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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4)화 (84/110)
  • 84화

    간절한 그의 말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를 무릅쓰며 저를 도운 사람을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밀어낼 수가 없었다.

    ‘친구만이라면.’

    그가 지금의 관계에 만족하기만 해 준다면 그녀 역시 그와 멀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캐슬린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요제프가 일어나 창가에 내어 둔 디저트를 가지고 왔다. 커스터드 푸딩이었다.

    “먹어 봐요. 제가 만들었습니다.”

    “이것도 직접 만들었어요?”

    초보 요리사에게는 어려운 디저트인데 의외였다. 한 스푼 떠먹었는데 맛이 꽤 괜찮았다.

    “켈리가 만들던 걸 어깨너머로 보다 보니 어느새 레시피를 외우게 됐어요. 다른 디저트도 떠올리긴 했지만 여기선 재료를 다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말입니다. 맛이 어때요?”

    “맛있어요. 더는 제가 가르쳐 줄 건 없겠는데요.”

    “다행입니다. 켈리에게까지 인정받았으니 이제 어딜 가도 구박받을 일은 없겠어요.”

    요제프의 능청스러운 말에 어색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다시 편안한 친구가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해가 졌다.

    “저녁을 대접받았으니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아뇨. 제가 합니다. 그대로 앉아 있어요.”

    요제프는 끝까지 캐슬린이 손 하나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몇 번이나 실랑이했지만, 그가 강경하게 거절하며 얼른 개수대를 차지하는 바람에 캐슬린은 밀려나고 말았다.

    그녀는 요제프가 그릇을 닦는 사이, 식탁에 앉아서 내일은 무슨 일을 할지를 공유했다.

    “외숙부님께서 어머니가 쓰시던 방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어요. 꽃병 하나도 치우지 않으셨대요. 그래서 내일은 거기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에요.”

    “잘됐군요. 율리아나 님은 켈리처럼 얼음을 다루는 능력이 있으셨다고 하니, 관련해서 남겨 두신 기록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잘 찾아봐야겠어요.”

    대화를 이어 나가던 중, 캐슬린은 열려 있는 창가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이렇게 춥고 고도가 높은 지역에도 반딧불이가 사는 건가?

    일어나 창가로 가 보려는데 설거지를 마친 요제프가 다가왔다.

    “끝났습니다. 이만 가요. 데려다주겠습니다.”

    “아, 네.”

    그에게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난 창가에는 아까 보았던 반짝임이 사라진 후였다.

    “왜 그래요?”

    “창가에서 반딧불이를 본 것 같아서요.”

    “반딧불이요?”

    요제프가 의아한 낯으로 창가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고 밖을 살피다가, 문을 닫고는 다시 돌아왔다.

    “반딧불이는 없네요. 사실 카르미네는 추워서 그런지 곤충이 없는 편이에요.”

    “하긴 그렇죠. 제가 잘못 본 건가 봐요.”

    하긴 갑작스레 웬 반딧불이가 창가에 붙어 있을까. 밖이 아무리 깜깜하다 해도 작은 반딧불이 하나가 그리 크고 밝았을 리 없다.

    “아무래도 외숙부님을 따라 골짜기를 올라 갔다 와서 피곤했나 봐요. 데려다줄 테니까 얼른 가요.”

    요제프는 더 늦으면 카시엘 님이 저를 야단칠 거라며 서둘렀다. 듣고 보니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와, 캐슬린은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문을 닫던 요제프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문을 잠그고 가야겠어요. 혹시 모르니까요.”

    “네, 알았어요.”

    요제프는 캐슬린이 돌아선 틈을 타서 창가 아래 놓여 있던 자루를 들여다보았다. 안에 담겨 있는 마정석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요제프는 자루 안을 내려다보며 낯빛이 어두워졌다.

    한참 동안 카르미네 산맥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더니, 그가 북부 영지민을 시켜 근방에 가져다 놓은 것을 수비대가 들고 온 모양이었다. 설마 그녀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 리는 없을 테니.

    “요제프, 다 잠갔어요?”

    “네, 갑니다!”

    요제프는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며 자루의 끈을 묶은 후,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던져 넣었다.

    ‘너무 늦었어. 이젠 쓸모없는 물건이지.’

    캐슬린은 안전해졌다. 가족의 곁에서 보호받으며 상처 입었던 마음을 치유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걸 바랐던 게 아니었나.

    그러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안다면 그녀는 괴롭기만 할 테니까.

    요제프는 애써 그리 생각하며 캐슬린을 향해 돌아섰다.

    * * *

    “……하여, 윈스턴 가의 작위를 회수하고 이사벨라 윈스턴은 처형토록 한다.”

    투란 백작이 궁정 회의의 마지막을 알리는 안건의 결론을 발표했다. 마지막 순서로 내어놓은 안건임이 무색하게 결론은 쉬웠다. 귀족들이 모두 황제와 대공의 눈치를 보며 뜻을 같이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오늘 회의는 마치겠소.”

    페터의 말이 끝나자 알렉시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가 퇴장하기 전에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아무도 그의 행동을 지적하지 못했다.

    페터가 그의 뒤를 따라 회의실에서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아직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회의에 참석하시는 게 어딥니까. 저번처럼 대공가의 문을 닫아걸지 않으시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요.”

    “그땐 정말 내란이 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혹시 모르지요. 선황후의 처벌이 그저 유폐에만 그친다면 또…….”

    “말씀 삼가시지요. 아직 폐하께서 근처에 계실 텐데 들으시면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아직도 황제와 대공 사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이들이 많았다. 각축전이 일어나길 은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페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알렉시스는 꼬박꼬박 황궁에 걸음 하는 것이다. 저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질 것을 알면서도.

    ‘……괜찮을 리 없을 텐데.’

    캐슬린이 떠난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갔다. 카르미네에 파견한 탐색대는 성과 없이 되돌아왔다. 그녀의 시신은 물론이고 신발 한 짝, 찢어진 망토 한 자락도 찾지 못한 채로.

    그 사실을 전했을 때 알렉시스는 침묵했다. 그녀는 마지막엔 발텐에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것처럼 완벽히 그를 떠났다. 알렉시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대공저의 집사가 황궁으로 사람을 보내 그가 또다시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잠들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페터는 참다못해 대공저로 향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굴 것이면 루치를 데려가겠다고 협박했다.

    - 본인 몸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무슨 아버지 노릇을 하겠단 겁니까?

    이복형은 그 말에야 겨우 반응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내려다보며 아이의 방으로 향하려는 저를 가로막았다.

    - 돌아가라.

    짧은 말 한마디뿐이었으나 아이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페터는 그 뒤부터는 알렉시스가 더는 스스로 학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그는 이전처럼 돌아왔다. 황실의 방계이자 황제의 하나뿐인 형제로서 의무를 다했다. 정기적으로 궁정 회의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부관인 라일런트 자작을 보내 지방 영지를 다스리고. 거느리던 기사단을 정비해 돌보았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전처럼은 아니지.’

    잘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알아차릴 수 없겠지만, 페터는 알았다. 그가 이전과 같아 보이려고 굴고 있지만 실상은 아니란 것을.

    알렉시스는 황궁에 심어 두었던 제 세력을 모두 거두어들였다. 황제와 황후 주변을 지키도록 해 두었던 발텐 소속의 기사들을 모두 불러들였고, 셴베르크 백작의 뒤를 밟던 그림자도 없앴다.

    황태자 시절 그 모든 사실을 알고서도 눈감았던 페터는 그의 변화가 못내 불안했다. 황제 자리에 관심이 없음을 드러내 밝힌 것이니 안심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이복형은 저를 위해 그리 세심하게 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차라리 삶에 대한 목적과 의지를 잃어버렸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세력이나 명분, 분노나 복수, 그 어떤 세속의 알력 다툼과 감정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고 모두 끊어 버린 것이다.

    알렉시스는 대공의 의무로서 참석해야 하는 최소한의 자리를 빼고는 모든 외부 활동에도 불참하고 대공가의 저택에만 머물렀다. 하염없이 아이만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이전에 저지른 그의 죄에 대한 대가라는 사실을 알지만, 가슴이 아팠다. 이복형인 알렉시스도, 친구였던 캐슬린도 모두 페터에게는 안타깝기만 한 사람들이었다.

    “폐, 폐하! 폐하!”

    막 본궁으로 향하는 찰나, 서쪽 탑을 맡아 지키는 기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서쪽 탑의 소식은 중대 사실이 아니면 보고하지 않도록 조치해 두었다. 그런데 부관도 아니고 이리 황제에게 직접 고할 정도면 단순한 일이 아니란 뜻이었다.

    “서, 선황후께서 탈출하셨습니다!”

    “뭐? 탈출이라니?”

    그러나 그가 고한 내용은 언젠가는 일어나리라 짐작했던 자결보다 더 뜻밖이었다.

    “어머님께서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자,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는 잘 계셨다고 하는데, 오후에는 한 번도 시녀를 호출하지 않으시기에 들여다보니 이미 안 계셨습니다.”

    눈앞이 아찔했다. 그래도 제가 황제 자리에 앉았으니, 어머니도 만족하고 여생은 죄를 뉘우치며 사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황궁에 병사를 모두 풀어서라도 찾아내라. 당장!”

    페터의 격앙된 음성에 호위 기사는 물론이고, 곳곳을 경비하던 하급 병사까지 허둥지둥 뛰어다니며 수색을 시작했다.

    다급하게 어머니가 갈 만한 곳을 꼽아 보던 페터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오늘일까.’

    허점을 노린다면 다른 날이 기회가 더 많았다. 제가 황궁을 비웠을 때라거나, 아니면 형님이 대공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을 때가 탈출에 더 유리했다. 오늘은 궁정 회의가 열리는 날이라 귀족들이 모두 입궁하는 걸 아실 텐데 굳이 오늘을 택한 이유는…….

    ‘궁정 회의 결과를 들으셨기 때문인가?’

    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서쪽 탑에서 빠져나올 만한 주제라면…… 이사벨라 윈스턴의 처형뿐이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일을 그르치게 한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페터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지하 감옥을 향해 내달렸다.

    “폐하! 어디 가십니까?”

    뒤에서 시종장이 애타게 불렀으나, 페터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선황후의 탈출 때문인지 지하 감옥은 지키는 간수 하나 없이 고요했다. 왠지 모를 싸늘한 기운에 몸이 덜덜 떨렸다. 페터는 입구의 횃불을 하나 뽑아 들었다. 아래로 내려가 이사벨라 윈스턴이 안전하게 갇혀 있는지 확인할 참이었다.

    그런데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한 발짝을 디뎠을 즈음, 누군가 안쪽에서 어깨를 세게 밀치고 뛰어나왔다.

    “윽!”

    페터는 횃불을 놓치고 휘청였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사람의 발목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곧바로 걷어차였다.

    “아……!”

    시야가 거꾸로 돌며 몸의 중심이 흔들렸다. 붙잡을 것도 없어 그대로 계단에서 추락하기 직전이었다. 페터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려 팔을 위로 올렸다.

    그때 누군가 그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페터는 휘청거리며 그의 쪽으로 쓰러졌다. 단단한 몸에 얼굴이 부딪쳐 얼얼했으나 다행히 추락은 면했다.

    그는 페터가 안전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팔을 놓고 바깥으로 나섰다. 입구에 이른 그가 밝은 빛에 얼굴이 노출될 때에야 비로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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