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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1)화 (81/110)
  • 81화

    “아빠?”

    평소처럼 가까이 다가와 안아 주지 않는 그가 이상했는지 루치가 갸웃하며 두 팔을 벌렸다.

    그런 행동을 하는 걸 보면 제가 알던 아이가 맞는데, 신기루처럼 가물거리며 얼굴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캐슬린처럼 예쁘게 동그란 이마, 선하게 휘어진 눈매. 늘 호선을 그리는 입술 따위가 미묘하게 변했다.

    입매가 날카로워지게 바뀌고 턱도 조금 더 갸름해졌다. 부드럽고 따뜻하던 인상이 순식간에 냉정해졌다. 빛나던 눈 색은 그대로지만 모양새 또한 달라졌다. 캐슬린과 똑같았던 콧날도 사라졌다.

    알렉시스는 멍하니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비척비척 걸어갔다. 그러다 제 발에 걸려 휘청이기까지 했다. 부정하고 싶었다. 이 아이는 분명 루치아노였다. 캐슬린이 낳은 아들이다. 그런데 대체 왜…….

    가까이서 본 아이의 얼굴은 이제 다시 변하지 않았다. 착각이 아닐까, 아이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어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러나 고사리손으로 제 얼굴을 매만지는 아이의 얼굴은 실재하고 있었다.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혈류가 역행하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다.

    “아빠!”

    루치가 칭얼거리며 팔을 뻗어 알렉시스의 목을 안았다. 그는 숨을 크게 헐떡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는 바람에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놓치며 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주인님, 괜찮으십…… 어.”

    “고, 공자님이…….”

    “이, 이게 무슨!”

    등 뒤에서 사용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리라.

    알렉시스는 더듬더듬 제 목에 매달린 아이를 보듬어 안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빠, 왜 그래?”

    순진한 눈으로 물어 오는 아이의 목소리는 제가 아들로 삼았던 루치가 맞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가까이서 들여다본 아이의 얼굴은 그 루치가 아니었다.

    아이의 얼굴은 캐슬린이 아닌 저를 닮아 있었다.

    “안 돼…….”

    공포감이 온몸을 덮쳐 숨쉬기가 어려웠다. 순식간에 눈물이 후두두 쏟아졌다.

    “왜 울어요?”

    영문을 모르는 루치가 작은 손으로 눈가를 매만졌다. 엉성한 행동에 왈칵 눈물이 더 솟아 나왔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헉, 허억.”

    폐로 몰려든 공기가 뜨거워진 착각이 들었다.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이 불타는 듯했다.

    뭔가 잘못됐어…….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당장 신전이든 연금술사든 불러서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돌려놔야 했다.

    알렉시스는 한쪽 팔에 아이를 안고 다른 한쪽 팔로 바닥을 짚어 일어나려 했다. 그러다 손바닥이 베이는 느낌에 내려다보니 산산이 조각난 거울이 보였다.

    거울 조각에 붉은 피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는 거울 조각에 비친 저와 아이의 모습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누가 보아도 친 부자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럴 리 없다.’

    캐슬린은 루치가 요제프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럼 아이가 이리 생겨선 안 된다.

    아이는 제가 부르기 전까지 분명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거울을 매개로 사술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캐슬린이나 루치를 모함하여 해치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이에게 거울을 쥐여 준 자를 당장 끌고 오라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사용인들 사이를 헤치고 페터가 뛰어 들어왔다.

    “형님, 드릴 말씀이……!”

    그의 이복동생은 아이의 얼굴을 발견하고 나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깨진 거울 조각에 시선을 두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알렉시스는 겨우겨우 숨을 몰아쉬며 페터를 향해 말했다.

    “누군가 사술을 부렸다. 대공저에 숨어들어 감히 공자를 이리 만들었어. 황명으로 신전에 연락을 취해 다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페터는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품에서 아이를 빼앗아 안았다. 루치는 평소와 달라진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어 울먹이다가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페터에게 곧장 안겨들었다.

    “사술 따위는 없습니다.”

    “너도 보이지 않느냐! 아이의 얼굴이 정상이 아니다. 분명 캐슬린을 닮았는데, 지금은…….”

    “형님을 닮았죠.”

    그가 단호하게 말을 자르며 손짓해 에밀리를 불렀다. 주춤거리며 다가온 그녀가 아이를 받아 안는 사이, 페터가 말했다.

    “원래 이 아이의 얼굴은 이랬어요. 잠시 치유술로 바꿔 놓았던 것뿐이지요.”

    “그게, 그게 무슨 소리지?”

    “루치는 형님의 아들입니다.”

    페터의 말에 에밀리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하셨는데…….”

    알렉시스와 페터가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자, 에밀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분명 마님께선 공자님이 주인님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분명히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녀는 발텐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알길 원했습니다.”

    페터가 다시 알렉시스를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특히 알렉시스 발텐이 그리 믿어 주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제프에게 부탁해 얼굴을 바꾼 겁니다.”

    아이와 페터를 번갈아 보는 눈에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으나 부정할 수 없는 고통이 담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너무도 자신을 닮았고, 캐슬린이 만약 정말 제 아이를 가졌다면 밝혔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기가 맞지 않아.”

    떨리는 입술로 제기한 의문은 단순했다. 알렉시스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이 아이는 태어난 지 이제 겨우 2년 되었다. 그녀가 내게서 도망친 후에 낳은 아이야. 만약 내 아이라면 다섯 살은 돼야 해. 그런데 어떻게…….”

    “형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잉태 기간이 더 길었다면요?”

    “……뭐?”

    페터는 말문이 막힌 이복형을 향해 몸을 낮추어 앉으며 비밀을 알려주었다.

    “캐슬린은 세 해 동안 아이를 품었습니다. 북부의 겨울 요정족 핏줄 때문이라더군요.”

    “…….”

    “처음 형님으로부터 도망쳤던 그때, 캐슬린은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더 자세히 말해.”

    알렉시스가 숨을 크게 헐떡이며 멱살을 잡았다. 페터는 계속해서 말했다.

    “요제프는 그녀의 임신을 진단해 준 신관이었고, 저는 형님 대신 그녀의 보호자로서 델라포스에 요청하여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녀가 임신을 알고서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그리고 또 기뻐했는지. 카르미네에서 제 능력을 펼쳐 보인 대가로 아이를 자식으로 받아 달라 하려 했으며, 그가 냉정하게 그녀를 밀어냈을 때, 죽음을 생각하여 도피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까지.

    캐슬린 윈스턴이 알렉시스 발텐을 사랑했던 그간의 시간을 다 털어놓았다.

    멱살을 틀어쥔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알렉시스 발텐은 넋을 놓은 듯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초점을 잃은 금안이 아득한 과거의 기억을 헤집는 듯했다. 시녀의 품에 안긴 아들에게는 조금도 가 닿지 않았다.

    예상하기는 하였으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쩔 수 없나.’

    알렉시스 발텐은 전갈 독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가족으로서, 페터는 이복형이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어야 좋을 목숨이라 생각하고 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제 모습을 그대로 닮은 아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그 아이가 죽은 아내를 그리게 하는 마지막 동아줄이었으니 더더욱.

    “힘드시다면 당분간 루치는 제가 황궁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형님께서 마음을 추스르시고 난 후에 다시 기별하시면 돌려보낼 터이니…….”

    “으아앙!”

    얌전히 에밀리의 품에 안겨 있던 루치가 느닷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평소처럼 우는 것이 아니라 목청이 찢어지도록 발버둥 치며 울었다. 신생아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공자님, 왜 그러세요? 갑자기 왜 이러시지…….”

    에밀리가 당황하며 다친 곳이 있는지 이리저리 확인했다. 그러나 아이는 얼굴이 빨갛게 변할 때까지 고집을 부리며 바둥거렸다.

    순간 흐려졌던 금안에 이채가 어렸다. 알렉시스는 몸을 일으켜 서더니 에밀리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내.”

    “예?”

    “내 아들, 내게 달라고 말했다.”

    피로 엉망이 된 주인의 한쪽 손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에밀리가 페터를 쳐다봤다. 페터는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이는 형을 훑어보고,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에 감아 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루치는 아비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울음을 멈추었다. 안기자마자 작은 팔로 목을 꼭 끌어안고 딸꾹질하는 모습이 못내 서러운 울음을 참는 듯했다.

    알렉시스는 아이를 한쪽 팔로 안은 채 말없이 등을 쓸어내렸다.

    ‘……괜찮은 건가?’

    페터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처럼 아이를 내치거나 냉대할 것 같진 않았다.

    “페터.”

    침묵을 깨고 알렉시스가 탁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 아이가 정말 내 피를 물려받았나?”

    “……예.”

    “캐슬린과 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떠난 거군.”

    감긴 손수건에 핏물이 더 배어 나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알렉시스는 주먹을 부르쥐었다.

    “이 애가 내 자식이 아니니 두고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었는데. 처음부터 아니었어. 내 자식이니까 그리 쉽게 내 손을 놓고 떠난 거였어, 캐슬린은.”

    “형님…….”

    너무 늦게 맞춰 본 진실의 조각이 가슴을 벤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놓을 수가 없었다. 그의 아내가 남기고 간 마지막 흔적을. 저를 사랑했던 증거를.

    “아이는 아무 데도 보내지 않는다.”

    얼굴이 누구를 닮아 어찌 생겼든 상관없다. 그녀가 낳은 아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저를 아비라 여기고 품에 안겨 심장을 맡기는 작은 생명은 그에게 여전히 구원이었다.

    그는 스스로 각인시키듯 힘주어 말했다.

    “루치아노 발텐은 내 아들이다.”

    캐슬린은 부정하고 숨겼으나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두고 간 핏줄은 제 것이었다. 누구든 알게 하고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리라.

    품 안의 아이가 과거 어느 때 안겨 오던 그녀처럼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그녀를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가 뼛속까지 밀려들었다.

    그래도 아이는 놓을 수 없었다.

    알렉시스는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팔에 힘을 주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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