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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2)화 (82/110)
  • 82화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 몸이 무거웠다.

    - 안 돼!

    절박한 음성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갈라진 땅속으로 기억과 시간조차 함께 떨어진 것인지, 자꾸만 그 소리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죽기 직전에는 살아 있을 적의 기억이 하나씩 다 스친다던데 왜 다른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사라져……!’

    팔이라도 휘저어 쫓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아 캐슬린은 한참이나 그렇게 멈추어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이 아득한 기분으로,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일이 지났는지 알 수도 없을 즈음이었다. 예고도 없이 눈꺼풀이 반짝 들렸다.

    ‘……죽지 않았구나.’

    흐려진 초점이 점차 시간이 지나 명확해지고, 시야가 트일 때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건지.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누운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은 정갈하고 소박했다. 적어도 마이어로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걸친 옷도 희한했다. 대공비의 옷도, 도망칠 때 입었던 옷도 아니었다. 편안하고 깔끔했지만 난생처음 보는 형태의 복식이었다. 캐슬린은 밖으로 나가 보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이마에서 무언가 떨어진 것을 보고 그것을 주워 들었다. 물수건이었다.

    아직 마르지 않아 축축했다. 누군가 곁에서 보살펴 준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바라보다 들어오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

    연녹색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이더니, 이내 반가운 빛을 띠었다.

    “켈리!”

    그가 달려와 와락 껴안았다.

    “요제프……?”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사람인데도 막상 마주치게 되자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저를 안은 품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캐슬린은 꿈을 꾸는 게 아니란 사실을 점차 받아들일 수 있었다.

    “드디어 깨어났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요제프, 당신이 맞나요?”

    얼떨떨하게 묻자 그가 포옹을 풀어 제 얼굴을 자세히 보여 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네, 맞습니다. 잘 봐요.”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약속했잖습니까? 북부로, 카르미네로 가서 살자고.”

    마지막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말이었다. 캐슬린은 울컥하는 마음에 울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다.

    “고마워요. 이렇게 약속을 지켜 줘서.”

    “아닙니다. 켈리가 이곳으로 와 주어서 만날 수 있었던 거죠. 오히려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요제프는 부드럽게 말하며 그녀의 몸을 살폈다.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곳은 없어요? 거의 두 달 가까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렇게나 오래요?”

    캐슬린이 놀라며 물었다.

    오랫동안 깨지 못했던 같기는 했지만,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이 어제의 일처럼 아직도 생생해서 그리 시간이 많이 흘렀을 줄은 몰랐다.

    “네. 갈라진 지반 사이에서 당신을 발견해 구출해 왔는데, 그때부터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다친 곳은 즉시 치유력을 써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눈을 뜨지 못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앞으로도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요제프는 이마에 열이 오르지 않았는지 재차 확인했다. 캐슬린은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요제프. 혹시…… 루치는 어떻게 됐나요?”

    그러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그의 눈빛이 멈칫하며 떨리는 것을 보고 캐슬린은 답을 짐작했다.

    ‘데려오지 못했구나.’

    요제프는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루치도 함께 구해 오고 싶었지만, 기사들이 엄호하고 있어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픈 아이를 떼어 놓고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루치 옆에서 떨어지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탈출에 성공하는 것만 신경 썼지 아이와 떨어지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쩔 수 없던 상황이라는 걸 알았지만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함께 떨어졌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몰라.’

    저도 부상을 당해 오랜 시간 정신을 잃었는데, 어린아이였다면 상태가 더 심했을 것이다. 캐슬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라리 다행이라 되뇌었다. 루치는 에밀리가 잘 돌봐 줄 거고, 에디스도 있으니 당분간 위험할 일은 없을 거다.

    ‘그 사람도 아이를 해치지는 않을 거야.’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루치를 대하는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제가 없다고 해서 아이에게 해를 가할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억지로 그렇게 스스로 위안하려 애썼으나, 요제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설명했다.

    “무장한 기사들에 대적하는 건 위험이 너무 컸던 터라…… 켈리가 땅속으로 떨어져서 먼저 구하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지진 이후 산사태가 일어나진 않았고, 루치는 무사합니다. 나중에 다시 데려올 기회가 있을 거예요.”

    “네…… 이해해요. 그런데 요제프.”

    캐슬린은 저를 위로하는 그의 말 가운데서 이상한 점을 느끼고 물었다.

    “혹시 제가 땅속으로 떨어질 때 근처에 있었나요?”

    처음에는 우연히 땅속에 떨어진 저를 발견해서 데리고 온 줄로 알았는데, 요제프는 마치 그 광경을 생생히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네.”

    요제프는 조용히 말했다.

    “여기선 카르미네를 지나는 이들의 기척을 모두 살피고 있어요. 단순히 지나쳐 가는 이들이라면 그대로 두지만 깊숙이 들어오는 자들이라면 감시 인원이 따라붙죠. 그래서 켈리가 이곳으로 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막 찾으러 가던 찰나에 공작이 뒤쫓아왔고요.”

    “그랬군요. 그런데 감시 인원이라니요?”

    그러고 보니 이곳은 신전 같지는 않았다. 캐슬린은 그제야 요제프에게 들어야 하는 말이 아직 남았음을 알아차렸다.

    “찾았습니다, 겨울 요정족. 켈리와 피가 이어진, 같은 가문의 사람들 말입니다.”

    따뜻한 연녹색 눈이 다정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과 함께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켈리를 무척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아…… 그러면 혹시.”

    처음 카르미네에 왔을 때 마주쳤던 그 사람이 맞는 걸까?

    혹시나 하는 의문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맞아요. 그분이 켈리의 가족입니다.”

    요제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켈리가 깨어난 걸 알면 무척 기뻐할 거예요.”

    가족.

    살면서 제일 간절하게 원했던 존재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쭉 홀로였던 그녀는 늘 가족을 갖길 꿈꿔 왔으나 그러지 못했다. 루치가 태어난 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미약하게 가족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제게 가족이 있었다니.

    감격에 빠진 것도 잠시 반가움 뒤에 숨어 있던 두려움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혹시 잘못 아는 건 아닐까. 어머니 외에도 사로잡혔던 겨울 요정족은 여럿이었는데, 어머니가 아니라 다른 분의 가족이라면…….’

    멋대로 기대를 품었다가 제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실망했던 적이 여럿이어서 망설임이 앞섰다.

    그러나 요제프에게 자세한 것을 묻기도 전에 누군가 복도를 걷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요제프. 오늘도 깨어나지 않았나? 혹시나 잘못된 건 아닌지 다시…….”

    안으로 들어서던 푸른 눈이 캐슬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와 같은 눈이 시릴 듯한 은발을 가진 남자는 호리호리하게 키가 크고 젊은 인상이었는데, 하던 말을 맺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카시엘 님.”

    요제프가 급하게 일어나며 알렸다.

    “켈리가 깨어났습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눈빛이 캐슬린을 살폈다. 그는 이내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를 껴안았다.

    “깨어났구나.”

    물기 어린 음성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 한마디에 캐슬린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랜 시간 널 찾아 헤맸다. 이제야 다시 만나다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도 따뜻해서 눈물이 났다.

    “정말 율리아나와 많이 닮았구나.”

    “흑…….”

    그리고 그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나왔을 때, 캐슬린은 울음을 터뜨렸다. 저를 안은 팔이 다시는 거두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너무 늦게 찾았지만, 대신 이제는 절대 널 잃어버리지 않겠다. 약속해.”

    그는 그렇게 몇 번이고 계속해서 캐슬린을 달랬다.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치고 진정한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힌 후에야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카시엘 우스문트다. 네 어머니의 오라비고, 너에게는 외숙부가 되지.”

    “우스문트 가의 가주님이기도 합니다.”

    요제프가 설명을 덧붙였다.

    “전설에 겨울 요정이라 불리던 이들은 모두 우스문트 가에 속한 이들이라 합니다. 다만 직계는 카시엘 님과 켈리의 어머님이셨던 율리아나 님이 유일하고요.”

    “은발에 푸른 눈. 그게 우스문트의 직계 후손이라는 증거지.”

    사파이어처럼 짙은 눈에는 동생의 딸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게다가 신께 받은 축복 또한 나와 율리아나만을 통해 이어지고.”

    카시엘은 캐슬린의 손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래서 그때 너와 마주쳤을 때 생각했다. 어쩌면 율리아나의 딸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제 능력을 보고 무언가 물으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기묘한 감정은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네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더 빨리 찾았을 텐데, 너무 늦었어. 날 용서해 다오.”

    “저를 받아들여 주시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캐슬린은 겨우 그리 말했다. 그녀는 율리아나 우스문트의 딸이기도 했지만, 에버튼 윈스턴의 딸이기도 했다.

    카시엘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저를 배신자의 딸이라 불렀다. 아비인 윈스턴 백작은 가신들과 함께 겨울 요정족을 납치해 갔던 자이니, 그의 피를 이은 저를 그리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끔 다정한 말이 이어졌다.

    “그런 말 말아라. 넌 우스문트의 사람이야. 율리아나의 딸이니 내 딸이나 다름없고.”

    그러나 카시엘은 단호하게 캐슬린의 죄책감을 깔끔하게 잘라 냈다.

    “잘 돌아왔다.”

    그의 말에 따뜻한 기운이 가슴에서부터 퍼져 나와 넘실거렸다. 그와의 사이에 이어진 끈끈한 유대의 감정이 비로소 이 세상에서 제가 발 디딜 곳을 마련해 주는 것 같았다.

    “감사해요, ……외숙부님.”

    그 말에 카시엘이 웃음 지으며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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