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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9)화 (89/110)
  • 89화

    캐슬린은 요제프와 함께 카르미네를 벗어나 마이어로 향했다.

    다행히 검문은 강화되기 전이었다. 요제프는 아직 신관 명부에서 제명되지 않았기에, 방랑 수련 중인 신관의 신분증을 이용했고 캐슬린은 그의 조수인 수습 신녀로 위장했다. 어렵지 않게 마이어에 입성한 후, 외곽의 여관에 묵었다.

    “먼저 동태를 살피는 게 좋겠어요.”

    각자 방에 짐을 풀고 식당에서 다시 만난 요제프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직 마이어까지는 전화가 미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분위기가 뒤숭숭하니 기다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외곽이니 더욱 그럴 거예요. 내란이 일어나면 먼저 피해를 입는 건 귀족이 아니니까.”

    용병들이 부산하게 오가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캐슬린이 말했다.

    “먼저 출산 시에 필요한 약을 구한 뒤 대공저로 가요. 정원을 통해 몰래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알아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면 위험하니, 그 사람이 저택을 비울 때를 노리죠.”

    “……네.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부러 알렉시스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 요제프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그럴수록 그의 존재가 손톱 밑에 보이지 않게 박혀 버린 가시처럼 느껴졌다. 모른 척하고 싶지만 결국은 그럴 수 없는 존재. 아마 평생토록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네 그거 들었나? 반란이 일어난 이유.”

    옆 테이블에 앉은 용병 무리가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글쎄. 높으신 분들 생각을 칼만 잡는 무식한 놈이 어떻게 알겠어? 뭔데?”

    “나도 랄프 놈한테 들었는데 말이지. 황제 폐하께서 사실은 황제 자격이 없다지 뭔가?”

    캐슬린과 요제프의 눈이 마주쳤다.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황자로 태어나 황태자로 임명된 그가 제위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자격이 없다니? 황태자 전하가 황제가 안 되면 누가 돼?”

    “사실은 폐하께서 사실은 남자가 아니라더구먼! 호프웰 백작님이 괜히 반란을 일으킬 리도 없는 분인데, 그럼 말이 되지 않아?”

    “참나, 이 사람. 그게 뭔 헛소린가? 그럴 리가 있어?”

    “일단 들어보게. 나도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면 윈스턴 백작가가 그리 갑자기 박살 날 이유가 없지 않나? 황태자와 약혼한 영애의 집안인데. 성별을 들켰으니 입막음을 하려고 한 게지.”

    “하긴 그렇긴 하군. 그럼 정말인가?”

    의혹이 번지기 시작하자 불신이 들불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용병들이 모여 앉아 계속 수군거리자, 식당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호프웰 백작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식으로 명분으로 내걸기에 앞서 평민들의 입으로 전해지게 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때로는 입소문이 정식 선언보다 더한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새삼 체감할 수 있었다.

    “저기 봐! 발텐 가의 병사들이야!”

    누군가 소리치자 식당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출정하는 건가?”

    “뭐야, 황군이 아니라 발텐의 군사가 반란을 진압한다고?”

    “이 기회로 사병을 떼어놔서 대공 전하의 손발을 꺾으려는 거 아니겠어?”

    갖가지 추측이 너저분하게 떠돌기 시작했다. 이미 평민들의 여론은 거짓으로 제위를 얻은 페터를 떠나, 불우하게 출생하여 전장을 떠돌았던 알렉시스에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터는 비밀을 숨기기 위해 강해져야 하는 사람이었지, 본래부터 강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을까…….’

    캐슬린은 무거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여관에 묵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페터가 여자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백성을 속이고 법을 어긴 황제에 대한 불신은 이미 그의 정통성과 권위를 전면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켈리.”

    요제프가 캐슬린에게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잊지 말아요. 우리는 루치를 데리러 온 겁니다.”

    캐슬린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어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나 저를 향해 울어 주었던 페터의 눈물이 떠올라 넘어가는 물에서는 쓴맛이 나는 듯했다.

    * * *

    “폐하, 발텐 대공이 알현을 청합니다.”

    초조하게 집무실을 거닐던 페터는 시종장의 말에 우뚝 멈춰 섰다.

    “발텐 대공이?”

    “예. 어찌할까요?”

    페터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항간에 떠도는 반란의 명분이 황제의 귀에 들어올 정도면, 이미 알렉시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페터가 미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열리고, 검은 망토가 휘날렸다.

    “폐하.”

    안으로 들어선 알렉시스는 대공의 정복이 아닌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발텐 대공, 이게 무슨……?”

    금방이라도 출정할 것처럼 만반의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가까이 다가선 알렉시스가 손짓하자 시종장이 문을 닫고 나갔다.

    페터가 다급하게 물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출정하려 합니다.”

    알렉시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황제가 여자라는 소문 따위는 들어 본 적도 없다는 듯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제 허락도 없이요?”

    “지금 받으러 왔잖습니까.”

    “형님이 직접 가시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진압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아시잖습니까, 아직 형님은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그곳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래서 부탁하러 온 겁니다. 내가 전장에 나간 동안 루치를 돌봐 달라고.”

    “그런 결심이라면 더더욱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후방에 황군을 보내 달라거나 물자를 지원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홀로 전력을 다해 싸울 심산이다. 페터는 발밑이 꺼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섰다.

    “더는 가족이 다치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처음부터 결단을 내렸어야 하는 일이었다. 먼저 분란의 씨앗을 심은 건 어머니였으니 모질게 벌하고,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났어야 옳았다. 그러면 그녀가 아버지를 시해하는 짓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잘할 수 있다는 욕심에, 황제가 되면 어머니와 형님의 갈등도 중재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을 갖고 끝까지 자리를 지킨 탓에 지금까지 오고 말았다.

    지금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차라리 제가 출정하겠습니다.”

    알렉시스는 죽어선 안 됐다. 트리벨리언에는 남성 황족이 있어야 했고, 둘 중 하나가 종말을 맞아야 한다면 그건 여성 황족인 제가 되어야 했다.

    그러니 그가 아직 모르고 있다면 이제는 밝혀야 했다. 페터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이를 악물었다.

    “반란의 명분은 접니다, 형님. 그러니 제가 나서는 것이 맞습니다.”

    “…….”

    “제가 모두를 기만했습니다. 선황 폐하와 형님은 물론이고 온 나라를 속였어요. 호프웰 백작의 말이 맞아요. 전 황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저는 남자가 아니…….”

    “페터.”

    떨려 나오는 고백을 단칼에 자른 알렉시스의 눈빛은 단호했다.

    “내 결정은 변하지 않는다.”

    페터는 귀를 의심했다. 제가 여자라는 사실을 밝혔는데도 그가 전과 다르지 않은 눈빛인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시지 않습니까? 형님께서 혹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저는 제국을 지킬 수 없어요. 형님께선 마이어를 지켜 주십시오. 제가 출정하겠습니다.”

    “후계 없는 황제가 직접 전장에 나가는 경우는 없지.”

    “설령 제가 죽는다 해도 제국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형님께서 계시니…….”

    “황제는 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페터는 겨우 말했다.

    “못 들으셨습니까? 저는 여자예요. 그런데 어찌 제가 계속 황제 자리를 지킬 수 있겠…….”

    “들었다.”

    알렉시스는 허리에 찬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제국법에 황녀가 황위를 받지 못한다는 조항은 없다는 걸 네가 더 잘 알 텐데.”

    “…….”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에도 호프웰은 마이어로 진격하고 있다. 전장에 나서 본 적 없는 네가 그들을 진압할 수 있으리라 보느냐?”

    냉철하게 내린 판단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 다정함이라곤 한 줌도 없지만, 그 어떤 위로보다 와닿는 음성에 페터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알렉시스는 페터를 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델라포스의 대신관에게 건국 신탁을 다시 살피게 했다. 그가 말하기를 황실이 해석한 뜻과 현재 상황은 달라졌을 거라고 하더군. 겨울 요정족은 평범한 인간과 상성이 다르니, 그 둘의 피가 섞인 루치의 목숨만 안전하다면 제국에 더 이상의 재난은 없을 거라고 했다.”

    황실의 고귀함을 무엇보다 중시한 선황이 왜 이민족 출신의 하녀를 취해 아들을 보았는지, 대신관의 해석을 들은 후에야 알렉시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이어의 순수 혈통만으로는 제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겨울 요정족의 피를 이은 캐슬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것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제국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니 제가 죽어도 트리벨리언 전역의 지반이 무너져 세상이 끝나진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안 뒤에야 비로소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넌 그대로 황제로 살면 된다.”

    호프웰의 진군을 막지 못하면 캐슬린이 잠든 북부까지 군홧발에 짓밟힐 것이고, 황족인 루치는 눈엣가시가 되니 위험해진다. 어차피 독에 찌든 몸뚱이를 캐슬린의 고향과 아이를 지키는 데 쓴다면 꽤 괜찮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저승에서 캐슬린을 만나도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겠지.’

    태어난 것은 원망스러웠지만 그리 죽을 수 있다면 흡족할 수 있을 듯했다.

    알렉시스는 흐느끼는 동생을 뒤로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형님!”

    페터가 저를 부르며 쫓아오려 했지만 알렉시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황궁을 나서면 바로 진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페터가 막으려 한다 해도 이미 늦었다.

    알렉시스는 본궁 밖에 대기하고 있던 라일런트 자작이 따라붙자 빠르게 말했다.

    “내가 출정하면 궁정 회의에 서한을 보내.”

    “서한이요? 어떤……?”

    “집무실에 작성해 두었다. 호프웰의 명분은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는 내용이니 동요하지 말 것이며, 내가 자원하여 출정했다는 내용이다.”

    “전하…….”

    “페터가 허튼짓하지 않도록 잘 감시해.”

    제가 죽어 사라지면 루치를 지켜 줄 사람은 페터가 유일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에 더는 미련이 없듯, 원한 따위도 없던 것처럼 여길 수 있었다.

    알렉시스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군마에 올라타 황궁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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