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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0)화 (80/110)
  • 80화

    ‘내가 그녀를 죽였다.’

    온몸의 혈관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펄떡거렸다. 그녀의 심장은 북부에서 홀로 싸늘하게 식어 멈추었을 텐데, 제 심장은 변한 것 없이 살기 위해 뛰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제 것을 뽑아내 그녀의 가슴에 박아 넣고 싶었다. 그는 스스로 제 가슴을 쥐어뜯었다. 얇은 실내복으로 가려진 가슴께의 살갗이 쥐어뜯겨 피가 흘렀다.

    보다 못한 페터가 가까이 다가와 뜯어말렸다.

    “제발 그만해요! 정말로 죽을 셈입니까?”

    저를 향하는 금빛 눈이 공허했다.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나 한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페터는 이를 악물고 모질게 말했다.

    “그렇게 굴면 캐슬린이 살아 돌아옵니까? 형님이 했던 짓이 없었던 일이 되냔 말입니다.”

    “…….”

    “그러기에 왜 끝까지 변하지 못하셨습니까. 억지로 그녀를 데려다 놓았으면 그 이후부턴 솔직하셨어야지요!”

    캐슬린이 마이어를 떠나기 전 작별 인사를 하며 주었던 쪽지에는 그간의 사정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페터는 두 번째 기회를 놓친 이복형이 안타깝기도 했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두 번이나 배신당한 그녀의 심경 또한 이해하지 못할 수가 없어 슬펐다.

    “형님은 죽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는 알렉시스의 팔을 억지로 잡아 일으켰다.

    “그녀가 남기고 간 아이를 지키세요. 루치의 아버지는 형님이니.”

    캐슬린이 남기고 간 비밀을 털어놓아도 알렉시스는 반응이 없었다.

    “형님?”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페터가 힘을 실어 어깨를 흔드는 순간, 알렉시스는 그대로 쓰러졌다.

    “형님!”

    외마디 비명과 함께 투박한 소리가 나자 벌컥 문이 열리며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뛰어 들어왔다.

    가슴께가 피로 물든 채 정신을 잃은 발텐 대공과 그를 안은 황제.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본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카벨 선생이 소리쳤다.

    “빨리, 침대로 옮기시오!”

    기사들이 달려들어 대공을 일으키는 사이, 시녀 한 명이 들어와 황급히 침대에서 루치를 안아 들었다.

    “으아앙!”

    낯선 시녀의 품에 안긴 발텐 공자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렇게 한참 동안 대공저에는 아이의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미의 죽음을 애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 * *

    북부의 카르미네에서 난 지진은 두 달 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황제는 그곳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지진이 카르미네를 비롯한 산지에만 발생했고, 북부에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평지나 수도 마이어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페터는 황제로서, 작은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보고가 전해진 뒤에야 접근 금지령을 해제했다.

    침묵하던 대공저의 문이 열린 것도 그때였다.

    “발텐 대공저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폐하.”

    셴베르크 백작이 편지를 가져왔다. 서류 더미에 고개를 박고 정신없이 국사를 처리하던 페터는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형님이?”

    그가 가져온 편지에는 확실히 발텐 가의 문양이 새겨진 밀랍이 찍혀 있었다.

    ‘왜 직접 오지 않고 편지를 보냈지?’

    두 달 전, 자해하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후 다시 눈을 뜬 알렉시스 발텐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저를 북부에서 기절시켰던 기사단장을 처형하는 것이었다.

    사유는 타당했다. 호위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주군의 명에 불복하고 신체에 위해를 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두 번째로 알렉시스가 한 일은 페터에게 카르미네로 떠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요청을 넣는 것이었다.

    페터는 북부행은 신변상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를 대어 거절했고 알렉시스는 항명했다. 단신으로라도 말을 끌고 당장 나설 채비를 하는 것을, 집사 알스도프가 황궁으로 기별해 겨우 막을 수 있었다.

    그러자 세 번째로 알렉시스가 한 일은 대공저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제가 캐슬린에게 했던 것처럼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외부로 나서지도 않았다. 페터가 사람을 보내도 문을 열어 주지도 않은 채 은둔했다.

    항간에는 발텐 대공의 그런 기행을 두고 그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떠들었다. 또 다른 이들은 황제가 완전한 황권을 거머쥐기 위해 이복형인 그를 박해하는 것이라고도 수군거렸다.

    오해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나, 페터는 태어나 처음으로 보았던 형제의 좌절이 걱정스러웠다. 그랬으니 북부의 접근 금지령이 끝나자마자 황궁으로 달려와 저를 원망하거나 혹은 협박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러기는커녕 달랑 한 장짜리 편지라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뜯어본 편지에는 단 두 줄이 적혀 있었다.

    [캐슬린의 시신을 찾는 탐색대를 보내 주십시오. 발텐에서 보내면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니.]

    찾으면 제게로 보내 달라는 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페터는 그가 차마 그 말까지는 적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죽어서라도 벗어나길 원했던 그녀를 마주하기 두려운 것이다.

    페터는 편지를 갈무리해 넣고 명했다.

    “발텐 대공비의 시신을 찾을 탐색대를 꾸려 카르미네로 보내라 하게, 셴베르크 백작.”

    “폐하께서 보내시는 겁니까? 대공 전하가 아니고요?”

    “그래, 황궁에서 보내는 것으로 한다. 그리고…….”

    페터는 헤어지며 보았던 캐슬린의 눈빛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시신을 발견하면 수습하여 무덤을 조성하고,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지도에 위치를 표시한 후 복귀하라 일러.”

    “알겠습니다.”

    셴베르크 백작이 물러난 후, 페터는 다시 서류 더미로 시선을 내렸으나 깃펜을 쥔 손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칩거하는 동안 허튼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대공저의 문이 열렸다지만 알렉시스가 직접 와 얼굴을 비친 것은 아니었으니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알 길이 없었다. 루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왔으니 저번처럼 검을 들고 죽겠다고 날뛰지는 않았겠지만, 혹시 아직도 약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다거나…….

    “아……!”

    순간 페터는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제가 어린 루치를 온전치 못한 상태의 알렉시스 곁에 남겨 두고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독을 이민족 약제사로부터 치료받아야 하기도 했고, 어머니를 닮은 얼굴로 극단에 다다른 아버지의 삶을 붙잡는 동아줄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루치의 얼굴은 진짜가 아니야.’

    요제프가 만들어 준 가짜 얼굴은 아이가 자각하는 순간 언제든지 바뀔 수 있었다. 캐슬린을 닮은 아이의 얼굴이 제 얼굴로 바뀌게 된다면 알렉시스는 어떻게 반응할까.

    장담할 수 없었다.

    페터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나동그라져 바닥을 뒹굴었으나, 알아채지도 못한 채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 * *

    알렉시스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침실에서 눈을 떴다.

    잠든 동안 그대로 숨이 끊기기를 수없이 바랐는데, 다시 깨어난 순간 폐로 밀려드는 공기가 야속했다.

    그는 멍하니 그녀가 남겼던 말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독을 핑계 대지 마요, 알렉시스 발텐. 당신은 그저 당신만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이젠 벗어나고 싶어요, 당신한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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