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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7)화 (87/110)
  • 87화

    쓸 일이 없을 거라 여겨 언제까지나 백지로 두려 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뒤늦게 유언장에 써넣을 내용을 생각해 냈다.

    깃펜을 찾아 촉을 잉크에 담근 후, 그는 유언장의 수신자에 페터의 이름을 써넣었다.

    [사후에는 발텐의 이름을 거두고 북부에 묻어 주십시오. 그때 카르미네에 캐슬린의 무덤이 있다면 그보다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 묻고 만약 없다면]

    바삐 움직이던 깃펜이 잠시 멈추었다. 만약 그때까지 그녀의 시신을 찾을 수 없다면…… 죗값을 치러야 하는 건 저였다.

    알렉시스는 마저 문장을 끝맺었다.

    [시신을 불살라 카르미네의 진입로에 매장 후, 무덤을 조성하지 말고 드나드는 이들 누구나 밟고 지나도록 해 주십시오.]

    다음에는 루치에 대한 내용을 적었다. 아이의 병을 돌봐 달라는 것과 친족으로서 안위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한다면 발텐의 모든 군사와 재산, 작위까지 폐하께 환수될 것입니다.]

    캐슬린은 루치에게 발텐의 이름이 주어지는 것을 싫어했으니, 대공위를 물려받기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루치가 장성하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페터의 황위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차라리 발텐의 작위를 황제에게 바치는 편이 나았다. 그러면 페터도 루치를 더 잘 보살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공작위를 따냈던 이유가 황제와 황후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였으니, 이제는 유지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작위와 영지 환수에 관한 내용을 아래에 자세히 적어 넣고 있을 때였다.

    “대공 전하, 급보입니다!”

    다급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군사와 관련해서는 황제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손을 놓고 있는데 급보라니.

    듣지 않을까 하다가 생각을 바꾼 알렉시스는 깃펜을 놓으며 말했다.

    “들어와.”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영지 시찰을 떠났던 라일런트 자작이 급하게 들어왔다. 불과 오늘 받아 본 보고에도 특별한 언급은 없었는데, 이리 급하게 올라온 거라면 심상찮은 일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지?”

    “우선 시찰을 끝마치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헤르포트 영지로 이동하던 중 남부에서 호프웰에 대한 급보를 입수했습니다.”

    “호프웰?”

    알렉시스의 안색이 변했다. 선황후의 손을 잡았다가 도망친 그의 종적은 아직 묘연했다. 마이어의 군사를 통솔할 권리를 페터에게 넘긴 후, 황군이 각지의 궁벽한 곳까지 뒤지고 있으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자선 사업으로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 그를 숨겨 주어 지금까지 행적을 숨긴 채 달아날 수 있었답니다. 최근까지 헤르포트에 머물렀던 유랑민들에게 들어 보니, 그의 최종 행선지는 남부라고 합니다.”

    “남부라면 전선으로 가고 있단 얘긴가?”

    “아마도 그런 듯합니다.”

    반란이라 불릴 만큼 지난한 소요 사태가 일어났던 남부의 상황은 종료되었으나, 아직도 최남단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트리벨리언에 반발하는 주요 세력이 그곳에 모여 해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과 호프웰이 협력한다면 문제가 커진다.

    ‘마이어의 고위 귀족과 연합한 이민족 세력이 더 생긴다면.’

    트리벨리언 전역에 흩어져 있는 남부의 세력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지방 귀족과 결탁하기 시작한다면 소요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황궁의 움직임은 어떤가?”

    “별다른 행동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아직 모르시는 듯한데, 사람을 보낼까요?”

    알렉시스는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호프웰이 들고나온 명분이 있나?”

    “있습니다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서…….”

    머뭇거리며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라일런트 자작의 낯이 어두웠다. 호프웰 백작이 쥐고 있는 패가 간단한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야 대비책이라도 세울 거 아닌가?”

    “차마 입에 담기에도 황당한 소문입니다만…… 그것이, 황제 폐하의 정통성을 전면 재검증해야 한다는 겁니다.”

    “정통성?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지금은 대가 끊어졌으나, 마이어의 대귀족인 콘로이 후작의 외동딸이 황후에 올라 낳은 아이가 페터였다. 그러니 페터는 정통성 면에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한 통치자였다.

    라일런트 자작이 난감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것이, 호프웰 백작이 폐하의 성별이 여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합니다.”

    “뭐?”

    뜻밖의 이야기에 알렉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나 했더니, 기껏 그런 황당무계한 루머를 들고 나왔을 줄이야.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자 그간의 일들이 느리게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어렸을 적 저를 동경하며 따라다니던 어린 황자부터, 계속해서 파혼을 꾀하던 황태자까지.

    - 형수님과 저는 의외로 닮은 점이 꽤 많거든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이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 모두 그 이유로 귀결되기 시작했다.

    우선 알렉시스는 뻗어 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정리하고 라일런트 자작에게 말했다.

    “먼저 그림자를 둘로 나누어 남부와 셴베르크 백작에게 보내라. 정황 파악이 먼저니. 그 후 황궁에 알려도 늦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델라포스의 대신관을 데려와라. 건국 신탁에 대해 물을 것이 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라일런트 자작이 서둘러 나갔다. 알렉시스는 다 작성한 유언장을 묶어 봉인한 후, 에밀리를 불렀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네게 맡길 것이 있다.”

    그는 유언장을 넘겨주었다. 봉인을 본 에밀리의 눈이 커졌다.

    “주, 주인님…….”

    “유언장이다. 잘 보관하고 있다가 유사시 폐하에게 넘겨. 루치의 목숨을 구할 거다.”

    에밀리는 혼란스러운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시스는 그녀가 소중히 유언장을 품 안에 넣는 것을 바라봤다. 그는 에밀리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에밀리는 캐슬린이 마지막 순간까지 유일하게 의지했던 시녀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페터 외에 한 사람이라도 루치 곁에 있어 줄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는 창문 밖으로 라일런트 자작이 다급하게 달려나가는 것을 내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없는 동안 아이를 잘 돌봐라.”

    책을 읽어 주기로 했는데 또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

    알렉시스는 씁쓸함을 삼켰다. 어쩌면 이것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나쁘지 않을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 * *

    “외숙부님,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캐슬린은 꽃 모양으로 섬세하게 형태를 이룬 얼음 조각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쳐 들고 카시엘에게 보여 주었다. 캐슬린을 위해 율리아나의 기록을 찾아 정리하던 카시엘은 그것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맞다. 벌써 이렇게까지 실력이 늘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어머니가 수련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해 두셔서 어렵지 않았어요.”

    아낌없는 칭찬에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맺혔다.

    “겸손할 필요 없다. 넌 율리아나보다 오히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걸.”

    카시엘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찾아낸 기록 몇 가지를 더 보여 주었다.

    “이것 보렴. 네 꽃이 율리아나의 꽃보다 훨씬 곡선이 부드럽고 얼음의 두께도 더 얇구나. 아마 너라면 곧 이런 것도 가능할 거다.”

    “이렇게 정교한 세공 작업까지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가 보여 준 건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얼음 결정을 엮어 만든 장식물이었다. 어머니도 딱 한 번 성공한 고난도 작품이었다.

    “그럼. 노력만 하면 다 되지. 넌 우스문트의 아이가 아니냐.”

    외숙부의 격려는 캐슬린의 마음 한구석을 따듯하게 데웠다. 동시에 제 능력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저주라고 비난당했기도 했고, 저 역시 오솔레로 떠나기 전까지는 능력을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소 거칠고 강력한 면이 있는 저의 능력과 달리, 어머니 율리아나의 능력은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아름다운 면이 있었다. 그녀는 보통 공예품이나 장식품의 용도로 얼음 결정을 사용했다.

    그러니 그녀는 저주받은 능력을 가졌다고 비난받은 적은 없었다. 대신 윈스턴 백작으로부터 탈출할 힘도 가지지 못했다.

    캐슬린은 어머니처럼 예술적인 면모를 더 키우려고 연습하는 중이었다. 타고난 능력을 세분화시켜서 여러 방향으로 다룰 수 있게 되면, 좀 더 자신을 아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노력의 시도는 꽤 성과가 있었다.

    “생화의 잎과 줄기를 따라서 얇게 표면을 얼려 보는 단계부터 시작하면 된단다.”

    “해 볼게요. 여기, 이 꽃을 쓰면 되나요?”

    “천천히 하렴, 켈리.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해.”

    “아니에요, 계속해 보고 싶어요.”

    카시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캐슬린은 저녁 늦게까지 연습을 계속했다.

    거듭된 실패 끝에, 겨우 꽃잎 표면만 살짝 얼음으로 덮는 데 성공했을 무렵이었다.

    “켈리.”

    “요제프?”

    카시엘이 아닌 요제프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캐슬린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외숙부는 자리를 뜨고, 요제프가 바구니를 든 채 서 있었다.

    “성까지는 어쩐 일이에요?”

    “저녁 시간이 다 되었잖아요. 카시엘 님이 하도 걱정이 많으셔서 와 봤죠.”

    가까이 다가온 그가 얼른 와서 앉으라는 듯 엄한 눈초리를 했다. 하는 수 없이 캐슬린은 꽃을 내려놓고 소파 쪽으로 갔다.

    “식사를 가져왔으니 먹고 해요.”

    요제프는 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안에 든 음식을 꺼냈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갓 구운 빵과 아직 따뜻한 수프, 소고기를 한입 크기로 잘라 채소와 소스를 넣어 볶은 간단한 요리가 나왔다.

    “솜씨가 정말 많이 늘었는데요? 이것도 직접 만들었나요?”

    “그럼요. 켈리가 빙결 능력을 수련하는 동안 저는 요리를 공부했죠.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음식의 맛은 훌륭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관인데 수련은 안 하고 요리만 하게 둬도 괜찮은 건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요제프, 너무 요리에만 신경 쓰지 마요. 조금만 더 수련하면 대신관님에 못지않은 치유력을 지닐 수 있을 텐데 여기서 멈추긴 너무 아쉬워요.”

    “쓰지 않는 게 차라리 낫죠. 제가 그 능력을 써야 한다면, 제 주변의 누군가가 다쳤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여기엔 치료사도 있고요.”

    “하지만 당신의 능력은 그 치료사보다 더 뛰어나잖아요. 단순한 상처나 병이 아니라, 약물이나 독에 오래 노출된 사람도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

    무심결에 알렉시스를 입에 올린 캐슬린은 말을 멈췄다. 잊어버리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중에 너무 깊게 남아 버린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한동안 쓰지 않는다 해서 치유력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루치는 제가 꼭 낫게 해 줄 겁니다.”

    그러나 요제프는 부드럽게 그녀의 말을 받아 실수를 가려 주었다. 알렉시스가 아닌 루치만을 언급하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잊지 않아요, 루치는. 당장은 어려워도 꼭 이곳으로 데려와 켈리 곁에서 자라게 해 줄 겁니다.”

    “루치를 기억해 주는 게 당신이라 다행이에요.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요.”

    캐슬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억지로 빵을 한 조각 뜯어 씹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빵이 마치 모래를 삼킨 것처럼 입 안에 꺼끌꺼끌한 감각을 남겼다.

    “외숙부님은 그 아이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길 원하지 않으세요. 어찌 됐든 루치는 카르미네의 밖에 있으니까요.”

    동생 율리아나를 사랑하고 그리워했기 때문에, 그는 동족을 납치했던 윈스턴 가의 핏줄인 캐슬린도 받아들여 아꼈다. 배신자라 생각했던 겨울 요정의 핏줄도 오해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에 대한 반발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건 제국의 고위 귀족인 발텐 대공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루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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