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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6)화 (86/110)
  • 86화

    알렉시스는 주인 잃은 방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나왔다. 루치의 방은 아이가 깨지 않고 단잠을 자는지 조용했다.

    침실로 돌아온 그는 한 손으로 축축한 셔츠를 벗어 던졌다. 본래는 새하�R던 옷이었으나 어느새 검붉은색으로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단도에 베인 어깨와 팔에서 아직도 피가 샘솟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욕실로 들어가 물로 몸을 씻고, 찬장에 넣어 둔 붕대를 꺼내 감았다. 굳이 의사를 불러 치료를 받는 거추장스러운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살 목숨도 아닌데.

    그러나 아이가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아 붕대를 피가 배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두껍게 감았다. 다행히 색이 짙은 셔츠를 입으니 대충 멀쩡한 꼴은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넝마가 된 셔츠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집무실로 향했다. 궁정 회의에 참석하느라 살펴보지 못한 라일런트 자작의 보고서를 오늘까지 검토할 예정이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지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지방 영지는 여전히 그에게 있어 중요했다. 성의 축조와 보수뿐만 아니라 일정 세수를 확보하고 물적 교류를 터 두어야 루치의 기반을 만들어 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알렉시스는 훗날 그 아이가 저처럼 전쟁터로 내몰리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곁에 있어 주지는 못한다 해도, 충분한 재물이 있다면 도움이 될 터였다.

    “전하!”

    그러나 막 보고서를 몇 장 채 넘기기도 전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황궁에서 자상을 입으셨다 들었습니다.”

    카벨 선생과 에디스가 왕진 가방을 들고 들이닥쳤다. 알스도프는 불안한 얼굴로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

    “하지만 전하, 지금 치료하지 않으시면 덧날지도 모릅니다. 당장은 피가 멈추어 괜찮은 것 같아도 감염이 일어나면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돌아가라 했을 텐데.”

    서릿발 같은 거절에 더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카벨 선생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에디스가 약과 붕대를 넘겨받은 후 알렉시스에게 다가왔다.

    “전하께서 이러시면, 저는 계속 공자님께 드리는 약의 농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어요.”

    “무슨 뜻이지?”

    루치를 언급하자 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타사르트는 원액대로 조제하는 게 아니었나?”

    에디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았어요. 대공비 전하께서 농도를 조절하라고 하셨거든요.”

    알렉시스의 손에서 깃펜이 부러졌다. 에디스는 잉크가 번진 보고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주제넘지만 이 말씀은 드려야겠어요. 대공비 전하는 전하께서 돌아가시길 원하시진 않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았을 땐 그랬어요.”

    “…….”

    “대공비 전하의 말씀이 아니라도, 저는 전하를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독도 아니고, 이번엔 칼에 베인 상처 때문에 전하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걸 고용된 약제사로서 두고 볼 순 없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예상처럼 그는 캐슬린을 언급하자 즉각 거부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에디스는 재빨리 노집사와 카벨 선생에게 눈짓하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알렉시스는 책상 위에 놓인 약을 내려다보면서 에디스가 했던 말을 차근히 곱씹었다.

    그녀는 제가 죽길 원하지 않았을 거라고…….

    사실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말인데 믿고 싶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서렸다. 그러나 한 줄기 희망은 곧바로 다시 사라졌다.

    ‘아니었겠지. 루치를 데리고 북부로 가서 요제프에게 치료받으면 되니, 약이 굳이 필요 없었을 거야.’

    저와 루치가 타사르트로 만든 약을 나누어 마실 수 있게 제조하라고 한 건 일순간의 적선 혹은 동정에 불과할 것이다.

    그때의 말을 되새기며 좋을 대로 해석해 봤자, 그녀의 본심은 제가 건강히 살길 바라는 것이 아닐 터다.

    알렉시스는 약병을 치워 둔 채 보고서 검토를 계속했다.

    그리고 보고서의 마지막 장까지 다 살피고 난 후에야 일어섰다. 막 루치가 깨어났을 시각이었다. 어깨와 팔에 두른 붕대에 피가 묻어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 그는 서랍에서 녹색 약물이 담긴 약병을 꺼내 챙겼다. 에디스가 얼마 전 두고 간 타사르트 약이었다.

    루치의 방으로 향했다.

    “아빠!”

    며칠 만에 만난 아비가 반가운지 루치가 아장아장 다가와 다리에 매달렸다. 알렉시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는 이제 루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가 원래 얼굴로 돌아온 직후에는 얼굴에서 제가 보일 때마다 숨이 막혔다. 배 속에 아이를 품은 채 홀로 버텼을 캐슬린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려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 이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연청색 눈을 물려받지 않았다면, 아이의 얼굴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약은?”

    그는 루치가 건강한지 확인하며 유모를 향해 물었다.

    “먹었어요!”

    그러나 대답은 아이에게서 들렸다.

    “아빠가 약 잘 먹으라고 했잖아요.”

    아이는 하루가 지날수록 자라 이젠 웬만한 말을 다 받아칠 정도가 됐다. 유모도 루치의 말에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공자님께서는 매일 투정도 안 하고 약을 잘 드십니다.”

    “다행이군.”

    그는 품에 안긴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준 후, 유모에게 약병을 건넸다.

    “끼니에 맞추어 더 챙겨 먹이도록. 자주 복용할수록 빨리 나을 테니.”

    “예, 전하.”

    유모는 의심 없이 약병을 받았다. 늘 에디스에게 전해 받던 것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알렉시스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며 늦은 오후를 보냈다. 며칠 전, 딱히 읽어 줄 책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주문한 유아용 그림책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루치는 처음엔 낯설어했지만 새로운 놀이가 마음에 드는지 푹 빠져들었다.

    한참 뒤, 알렉시스의 무릎에 앉아 신기한 그림을 실컷 구경하고 난 루치가 눈을 반짝이며 졸랐다.

    “또 읽어 주세요.”

    약을 먹이려면 끼니가 늦어서는 안 됐다. 알렉시스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안 돼. 이제 저녁 먹어야지.”

    “더 보고 싶은데.”

    “다음에 또 읽어 줄게.”

    아이를 달래며 책을 치우고 소파에서 내려 주자, 입이 부루퉁하게 나온 루치가 뭔가를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럼 엄마 오면 읽어 달라고 해도 돼요?”

    “뭐?”

    덜컥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린 아들의 입에서 나온 캐슬린의 존재가 당혹스러웠다. 생각해보니 루치는 여태 저에게 엄마의 부재에 관해 질문하지 않았다.

    유모에게 눈짓하니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내린 명령대로 캐슬린의 죽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 엄마를 찾지 않는 걸 왜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했을까…….

    알렉시스는 무감각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엄마는 루치에게 책을 읽어 주기 어려울 거야.”

    “괜찮아. 기다릴 수 있어요. 엄마는 루치 보러 올 거니까.”

    엄마가 제게 돌아올 거라는 당연한 믿음을 가진 희망찬 얼굴에 냉정한 현실을 들이밀기가 어려웠다. 아이가 기대를 품고 살 수 있도록 그냥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애초에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지 도저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알렉시스는 결국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루치.”

    알렉시스는 아이의 두 손을 모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엄마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해. 아빠가 엄마한테 잘못한 일이 있어서 엄마가 몹시 힘들어하고 있거든. 아빠는 엄마를 다시 데려오고 싶지만…… 루치는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어.”

    “엄마는 눈 산에 여행 갔잖아?”

    카르미네를 기억하는 듯한 루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마 에밀리가 그렇게 알려 준 듯했다. 알렉시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그곳을 여기보다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만약 엄마가 안 오겠다고 하면…… 나중에 찾아가자. 엄마는 네가 가면 좋아할 거야.”

    “아냐.”

    루치는 보기 드물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간해서는 고집을 부리거나 싫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데 뜻밖이었다. 알렉시스는 몸을 낮추어 아이와 눈을 맞추며 달랬다.

    “마차를 타고 엄마를 보러 가는 거야. 간식도 먹고, 엄마한테 줄 꽃도 가지고 북부로 가자. 그땐 루치가 엄마한테 책을 읽어 주면 좋아할 거야. 아빠가 데려다줄 테니까…….”

    “아빠도 가.”

    “응?”

    “아빠도 루치랑 같이 엄마한테 가.”

    “…….”

    “엄마도 아빠 좋아해.”

    연푸른색 눈을 깜빡이며 말하는 아이는 아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로 순하게 웃고 있었다. 목울대가 뻣뻣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알렉시스는 어린 아들을 끌어안았다.

    “아빠?”

    “……그래. 같이 가자.”

    시신을 찾아 무덤을 만든다 해도 감히 그 앞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혼이 그곳에 있다면 제가 찾아가는 것조차 넌더리를 내며 끔찍해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라면 먼발치에서나마 한 번은 가 봐도 허락해 주겠지.

    “꼭 같이 가자.”

    알렉시스는 그렇게 아이를 달래고 저녁을 먹였다. 다행히 루치는 더 이상 엄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홀로 침실로 돌아왔다. 그대로 침대에 누우려다 축축한 느낌이 들어 상의를 벗어 보니 붕대가 온통 피로 젖어 있었다.

    붕대를 푸는데 몇 달 전 어깻죽지와 가슴에 입었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지 핏물이 흘렀다. 격한 움직임에 살갗이 엉겨 붙지 못한 듯했다.

    알렉시스는 피를 닦고 새 붕대를 감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언 땅에 잠든 그녀를 찾을 때면 루치는 아마 많이 자라 있을 것이다. 만약 그때까지 제가 살아 있지 못한다면, 알렉시스는 저 역시 그곳에 묻어 달라 할 작정이었다.

    그는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치우고 뒤의 공간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테두리에는 금박을 둘렀고 상단부에는 발텐 가의 문양이 새겨진, 유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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