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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8)화 (88/110)
  • 88화

    “제가 그 아이를 위해 돌아가는 걸 원치 않으실 거예요. 마음이 풀리실 때까지 설득하고 기다리겠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 확신이 안 들어요.”

    어머니의 기록을 살펴보며 능력을 배우려는 것도 그래서였다. 스스로 발전하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어머니를 반추하게 하며 추억에 잠긴 외숙부가 마음이 약해져 루치를 보듬어 주길 바라서기도 했다.

    “생각보다 그때는 일찍 올 겁니다. 어쩌면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르고요.”

    캐슬린과 반대로, 요제프는 확신에 찬 채로 말했다.

    캐슬린은 의아해져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최근에 정찰을 나갔다 온 수비대 아저씨에게 들었어요. 남부에 다시 반란이 터질 거라고 합니다.”

    “반란이 다시 터지다뇨? 이미 그 일은 끝났던 걸로 아는데…….”

    “도망쳤던 호프웰 백작이 그곳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선황 시해라는 명분도 있으니, 황실은 그를 막는 데 전력을 다할 겁니다. 관심이 그쪽에 쏠린 틈을 노린다면 루치를 데려올 수 있을 거예요.”

    호프웰 백작이 전쟁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사령관이자 선봉장은 고위 귀족 중 전장 경험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마이어, 아니, 트리벨리언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그 적임자는 한 명뿐이었다.

    알렉시스 발텐.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캐슬린은 문득 떠오른 기억에 손끝이 싸늘해졌다.

    회귀 전 제게 칼을 들이밀었던 새 주인 호프웰 공작은, 발텐 공작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아닐 거야.’

    시간을 거스른 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니 그 일도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카시엘 님께 들으니 카르미네 중턱쯤에 약초밭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 우리가 저번에 와 봤던 곳인 것 같아요. 그곳의 길을 따라 내려가면 북부의 영지에 다녀올 수 있을 테니,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외숙부님이 받아 주실까요?”

    “루치는 당신의 눈과 머리 색을 물려받았으니, 율리아나 님도 닮았다고 할 수 있죠. 막상 보시면 돌려보내라고는 하지 못하실 거예요.”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설명하는 요제프 덕에 불안함이 점점 가셨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캐슬린은 다부지게 말했다.

    “요제프가 약초 채집하는 걸 돕는다고 하면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아도 크게 의심하지는 않으실 테니까요.”

    “하지만 켈리,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전쟁이 터졌을 테니 마이어로 들어가는 경계가 더 삼엄해졌을 거예요.”

    “얼굴을 바꾸면 들킬 위험은 없어요. 게다가 이젠 저도 스스로 보호할 힘 정도는 있는걸요.”

    캐슬린이 손바닥을 펴 순식간에 날카로운 얼음 결정 하나를 만들어 건넸다. 냉기가 흐르는 두꺼운 결정을 받아 든 요제프가 얼마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함께 갑시다. 카시엘 님께는 제가 말을 올리죠. 마침 우스문트 전담 치료사가 되려면 마련해 둬야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다행이네요.”

    “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뜻밖의 소식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오랜만에 편하게 식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캐슬린은 돌아가려는 요제프를 데려다주려다가 날이 춥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성문 밖까지만 그를 배웅해 주었다.

    “그런데 호프웰 백작은 왜 반란을 일으킨 걸까요? 아무리 남부와 손을 잡았다 해도, 선황 시해라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킨다면 결국 트리벨리언 황실을 지키게 될 수밖에 없을 텐데.”

    내란에서 이겨 이전처럼 호프웰이 공작이 된다 해도 스스로 황제가 될 순 없다. 그러면 다른 황족을 세워야 할 텐데, 현재 제국에는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아직 폐하께서 성년이 되신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걸 핑계로 섭정의 자리에 오르려는 생각이 아닐까요?”

    “섭정이라니…… 페터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걱정이네요.”

    “뛰어난 황제의 재목이시니 잘 이겨 내실 겁니다. 심지가 굳센 분이시기도 하니까요.”

    “그렇겠죠?”

    페터에게 살아 있다는 연락도 하지 못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요제프가 걱정을 덜어 주려는 듯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고는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얼른 들어가세요.”

    성문 밖의 오솔길을 향해 돌아서는 요제프를 보던 캐슬린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그를 불러세웠다.

    “요제프!”

    “예?”

    “여태 깜빡 잊고 묻지 못했는데요. 카르미네에서 외숙부님과 우스문트 사람들은 어떻게 만났나요?”

    험준하고 혹한이 계속되는 산에서 종적을 감춘 이들을 우연히 만나는 것은 행운이라 불릴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요제프가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할 정도였던 것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그들을 찾아내고 설득했는지 궁금했다.

    “아…… 그거요.”

    조금 애매한 얼굴로 요제프가 말끝을 흐렸다.

    “사실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도움이요?”

    요제프 혼자서 찾아낸 거라고 생각했던 캐슬린은 적잖게 놀랐다.

    “누가요? 카르미네와 우스문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었나요?”

    “……우연히 마주친 이라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가 카르미네에서 우스문트 가의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며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 줬어요. 그곳으로 가서 무작정 기다리다가 카시엘 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대충 이해가 갔다. 아마 우연히 마주쳤는데 카르미네에 대해 알고 있다면, 북부 영지민 중 산맥으로 진입을 허가받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누군지는 몰라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외숙부님을 만날 수도, 빙결 능력을 다시 배우는 기회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꼭 보답이라도 해 주고 싶어.’

    북부 영지에 사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 번은 마주치겠지 싶었다.

    “그럼 요제프, 조심히 들어가요.”

    “켈리도 너무 수련에만 몰두하지 마세요. 내일 뵙지요.”

    요제프가 손을 흔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캐슬린은 그가 향하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문득 그의 집 안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했다. 저번에 반딧불이로 착각했던 그것 같았다.

    ‘저게 뭐지?’

    거리가 있어서인지 흐릿해서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는데 어느새 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불빛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착각했나?’

    수련을 너무 오래 해서 헛것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기분 탓일 거라고 여기며 캐슬린은 성으로 다시 돌아갔다.

    * * *

    예상보다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며칠 뒤 요제프는 한 부부와 함께 카시엘을 찾아왔다. 아내가 아이를 가졌는데, 몸이 워낙 약하다 보니 몇 달 뒤 있을 출산 시에 비상시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치유력으로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수는 없으니 약초를 마련해 두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렇게 하게. 우스문트의 자손이 하나라도 더 안전해질 수 있다면야.”

    가주인 카시엘은 무엇보다 종족의 안전을 우선으로 했다. 겨울 요정족의 손이 귀한 만큼, 출산은 전쟁만큼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저도 함께 갈게요. 요제프 혼자서는 약초를 채집하는 데 시일이 걸릴 테니까요.”

    “하지만 켈리. 험한 곳에 그리 오래 나가 있어도 되겠니?”

    “괜찮아요. 이전에도 해 본 적 있는 데다, 이제 저도 힘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잖아요.”

    확신에 차서 설득하자, 카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해 주었다.

    “알았다. 그럼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내가 함께 가고 싶지만, 가주가 자리를 오래 비울 순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요.”

    “북부의 영지 쪽을 조심하거라. 그쪽 기류가 심상치 않다고 하니, 무슨 일이 있으면 신호탄을 쏘고. 그러면 수비대를 보내겠다.”

    카시엘은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감사해요, 외숙부님.”

    카르미네 밖의 상황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카시엘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전화의 기운이 제국 전역에 닥쳐온 듯했다. 한시바삐 루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요제프는 캐슬린과 함께 성을 나온 다음 부부에게 말했다.

    “다른 치료사님도 계시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기다려 주세요. 출산 과정에서 일어날 일을 대비해 약초를 충분히 채집해 돌아오겠습니다.”

    “요제프 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돼요.”

    아이를 가진 여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켈리 아가씨도 몸조심하셔요.”

    “제 걱정은 마세요.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저도 도울 테니까요.”

    아이를 낳을 때가 다가오면 얼마나 불안해지는지 잘 알고 있는 캐슬린이 그녀를 위로해서 돌려보냈다.

    “바로 떠나도록 하죠, 켈리.”

    요제프가 시간을 가늠해 보며 말했다.

    “군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수도에 들어가는 것부터 어려워질 수 있으니까요.”

    “전 상관없어요. 짐은 미리 챙겨 두었으니 바로 가도 돼요.”

    “그럼 한 시간 후에 입구에서 만나요.”

    캐슬린은 서둘러 성으로 돌아가 짐을 챙겨 나온 후, 우스문트 마을의 입구로 향했다. 요제프는 미리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비대에게 마을 밖으로 나가는 사유를 확인받고 나서 한참 멀어지자, 요제프는 그녀의 얼굴을 바꿔 주었다.

    “거울이나 맑은 물처럼 얼굴이 비치는 것에 바뀐 모습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원래 얼굴로 돌아오진 않을 겁니다.”

    요제프가 제 얼굴을 바꾸며 설명했다. 캐슬린은 챙겨 온 염색약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머리 색도 바꿔야죠.”

    “제 머리 색을요?”

    그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사망한 걸로 되어 있겠지만, 요제프는 혹시 모르잖아요. 당신이 다시 마이어로 돌아오면 잡아들이라고 명을 내려놨을지도 모르는데.”

    “아…… 네. 그렇네요. 제가 깜빡했습니다.”

    요제프가 염색약 병을 잡으며 뒤늦게 대답했다. 서둘러 그녀와 같이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하는 요제프의 얼굴이 이상하게 어색해 보였다.

    ‘왜 저러지?’

    이전에 발텐의 저택으로 찾아왔을 때 내쫓긴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일까?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요제프가 한참이나 문을 두들기며 애원했음에도 냉정하게 쫓겨났다고 했으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을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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