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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5)화 (85/110)
  • 85화

    알렉시스는 허겁지겁 도망치려는 선황후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놓아라!”

    벌컥 역정을 내며 돌아보는 선황후의 꼴은 엉망이었다. 후작가의 딸로 태어나 황태자비를 거쳐 황후까지 오르며 갈고닦았던 품위는 온데간데없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옷은 피와 오물이 묻어 더러워진 채였다.

    “네놈이 또……!”

    저를 붙잡은 사람이 알렉시스라는 것을 알자마자 선황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렉시스는 무감한 어조로 물었다.

    “서쪽 탑이 아니라 지하 감옥에 갇히고 싶었던 건가?”

    “놓으라지 않았느냐!”

    “당신은 죽어서도 탑에서 나올 수 없어. 나오는 순간 대역죄인이지. 그 죗값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죗값이라니!”

    실핏줄 터진 눈을 부라리며 선황후가 악을 질렀다.

    “내 자식이 황제가 됐으니, 난 황제의 모후다. 선황후로서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하거늘 죄인이라니? 천한 네놈은 대공입네 거들먹거리는데 내가 죄인이라니!”

    그녀가 미친 듯이 팔을 휘둘렀다. 순간 소맷자락에 가렸던 단도가 허공을 가르며 알렉시스의 팔뚝을 베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변화 없는 낯으로 그녀의 손목을 비틀었다. 손에 쥐었던 단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윽……!”

    “당신의 아들이 황제 자릴 제대로 지키길 원한다면.”

    알렉시스가 선황후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낮게 말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텐데. 안 그래?”

    “내가, 내가 왜. 황제의 모후가 왜 죽어야 한단 말이야!”

    “하긴 그렇지. 당신이 원한 건 페터가 황제가 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황제의 모후가 되는 거였을 테니.”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맞춘 알렉시스가 말했다.

    “이사벨라 윈스턴을 죽여 입을 막은 다음, 시해 사건의 책임을 다 뒤집어씌우고 유폐에서 벗어나려는 속셈이었겠지. 페터는 당신을 죽일 수 없을 테니까. 안 그래?”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을 놓자 선황후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캑캑거렸다.

    “대공 전하!”

    멀리서 달려오는 기사들이 선황후를 발견하고 경악한 얼굴을 했다.

    “내려가 봐. 폐하를 모시고 죄인의 생사를 확인해라.”

    “예!”

    기사들은 선황후를 흘깃 보고는 서둘러 아래 계단으로 내려갔다.

    알렉시스는 그사이 진창을 기며 기어코 도망치려는 선황후를 내려다보다가 발목을 밟았다.

    “아악!”

    고통스러워하는 낯을 보니 우스웠다. 심심할 때면 그녀를 불러다 몇 시간이나 꿇어앉힌 주제에. 에밀리는 선황후가 다과회나 연회에서는 시녀나 하급 귀족 영애를 시켜 공공연히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고작 한 번 밟혔다고 이렇게 발악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발목 두 개를 다 부러뜨리고 싶었다.

    “페터가 이 이상으로 당신을 감쌀 수 있을 것 같아?”

    유일한 자식의 이름을 입에 담자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선황후의 눈은 독기로 가득했다.

    “황제인 페터는 그러지 못해. 차라리 제위를 포기하는 조건을 건다면 모를까.”

    “네, 네놈이 감히…….”

    “안 믿기면 직접 물어보든가.”

    지하 감옥에서 올라오는 인기척을 느낀 알렉시스가 비켜서며 말했다.

    “……어머님.”

    참담한 얼굴로 지상에 나타난 페터가 가까이 다가왔다.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이사벨라 윈스턴을 죽이시다니요!”

    “페터, 아니다!”

    선황후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선황제 시해 사건은 윈스턴과 알렉시스 저놈이 작당하여 내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넌 내 자식이야. 하면 이 어미의 말을 믿어야 하지 않겠니?”

    “어머님. 제발…….”

    “왜 내 말을 한 번도 듣지 않는 것이냐!”

    애원하던 선황후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아니었다면 네가 황제가 되었겠느냐? 저 악독한 천것이 네 자릴 호시탐탐 노리는 걸 막아 주었더니, 이젠 모르는 척을 해?”

    “제발 그만하십시오! 명령에 불복하고 탑에서 빠져나오신 것도 모자라, 적법한 결과대로 처형할 죄인에게 사사로이 손대셨으면서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페터의 말은 선황후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시해 사건의 주동자를 이사벨라 윈스턴으로 바꾸려는 그녀의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네가…… 네가 정녕.”

    선황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너를 위해 평생을 다 걸었는데 끝까지……!”

    그녀는 비명처럼 소리치며 바닥에 떨어뜨렸던 단도를 주워 들고 페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폐하!”

    기사들이 경악하며 페터를 지키러 달려갔으나 거리가 떨어져 있어 그녀를 막기엔 무리였다. 어머니가 제게 칼을 휘두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페터 역시 충격에 빠져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알렉시스는 페터의 앞으로 나서며 선황후를 막아섰다. 그녀가 휘두른 단도에 이번에는 어깨가 베였다.

    “대공 전하!”

    알렉시스는 그녀를 밀쳐 넘어뜨리고 가까이 다가온 기사에게서 장검을 빼앗아 휘둘렀다.

    파공음과 함께 젖은 지푸라기 인형처럼 늙은 여자가 풀썩 쓰러졌다. 길게 베인 가슴은 붉은 피로 물들고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팔과 어깨를 다치셨습니다. 얼른 치료를 받으셔야…….”

    기사들이 달려와 상태를 살폈으나 알렉시스는 손짓 한 번으로 그들을 물렸다. 이미 숨이 끊어진 선황후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페터가 얼어붙은 채로 서 있었다. 알렉시스는 검을 쥔 채로 가까이 다가갔다.

    “페터.”

    이름을 부르자 충격에 빠진 금안이 저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시스는 그에게 검을 쥐여 주었다.

    “이제 자루는 네가 쥐었다. 따를 테니 원하는 대로 해.”

    이 자리에서 바로 저를 찔러도 좋다는 뜻이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 페터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사벨라 윈스턴이야 처형한다 해도 친모를 죽일 수는 없었을 테니. 하지만 알렉시스는 선황후가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캐슬린은 그렇게 떠나 차가운 땅에서 아직도 홀로였다. 그러니 선황후는 제 손으로 죽여야만 했다. 유폐나 처형으로는 부족했다.

    페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이내 그만둔 그의 눈가가 젖어 들더니, 손에 쥔 검이 떨어졌다. 페터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죄인의 시신을 수습해라.”

    기사들이 머뭇거리자 그는 목소리를 더 높여 말했다.

    “이사벨라 윈스턴과 마가렛 콘로이는 선황을 시해한 죄를 물어 즉결 처분한 것으로 처리한다.”

    그리고 알렉시스를 돌아보고 말했다.

    “상처가 깊습니다, 형님. 어서 치료하세요.”

    태연함을 가장해 말한 페터는 천천히 나아가 어머니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흐느낌은 새어 나오지 않았으나 뺨은 온통 흐르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알렉시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돌아섰다.

    “대공 전하, 본궁으로 가시지요. 황궁의를 부르겠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시종장이 따라붙어 간청했으나 알렉시스는 거절했다.

    “돌아가겠다.”

    “출혈이 큽니다. 전하께서 이대로 떠나셨단 이야기를 들으시면 폐하께서도 걱정하실 겁니다.”

    알렉시스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황궁을 나섰다. 피에 젖은 옷을 보고 마주치는 이마다 모두 흠칫하며 놀랐지만 개의치 않고 말에 올랐다.

    피로했다.

    ‘차라리 페터의 손에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차마 루치를 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는 없어 일부러 강수를 두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부러 선황후가 탈출하도록 도발했고, 그녀가 단도를 숨기도록 눈감았다.

    부러 몇 번의 틈을 보였는데도 죽지 않아 허탈했다. 마지막에는 결국 제 손으로 이복동생의 친모를 죽이고 검을 쥐여 줬으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끊길 듯 끊기지 않는 목숨줄을 부여잡고 사는 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살아가는 날이 늘어날수록 피로만 높아졌다. 그녀를 핍박했던 이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통쾌함은커녕 사무치는 괴로움만 남았다.

    ‘너무 늦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

    그녀가 죽기 전에 해야 했던 일이었는데 이제야 무슨 소용인 걸까.

    알렉시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공저의 본관 앞에서 말을 멈추고 내렸다.

    “전하, 이제 오십…… 전하!”

    알스도프가 사색이 되어 달려 나왔다.

    “대체 이 상처들은 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분명 궁정 회의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피로 젖어 질척거리는 셔츠 자락을 대충 누르며 알렉시스가 물었다.

    “루치는?”

    “공자님은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유모와 에밀리가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치료를 받으시지요. 제가 카벨 선생을 불러오겠습니다. 빨리 안으로…….”

    “됐다.”

    그는 짧게 대꾸하곤 3층에 있는 아이의 방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자장가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알렉시스는 계단을 오르며 알스도프에게 말했다.

    “따르지 마. 혼자 있을 테니.”

    “전하!”

    귀찮았다. 어차피 이 정도로 죽지도 않을 텐데.

    알렉시스는 사용인들의 소란을 무시한 채로 3층으로 올라왔다. 바로 침실로 가려다가 그러려면 루치의 방을 지나쳐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만약 아이가 잠에서 깨 제 꼴을 보기라도 하면…….

    그는 뒷걸음질 쳤다. 아이에겐 이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캐슬린의 아이는 아비가 이런 인간이란 모른 채 자라길 바랐다.

    알렉시스는 무의식적으로 제일 가까운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순간 바로 후회했다.

    무레닌으로 떠나고, 북부에서 돌아온 이후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는 캐슬린의 침실이 저를 반겼다. 하얀 커튼이 흩날리듯 나부끼고 있었다. 그 커튼 사이로 몸을 숙인 채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알렉시스는 비척비척 걸어가 창가에 주저앉았다. 커튼을 쥐고 그것이 그녀의 머리칼이라도 되는 양 입술을 눌렀다.

    보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발.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도 좋으니까…….

    이대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던져 목숨을 끊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저승에서 만난 그녀가 저를 기꺼워할까를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으니 그러면 안 되는 거겠지.”

    알렉시스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토록 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했는데 또 쫓아가면, 네가 쉬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그녀가 그곳에서라도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런데 버티기가 힘들어, 캐슬린.”

    알렉시스는 커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루치가 아프지 않도록 돌보고 찾아가면 그때는 괜찮을까.”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으니까 그때는 먼발치에서라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테니까…….

    그러니까 죽은 후의 세상에서는 도망치지 말아 줘.

    그는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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