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무레닌에서 머무른 지 열세 날이 지났다.
새로 축조하긴 했으나, 활용할 수 있는 부지 자체가 훨씬 좁아 성의 규모는 마이어의 저택과 비교하면 한참 모자랐다. 그러나 다행히도 루치는 지금의 생활을 훨씬 마음에 들어 하는 듯 보였다.
어제는 사용인을 시켜 구해 온 사과나무를 심으면서 가을에는 사과가 열려 빨갛게 익을 거라고 말해 주었더니 무척 기뻐했다. 물론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말해 주었더니 무척 아쉬워하긴 했지만.
그는 품 안에서 약병을 꺼내 한 모금을 마셨다. 에디스가 꼭 마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챙겨 준 약이었다.
-공자님의 약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로 만든 약이니 꼭 드셔야 해요. 안 드시면, 영지를 시찰하다가 정신을 잃으실지도 몰라요. 정말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니시죠?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타사르트 약초가 싸늘한 기운을 남겼다. 한결 정신이 맑아졌다.
루치의 몫으로 남겨 두려고 했던 약을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된 건 에디스의 협박 아닌 협박 때문이었다. 이번 시찰은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휴식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꿈같은 시간을 그리 망쳐 버릴 순 없었다.
“전하.”
캐슬린이 밖에서 문을 두들기고는 말했다.
“들어가도 되나요?”
“들어와.”
알렉시스는 약병을 숨기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상기된 뺨을 한 채 하늘거리는 연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어느 때보다 더 생기 있어 보였다.
“여쭤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
마이어에 있었다면 사용인을 보내 말을 전했겠지만, 무레닌에서는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그녀의 입술을 타고 나오는 말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는 새삼 깨닫고 있었다.
“저녁에 잠깐 루치와 함께 나갔다 오려고요. 들어보니 오늘 야시장이 열린대요.”
“갑자기 왜?”
무레닌에는 매일 장사를 하는 시장이 있어 가끔 타 영지에서 방문하는 상단이 있을 땐 비정기적으로 야시장이 열리곤 했다. 그들이 남부나 북부에서 흘러온 물건을 팔기도 해서 평민들은 꽤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지만, 캐슬린에게는 새로울 것 없는 물건들이었다.
“로쿠아트 묘목을 파는 상인이 왔다고 해서요. 저번에 로쿠아트 열매를 선물해 주셨을 때, 루치가 마음에 들어 해서 묘목을 사고 싶었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로쿠아트는 귀한 과일인 만큼 열매보다 묘목을 구하는 것은 어려웠다. 운반하다 찬 바람을 맞으면 바로 상해 버리기 때문에, 상인들도 될 수 있으면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팔아 버리곤 했다.
“이따가 에밀리와 루치를 데리고 나갔다 올 생각이에요.”
“같이 가지.”
기뻐할 루치를 뿌듯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캐슬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오늘 저녁에 무레닌의 관리자들과 약속이 있지 않으셨나요?”
“아, 그렇지.”
잊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무레닌을 떠나니, 그 전에 영지를 관리하는 이들을 만나 앞으로의 경영에 대한 의지를 북돋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약속을 미룰게. 출발일을 바꾸는 거야 별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영주와의 만남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을 텐데, 몇 시간 전에 미루면 분명 크게 실망할 거예요.”
캐슬린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만류했다.
“잠깐 나갔다 오기만 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영지 통솔은 영주에게 중요한 의무 중 하나인데, 지금껏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첫 영지 시찰의 시작점에서 관리자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알렉시스는 하는 수 없이 말했다.
“호위를 붙여 줄 테니 함께 가도록 해.”
“마이어도 아니고 무레닌인데요. 호위까지 필요할 일이 어딨겠어요.”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사람들이 몰리면 자칫 위험해질 수 있어.”
타지의 상단이 좌판을 벌인 야시장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번잡한 데서 사고가 터질 가능성이 컸다. 캐슬린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그는 서랍에서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내어 캐슬린에게 들려 주었다.
“묘목값은 얼마인지 묻지 말고 이걸로 사.”
주머니를 받아 든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알렉시스는 서둘러 덧붙였다.
“만약 다른 걸 구경하다 갖고 싶어지면 그것도 다 사고.”
“……이걸 다 주는 건가요?”
“그래. 네가 원하는 데 써.”
이런 돈쯤은 그녀가 제 옆에 머무르는 것에 비하면 초라한 대가였다. 할 수만 있다면 알렉시스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그녀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야시장에 있는 물건을 몽땅 다 산다고 해도 이 정도로 비싸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캐슬린은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만 꺼내고 다시 돌려주었다.
“이거면 충분해요.”
캐슬린이 미소 지었다. 그 웃음에 떨릴 만큼 가슴이 아리면서도 왠지 서늘해졌다.
4년 전,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낡은 가방만 들고 떠났을 때가 겹쳐 보여서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지금과 그때는 다르다.
알렉시스는 눈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고 애써 불안함을 지웠다.
“그럼 이만 나가 볼게요. 외출할 준비를 해야겠어요.”
간만에 시장을 가 본다며 설레어하는 그녀는 이전과 달랐다. 알렉시스는 캐슬린이 나간 후, 무레닌의 기사 하나를 불러 명했다.
“캐슬린이 야시장을 방문할 때 호위해라.”
“예, 전하.”
마이어의 기사보다는 무레닌의 기사가 돌발 상황에도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몇 시간 후, 잊고 있었던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다. 알렉시스는 다이닝 룸으로 내려가던 중, 에밀리가 큰 자루를 들고 문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뭘 그리 많이 사려고 저러지.’
아무래도 금화를 더 줬어야 했나?
걱정이 되긴 했지만, 성 밖의 생활에 대해 모르지 않으니 괜히 덤터기를 쓰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다이닝 룸으로 들어섰다.
관리인들은 대리인인 라일런트 자작이 아닌 발텐 대공이 영주로서 직접 무레닌에 걸음 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영주님께서 저희를 믿고 맡겨 주신 만큼,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무레닌을 가꾸겠습니다.”
“옳습니다. 영주님, 이 포도주는 무레닌에서 직접 키운 백포도로 빚은 겁니다. 라일런트 자작님도 탐내시던 건데, 영주님이 오시면 드리려고 아껴 두었던 거지요. 맛이 아주 좋습니다.”
거절하려 했지만 몇 번이나 권하기에 흥미가 생겨 받아 마셨다. 마이어에서 마시던 와인보다는 투박했지만 은은한 향과 가벼운 맛이 꽤 괜찮았다.
‘캐슬린도 좋아할까.’
생각해 보면 그녀가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알렉시스는 한 잔을 더 마셨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이 정도면 술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가볍게 식사에 곁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렉시스는 그들을 향해 물었다.
“대공비에게 선물하고 싶은데, 남은 게 있나?”
“그러믄요! 영광입니다.”
관리인들은 마침 궤짝째로 챙겨서 가져왔다며 화색을 띠었다. 다음 영지의 관리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어도 충분할 양이었다.
백포도주로 인해 식사 자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알렉시스는 관대한 마음이 되어 그들의 고충 몇 가지를 듣고 해결해 주겠다 약속했다.
“이리 너그러이 베풀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떠나실 때 뵙겠습니다, 영주님.”
얼큰하게 취한 관리인들은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알렉시스는 홀로 침실로 향하다가 문득 창문 밖이 깜깜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야시장은 언제 끝나지?”
“아직 한창일 겁니다. 다른 영지에서 방문한 상단이 오면 대개 새벽까지 사람들이 북적이거든요.”
곁을 따르던 무레닌의 하인이 대답했다. 알렉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오랜만에 나들이를 즐길 캐슬린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백포도주는 가벼운 맛과 달리 도수가 꽤 있는 듯했다. 소파에 걸터앉은 그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지르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하늘에 뜬 달빛이 은은하게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밖이 고요한 것을 보니 새벽이 된 듯했다.
‘겨우 와인 한 병으로 취하다니.’
평소에는 다섯 병을 홀로 마셔도 취한 적이 없었는데, 어이가 없었다. 술을 안 마신 지 너무 오래되어 그런 걸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우스웠다. 변한 거라고는 마이어를 떠나 캐슬린과 촌부처럼 지낸 것밖에 없는데.
어쩌면 평생 꿈꿨던 생활을 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소파에 상체를 기댄 알렉시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황후궁의 지하 감옥에서 갇혀 지낼 때 내내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푸성귀가 자라는 텃밭과 과일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작은 성에서 살고 싶다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내내 함께하는, 그런 상상을 내내 하다 보면 춥고 우울한 감옥의 밤도 금세 지나가곤 했다.
여섯 살의 알렉이 이루기엔 너무 큰 꿈이라 잊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는 새에 이미 이룬 꿈이었다.
알렉시스는 소파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옆 침실로 향했다. 평화롭게 잠들어 있을 제 가족이 보고 싶었다. 흰 시트에 얼굴을 묻고 누운 여자와 그녀를 꼭 같은 은빛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린 채 잠든 사내아이.
꿈속의 광경이 이젠 그저 환상이 아니란 사실을 다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녀의 침실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광경이 아닌 공허한 달빛만이 그를 반겼다. 갑자기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알렉시스는 그 자리에 허망하게 서서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잠시 자리를 비웠나? 아니면 욕실에 있는 건가?’
야시장이 늦게 끝났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제정신을 찾아 냉정해지는 이성이 믿고 싶지 않은 결론을 내려 주었다.
캐슬린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침실을 나와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 야간 점호 중이던 무레닌의 기사들이 다가왔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대공비는 아직 안 돌아왔나?”
“예? 예.”
어리둥절한 얼굴로 긍정하는 기사의 말에 가슴이 저 아래로 떨어졌다.
정말로,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다.
불쾌할 정도로 익숙한 기분이 점차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