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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77)화 (77/110)

77화

“지금 그 사실을 알면서 보고조차 하지 않았단 말이냐?”

알렉시스가 목소리를 높이자 무레닌의 기사들이 황급히 설명했다.

“대공 전하. 저희는 단지…….”

“호위를 딸려 보냈다 하더라도 주인이 늦은 시각까지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리 태평하다니 제정신이냐? 당장 네놈들의 목을 베어 버리기 전에 대공비를 찾아!”

“전하, 고정하십시오. 비전하께서 가족분들을 잠깐 만나고 오시겠다는 연락이 왔었습니다. 전하께서도 허락하셨다 하여 따로 보고를 드리지 않았던 겁니다.”

“가족이라니?”

그녀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그녀에게 가족이란 남편인 저와 아들인 루치뿐이었다.

“윈스턴 가문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하…….”

“저, 저희는 정말 전하께서 아시는 줄로만 알고…….”

무레닌의 기사들은 캐슬린의 결혼 전 성이 윈스턴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뿐이지, 왜 윈스턴이 북부 변경백 자리를 잃고 쫓겨났는지는 몰랐다.

‘마이어 기사들을 따로 불러 놓을 것을.’

내일 다시 여정을 떠나야 해서 휴식을 취하게 둔 것이 실책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윈스턴 백작의 팔이 아니라 목을 꺾어 놓을 것을. 이사벨라 윈스턴을 거지꼴로 진창에 구르게 두는 은혜를 베풀지 말았어야 했다.

“호위로 따라간 기사는 어찌 되었느냐?”

“그자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캐슬린의 호위를 맡은 기사가 혼비백산해서 뛰어 들어왔다.

“지원, 지원을 요청합니다! 대공비 전하와 공자께서 사라지셨습니다!”

혈관에 피가 싸늘하게 식은 것처럼 머리가 차가워졌다. 알렉시스는 기사의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허억!”

뛰어 들어온 기사의 목에 검날을 가져다 댄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세히 말해. 그녀가 언제 사라졌지?”

“무, 물건을 다 구매하시고 야시장 좌판 구경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비전하께서 아는 사람을 본 것 같다고 하시며 한참 동안 시장을 헤매다 어떤 여자를 찾아내시더니 함께 찻집으로 가셨습니다. 제게는 밖에서 기다리라 하시기에 대기했는데, 새벽이 가까웠는데도 나오지 않으셔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이미 사라지고 안 계셨습니다.”

손에서 힘이 빠져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사벨라 윈스턴이 수작을 부린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녀가 먼저 찾아간 거라면 납치는 아니었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알렉시스는 이를 악물고 기사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그러고도 기사라 할 수 있느냐?”

“커헉. 죄,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알렉시스는 거칠게 호위 기사의 멱살을 놓으며 외쳤다.

“당장 마이어의 기사들을 깨워 무레닌 전역을 수색하라!”

무레닌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곧 온 성의 불이 다시 켜지고 사용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성내에 보관되어 있던 지도를 찾아내 미친 듯이 살폈다. 야시장이 열리는 광장은 무레닌 성에서 멀지 않았다. 그러나 영지의 정중앙에 있는 터라 각지로 향하는 길목이 많았다. 그녀는 어디로 향했을까. 납치가 아니라면 어딜 가기 위해 호위 기사의 눈도 속이고 떠났을까.

떨리는 손으로 광장에 이어진 여러 길목을 짚어 나가다 한 길목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 있다.’

같이 데리고 나갔던 에밀리가 큰 자루를 들고 나가던 것이 떠올랐다. 야시장에서 산 물건을 담으려고 가져간 줄 알았는데, 만약 거기에 도주를 위한 물건을 챙긴 것이라면.

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곳뿐이다.

성곽의 서쪽 문.

무레닌 성을 벗어나는 길 중 가장 평탄하고 잘 닦인 길이었다. 폭이 좁아 마차나 짐수레는 지나기 어렵지만 진창이 거의 없어 가장 빨리 성을 떠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지금 당장 성곽을 모두 봉쇄하고 드나드는 자를 막아라. 특히 서쪽 문에 마이어의 기사들을 보내 대공비와 공자를 찾게 해!”

“예, 전하!”

그는 정신없이 말을 끌어내어 안장도 얹지 않고 올라타 서쪽으로 달리면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그곳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몸 성한 채로 저를 기다리고 있기를.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까…… 제발.’

잃었던 3년의 세월을 다시 떠올리자 아득해졌다. 그때는 잃은 것도 몰랐으나 이번은 달랐다. 심장이 베인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연청색 눈 두 쌍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절망스러웠다.

‘아니야. 그녀가 나를 두고 갔을 리 없다.’

아이가 좋아하니까 사과나무를 심자고 했었다. 나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주렁주렁 열릴 열매가 기대된다고도 했었다.

그러니까 떠났을 리 없다.

세뇌하듯 그렇게 되뇌며 서쪽 문에 도착했다. 어스름하게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대공 전하!”

“찾았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아직 섣불리 판단하기는 일렀다. 관례상 한밤중에는 출입을 통제하니, 밖으로 나가려는 이들은 대부분 이제 막 검문을 받고 있을 터였다.

그는 말에서 내려 직접 문 앞에서 통행하려는 이들의 낯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마이어의 기사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의 깊게 살피며 수색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가 머리 위에 뜰 때까지 캐슬린은 보이지 않았다.

“전하, 봉쇄한 다른 방향의 문에서도 대공비 전하와 공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사들의 보고 결과는 더욱 절망적이었다. 알렉시스는 이를 악물며 명령했다.

“당분간 문을 모두 닫아걸고 출입을 통제해.”

“하오면 전하, 상단은 어찌할까요? 그들이 나가지 못하면…….”

“내 말 못 들었나? 대공비와 공자를 찾을 때까지 출입을 통제하라고 했잖아!”

그녀를 다시 놓칠 수는 없었다. 알렉시스는 지옥 끝까지 뒤따라가서라도 아내를 찾아내고야 말 작정이었다.

* * *

“마님, 정말 다행이에요. 전 꼼짝없이 무레닌에 갇혀 버리는 줄 알았잖아요.”

흰 천으로 덮인 천장 높은 짐마차 안에서 에밀리가 소곤거렸다.

“이대로 안전히 갈 수 있겠죠?”

“지금까지 수월했으니까 큰 문제 없을 거야.”

캐슬린은 호위 기사를 따돌린 후 제일 먼저 루치와 제 머리를 다시 염색했다. 이번에는 주홍색이 아닌 갈색을 선택했고, 알렉시스가 성곽의 출입문을 검문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자 대공이 영지를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철저하게 성곽을 봉쇄하던 무레닌의 기사들이 상단의 출입을 허가해 준 것도 그쯤이었다.

낡은 물건만 들고 도망쳤던 4년 전과 달리 지금은 충분한 여유 자금과 생필품이 있었다. 무레닌에서 수색이 계속된다면 최대한 1년까지 숨어 지낼 생각이었는데, 그는 예상보다 빨리 떠났다. 그 소식을 듣고 캐슬린과 에밀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발텐 대공은 영주이니 한 집 한 집을 속속들이 다 수색하겠다고 들면 들키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여차하면 숨을 요량으로 여관에 머물던 상단 사람 중 큰 짐마차를 여러 대 가지고 있는 이를 포섭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대부분의 상단은 마이어로 향하고 있었으나 이들만은 북부로 향했다. 남부와 중부에서 얻은 특산품을 가져다 북부에서 팔 예정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캐슬린이 하녀로 일했던 경험을 되살려 북부 귀부인들에게 인기 있는 사치품이나 평민들이 생활에서 즐겨 쓰는 물건들을 알려 주자, 상단주는 굉장히 기뻐하며 기꺼이 식량과 잠자리도 내어 주었다.

“카르미네 산맥 근처에서 내려 주겠다고 했으니 이대로 검문에 걸리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에밀리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불안함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잠든 루치를 안은 캐슬린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겁이 나면 꼭 따라오지 않아도 돼.”

“아뇨. 마님이 가시는 데는 저도 가요.”

“에밀리.”

“친구를 떠나보내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해요.”

그녀가 잘라 말하며 캐슬린의 손을 꼭 잡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북부를 아이와 달랑 둘만 가는 건 말도 안 돼요. 전 마님과 꼭 같이 갈 거니까 이제 돌아가란 소리는 하지 마세요.”

“……응.”

신분이 바뀌면서 어쩔 수 없이 멀어졌다고 생각한 친구였는데, 호칭과 말투가 달라졌을 뿐이지 그녀는 늘 옆에 있어 주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이 되었다. 캐슬린은 제 옷자락을 꼭 붙잡은 채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간절히 빌었다.

‘북부에도 군사가 깔리기 전에 도착해야 해.’

다행히 북부는 아직 변경백의 세력이 남아 있었다. 황군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으니 만약 대공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 해도 마이어에서와 같은 세력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캐슬린이 카르미네로 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북부 신전으로 향한다고 생각하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십 일을 보냈다.

몇몇 영지를 거쳐 갈 때마다 형식적인 수색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정 많은 상단 사람들이 루치를 대신 안아 주거나, 가족인 척해 주어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가끔은 험난한 산중에서 노숙할 때도 있었는데 견딜 만했다. 특히 루치는 저택 정원에서 잘 가꾸어진 꽃과 나무만 보다가 처음 숲에서 울창하게 뻗은 나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뭇가지를 뛰노는 다람쥐나 수풀 사이를 뛰어 사라지는 산토끼를 발견할 때면 박수를 치며 기뻐하기까지 했다.

캐슬린은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볼 때 비로소 마음 한구석에 있는 죄책감을 덜어 낼 수 있었다.

‘아버지 따윈 금방 잊어버릴 거야.’

어차피 아이가 자랄 때 곁에 있어 줬던 사람도 아니었다. 키운 것은 요제프였고, 그는 독 섞인 피를 물려 주었을 뿐이다.

아이를 살리는 건 알렉시스 발텐이 아닌 요제프다.

정원의 온실에서 루치와 함께 물장난 치던 그 날 밤이 떠오를 때면 캐슬린은 그렇게 되뇌었다.

어느덧 짐마차가 움직이는 방향에서 시린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마차 바퀴가 서걱거리며 쌓인 눈에 자국을 낼 무렵, 상단주가 캐슬린을 불러냈다.

“북부에 들어섰소. 자, 저기 보이는 초소가 세워진 곳이 카르미네요.”

상단주가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살피자 깎아지르듯 가파른 설산이 보였다.

‘돌아왔구나,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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