하지만.”

    “그걸 읽지 않으면, 당신은 분명 평생 후회할 거예요.”

    “…….”

    캐슬린은 떨리는 손으로 유언장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봉인을 뜯어내 읽었다. 수신인이 페터 트리벨리언으로 지정된 유언장은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사후에는 발텐의 이름을 거두고 북부에 묻어 주십시오.]

    [시신을 불살라 카르미네의 진입로에 매장 후, 무덤을 조성하지 말고 드나드는 이들 누구나 밟고 지나도록 해 주십시오.]

    하단에 적힌 루치에 대한 당부가 확신을 더했다. 그는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당신이 왜 죽어? 그러면 이 나라가 무너질 걸 알잖아.’

    숨이 턱 막혔다. 페터가 여자라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루치 역시 안전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 아이를 지켜 달라는 내용을 유언으로 남기면서까지 왜?

    “주인님께선 돌아오시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

    에밀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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