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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3)화 (83/110)
  • 83화

    카르미네는 춥고 척박했으나, 우스문트의 사람들은 따뜻했다.

    카시엘은 가주로서 작은 성에, 다른 사람들은 그곳의 바로 앞에 함께 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그들의 집은 마이어나 윈스턴, 심지어는 무레닌에서 보았던 평민들의 집보다 소박했지만 캐슬린은 이곳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바로 그들의 저녁 시간 때문이었다.

    그들은 종종 저녁이 되면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서 장작불을 피우고 음식을 나누며 함께했는데, 서로를 향한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다. 내내 정에 목말랐던 캐슬린에게는 동화 같은 광경이었다.

    요제프의 권유에 못 이겨 처음 저녁에 밖으로 나갔을 때, 카시엘의 환대와 마찬가지로 우스문트의 사람들은 모두 캐슬린을 반겼다.

    “율리아나 님의 따님이시라고요? 세상에!”

    “그러고 보니 정말 율리아나 님을 꼭 닮으셨어요.”

    무레닌을 떠날 때 갈색으로 물들였던 머리는 지금 이미 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던 터라, 그녀의 머리와 눈을 본 이들은 늘 율리아나를 입에 올리곤 했다.

    윈스턴 영지든 마이어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동시에 호의를 표하는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홀로 기억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같이 추억해 주는 이들로 인해 곧 자연스레 마음을 열 수 있었다.

    “내 말이 맞지? 다들 너를 반길 거라 하지 않았니.”

    캐슬린이 어제는 함께 버섯을 구워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카시엘이 뿌듯하게 말했다.

    “우스문트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단다. 아마 네 머리가 갈색이었다 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을 거다.”

    “네. 정말로 집에 온 기분이에요.”

    어머니가 떠난 이후 윈스턴에서도, 마이어에서도 이런 기분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늘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으면 홀로 지내던 일이 아주 옛날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없었던 일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만큼 편안하고 따뜻했으며 행복했다.

    “다 왔다.”

    흐뭇하게 웃던 카시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캐슬린도 그를 따라 멈춰 섰다.

    “여긴 율리아나가 제일 좋아하던 곳이란다. 이 나무에 그네를 달아 놓고 놀곤 했지. 저 아래로 떨어지는 척하며 나를 놀려 먹기도 하고.”

    눈이 가득 쌓인 낭떠러지는 카르미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 만큼 광활했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이라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율리아나는 늘 바깥세상을 궁금해했어. 우리가 카르미네에만 숨어 있다면 바뀔 것이 없다며 제국과 대화하길 원했지.”

    카시엘은 절벽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우스문트의 여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져도, 다른 세상으로 나가길 원하는 사람을 막을 순 없다면서 추격하지 말자고 간청했지. 제가 나가서 찾아보고 필요하다면 제국과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말이야. 그만큼 어리석을 정도로 착했어. 나도 그 애의 말에 설득되어 버릴 정도로.”

    “외숙부님…….”

    “하지만 그건 착오였어. 제국의 귀족들은 우리를 사람이 아닌 장식품쯤으로 생각할 뿐인데. 율리아나를 지키지 못한 건 다 내 잘못이다. 그러니까, 너만큼은 내가 보호할 거다.”

    그는 뒤돌아서 캐슬린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캐슬린 윈스턴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 발텐 공작 부인이니 대공비니 하는 제국의 신분 따위도 잊어라. 우리와 함께 켈리 우스문트로 살아.”

    켈리 우스문트.

    스스로 택한 이름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가족의 이름이었다. 입 안으로 외워 보는 낯선 이름은 자유롭게 느껴졌다. 어떤 의무도 없고, 아무도 저를 비난하지 않으며 태어난 그대로 살아도 된다는 허락 같았다.

    우스문트의 근거지는 수백 년 동안 제국의 눈을 피해 숨어왔던 만큼 완벽한 은신처였다. 원한다면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머무를 수 있었다.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 엄마!

    웃으며 팔을 벌리고 뛰어오는 루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애를 잊고 모른 척 살 수 있을까. 그 외로운 곳에 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둘 수 있을까…….

    - 나 두고 떠나지 마.

    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아니, 다른 얼굴이 아니었다. 어린 루치의 원래 얼굴에 숨어 있는 얼굴의 남자였다. 아이의 아버지인 알렉시스 발텐이었다.

    ‘멍청한 생각 하지 마.’

    캐슬린은 혀를 깨물어 억지로 그 남자의 얼굴을 지워 냈다.

    “네 아이를 떠올리고 있는 거지?”

    카시엘은 이미 그녀의 생각을 짐작한 듯했다.

    “미안하구나. 운이 좋았다면 그 아이도 함께 데려올 수 있었을 텐데, 마침 지진이 나는 바람에 저번처럼 산사태를 일으킬 순 없었다.”

    “산사태를 일으키다니요?”

    저번처럼이라면, 처음 카르미네에 왔을 때 알렉시스와 함께 조난을 당했던 때를 말하는 거였다.

    “혹시 그 산사태를 외숙부님이 일으키신 거였나요?”

    “그래. 우스문트의 직계가 가질 수 있는 능력 중의 하나지. 보통은 남성의 능력이란다. 네가 얼음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가 시험 삼아 절벽 너머의 아득한 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우르릉하며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산 정상에 하얗게 쌓여 있던 눈이 무너져 내렸다.

    “제국에서 사는 동안 어땠니?”

    카시엘이 물었다.

    “저는…….”

    말문이 막혔다. 행복하기도 했고 죽을 만큼 괴롭기도 했다. 복합적인 감정에 무어라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카시엘이 조용히 말했다.

    “신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축복을 제국에서는 저주라 부른다지. 그들은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질투한다. 우린 본질적으로 그들과 어울릴 수 없어.”

    “…….”

    “함께 왔다면 받아 주었겠지만 어쩔 수 없구나. 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으니 잊어버리거라.”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에 캐슬린은 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카시엘에게는 겨울 요정족을 전리품 취급하는 제국 귀족들에 대한 증오가 깊게 뿌리내려 있었다. 그러니 발텐 대공의 아들인 루치에 미련이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만 내려가자꾸나.”

    캐슬린을 토닥이며 카시엘이 앞장섰다. 그녀는 외숙부의 뒤를 따르면서 애써 생각했다.

    ‘루치는 괜찮을 거야.’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이를 악물었다. 지금 돌아가면 모든 일이 수포가 된다. 루치의 상태도 호전됐고, 에디스가 만든 약도 아직 충분하다. 시간이 지나면 저를 찾는 이들도 사라질 테고 경계도 줄 것이다. 그때 외숙부님을 설득해서 루치를 데려오도록 하면 된다.

    절벽에서 다시 내려왔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벌써 집마다 사람들이 나와 저녁을 나누어 먹는 모습이 보였다.

    “켈리!”

    요제프가 멀리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를 발견한 카시엘이 캐슬린을 향해 말했다.

    “가 보렴.”

    “함께 가요, 외숙부님.”

    캐슬린의 말에 카시엘이 웃으며 등을 떠밀었다.

    “되었다. 요제프도 네가 홀로 오길 바랄 텐데.”

    “적적하실 텐데 괜찮으세요?”

    “난 쉬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놀다 와.”

    그는 한사코 거절하며 성 입구로 걸음을 돌렸다. 캐슬린은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늦지 않게 돌아갈게요!”

    “벌써 갈 생각부터 하는 겁니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요제프가 농담을 던졌다.

    “켈리에게 대접할 저녁을 만드느라 오늘 오후부터 공들였는데, 섭섭해지려고 합니다.”

    “그럴 리가요. 외숙부님이 외로우실까 걱정이 되니까 그렇죠.”

    “당신이 없을 때도 쭉 홀로 사신 분입니다. 저녁 몇 시간쯤은 곁에 없어도 괜찮아요.”

    “알았어요, 알았어.”

    캐슬린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집으로 향했다.

    “요제프에게 음식을 대접받는 날이 오다니.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때는 잊어 주세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요. 옆집 아주머니의 구박을 참고 새롭게 거듭나려 얼마나 노력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정말요? 오솔레에서는 정말 심각했잖아요. 마음 놓고 먹어도 되는 거 맞죠?”

    “그렇다니까요.”

    요제프는 호언장담하며 집 문을 열어 주었다.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는 부엌의 벽난로에는 불꽃이 평화로운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요제프의 호언장담대로 그의 요리 솜씨는 괄목할 만한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식전 수프부터 메인 요리까지, 수준급이라 할 수는 없어도 평범한 맛이 나는 음식들에 캐슬린은 감탄했다.

    “그동안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겠어요.”

    “이제야 믿어 주다니. 수습 신관 딱지를 떼었을 때보다 더 기쁩니다.”

    캐슬린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요제프가 한결 마음을 놓은 얼굴로 과일 음료를 밀어 주었다.

    “이제야 진심으로 웃는 걸 보네요.”

    “아…….”

    “힘든 거 압니다.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꼭 루치를 다시 데려올게요.”

    “아니에요. 지금까지 절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한걸요. 카르미네에서 외숙부님을 찾아 제 이야기를 해 준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전 켈리를 도와준 게 아닙니다.”

    요제프가 가만히 말했다.

    “저번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온전히 제 선택으로 한 일입니다. 그리 생각하지 말아요.”

    “……미안해요.”

    “미안해하지도 말고요.”

    그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냥 그렇게 웃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부터 제가 바란 건 그뿐이었어요.”

    “요제프…….”

    이유 없이 베푸는 호의란 없었다. 적어도 캐슬린은 그리 믿었다. 그러니, 아무리 신을 모시고 평화를 사랑하는 신관이라 해도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내던질 수는 없었다.

    어쩌면 오솔레에서, 아니 발텐 공작저에서 함께 지내던 그때부터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제게 다가온 사람이 다시 멀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비밀을 공유하고 저를 믿어 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그와 같은 마음이 아닌데도 먼저 드러내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해야 했다. 더 이상 그가 스스로를 희생해 가며 시간을 낭비하게 해서는 안 됐다.

    “당신은 좋은 친구예요. 늘 고마워하고 있어요. 다만…….”

    “네, 압니다. 저는 당신의 친구죠.”

    그러나 요제프는 그녀가 조심스레 꺼낸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전 켈리에게 무엇이든 강요할 마음 없습니다. 당신이 제게 원하는 모습으로 있을 거예요. 그대로 있어 줄게요. 만약 당신이 루치의 아버지를 필요로 한다면 아버지로, 선생이 필요하다면 선생으로.”

    “…….”

    “제가 원하는 건 딱 그 만큼입니다. 당신 곁에 머무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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