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캐슬린은 에밀리를 향해 말했다.
“이제 짐을 챙겨야겠다, 에밀리.”
“네? 짐이요?”
“떠날 때가 됐잖아.”
에밀리가 곁에 있는 유모를 의식하고 당황한 기색을 했다. 캐슬린은 잠자코 덧붙였다.
“루치도 이제 괜찮아졌으니 지방 영지 시찰을 미룰 순 없지. 대공 전하께서 이미 이전부터 계획을 세워 두셨을 텐데 우리 때문에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을 거야.”
“아, 그 말씀이셨군요?”
“응. 간단한 것만 챙겨 가면 돼. 이미 전하께서 웬만한 것들은 영지의 성에 다 마련해 두셨다고 하니까.”
“네. 그럼 오늘부터 준비할게요, 마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정원에서 뛰어놀고 있는 루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엄마! 저거.”
엄마를 발견한 루치가 환하게 웃으며 새장을 가리켰다. 새를 가까이서 보고 싶으니 내려 달라는 뜻이었다. 캐슬린은 아이가 원하는 대로 새장을 내려 주었다.
알렉시스가 얼마 전 숲에서 잡아와 선물해 준 솔새가 불안한 듯 높은 소리로 울었다. 루치는 새장 사이로 연한 올리브빛의 동그랗고 작은 새를 홀린 듯이 보다가 이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 꺼내 주세요.”
아직 정확하지 않은 발음이었지만 아이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새를 선물받은 직후부터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기에 직접 만져 보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한 캐슬린은 조심스럽게 새장 문을 열고 솔새를 잡아 내밀었다.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으으응. 날게 해 줘요.”
“그럼 루치는 이 새를 더 볼 수 없는데?”
“새는 하늘에 있는 거잖아요.”
평소답지 않게 루치는 고집을 부렸다. 캐슬린은 멍해진 기분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이 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예쁘다고 했잖아.”
“예쁘니까 날게 해 줘야 해.”
갖고 싶다고 해서 가두어 두는 게 아니라 본질대로 살 수 있도록 놓아주자는 말이었다.
그 명료한 진리에 캐슬린은 손을 놓아주었다. 멈칫하던 솔새가 곧 포르르 날아올랐다.
“엄마, 새가 날아!”
루치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벅찬 듯 소리치는 음성에는 기쁨만 보일 뿐이었다.
‘넌 아빠랑 다른 아이구나.’
울컥하는 기분에 캐슬린은 루치를 꼭 껴안았다.
“그래. 새는 이만 보내 주고 우린 다른 장난감 가지고 놀자. 알았지?”
“응!”
실컷 놀고 난 아이를 데리고 침실로 돌아갔을 때는 알렉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깨어 있을 때는 며칠 만에 처음 보는 것이라 반가웠는지 루치가 곧장 뛰어가 안겼다.
“아빠!”
“잘 놀고 있었어?”
그가 조금 어색하지만 다정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어투로 아이를 안아 들더니 캐슬린에게 말했다.
“폐하께 영지 시찰에 대한 허락을 받았어. 우선 무레닌으로 가 볼까 하는데 어때?”
무레닌이라면 가장 최근에 보수 공사를 마친 성이 있는 곳이었다. 마이어에서 그리 멀지 않아 북부로 떠나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른 영지에도 한 번씩 머무른 후, 마이어로 올라오는 일정이야.”
“네, 상관없어요. 루치도 이젠 괜찮아졌으니까요.”
무레닌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점점 북부로 향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다른 영지들은 모두 마이어보다 아래쪽에 있으니 말이다. 북부에서 멀어질수록 탈출 중에 붙잡힐 가능성이 컸다.
‘무레닌에서의 마지막 날을 노려야겠어.’
그때면 첫 영지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안도감에 모두 경계심이 약해져 있을 거였다.
“그런데 루치, 새는 왜 방으로 안 데리고 왔어?”
아이를 소파에 내려 준 알렉시스가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새가 날고 싶어 해서 보내 줬어요.”
루치가 또박또박 말했다.
“예뻤어, 날개.”
새장 속에 갇혀 있을 때는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날개였다. 옅은 노란색과 올리브빛이 섞인 작고 귀여운 날개가 아이에게는 인상 깊게 남았던 모양이었다.
“……그랬군.”
알렉시스도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말이 없었다. 캐슬린은 서둘러 에밀리에게 아이를 데리고 나가 옷을 갈아입히도록 했다.
“전하께선 괜찮으세요? 대관식 이후로 한 번도 쉬신 적이 없는데 바로 영지 시찰을 떠나니 걱정이 되어서요.”
그가 더 깊게 생각하도록 두면 안 됐다. 지금까지 의심하지 않도록 일부러 외출도 삼가고 저택에만 머물며 그를 안심시켰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지방으로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낭패였다.
“너와 함께 떠나는 것이 휴식이야.”
다행히 알렉시스는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는 듯했다.
“당분간 궁정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될 테니 느긋하게 쉬고 오려고.”
어쩐지 고단함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는 캐슬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자, 알렉시스는 그대로 잡아당겨 그녀를 안았다.
이전과 달리 온기를 담은 금안이 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캐슬린은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사실 네게 궁금한 게 있었는데.”
그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뭔데요?”
알렉시스가 흘러내린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참 만에 물었다.
“내가 죽으면 상복을 입어 줄 건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예전부터 궁금했어.”
문득, 요제프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앞에서 시위하듯 검은 옷을 입었던 게 기억났다.
그걸 마음에 담아 두었던 걸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려 했다. 두 번이나 요제프에게 못 할 짓을 해 놓고서 질투를 하다니.
“그래야죠.”
캐슬린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대공비라는 사람이 상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다행이군.”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쩌면 난 네가 축제를 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가슴이 내려앉으며 불안한 기분이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왜 자꾸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그냥. 난 널 힘들게 하고 돌아보지도 않았잖아.”
“…….”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한숨처럼 그가 중얼거리며 은빛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는 안 그럴게.”
캐슬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진심처럼 들리지만 그는 아직도 제게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댔다. 그 이유가 원망인지 미움인지, 아니면 슬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그는 기회를 저버렸다.
“이렇게 계속 곁에 있겠다고 해 줘.”
“……그럴게요.”
캐슬린은 저를 감싸는 팔에 저항하지 않았다. 알렉시스 발텐에게 저는 새장에 갇혀 있는 새여야 했다. 무레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 * *
몇 주 후.
대공저를 떠나는 날 아침, 페터가 찾아왔다.
“조카에게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못 보고 갈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캐슬린은 루치를 안고 페터에게 다가갔다.
“떠나기 전에 뵐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미안해요. 내 진작 찾아왔어야 하는데 국사 때문에 이제야 왔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짐을 챙기느라 바빠서 알현을 청하지 못했는걸요.”
페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자, 루치. 못 보는 사이 너무 커 버리면 안 된다?”
“으응.”
페터에게 루치를 안겨 주려고 했지만, 이른 아침이라 아직 졸고 있던 아이가 잠꼬대 비슷한 소리를 내며 캐슬린의 옷자락을 붙잡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루치. 폐하께서 오셨는데 인사는 해야지.”
“그냥 두십시오. 아직 아이인데 뭘 알겠습니까.”
페터는 마다했지만 캐슬린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떠나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녀는 알렉시스에게 인사하러 발길을 돌리려는 페터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건강히 잘 있어요, 페터.”
“캐슬린?”
“고마웠어요. 잊지 않을게요.”
그제야 무언가를 알아챈 듯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캐슬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페터가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는 그때 숨겨 두었던 쪽지를 페터에게 은밀히 전달했다.
“캐슬린.”
뒤에서 알렉시스가 부르는 소리와 함께 마차를 끄는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타까운 눈으로 저를 보는 페터에게 황실의 예법으로 인사했다. 팔을 잡고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준 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잘 가요, 캐슬린.”
페터는 루치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웠습니다. 친구가 되어 줘서.”
저벅거리는 발걸음이 들리더니 알렉시스가 다가왔다. 페터는 서둘러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오래 머물다 오시면 안 됩니다. 아시지요? 아직 마이어에는 형님이 필요해요.”
“보고드린 기한 안에는 돌아오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알렉시스가 인사하며 캐슬린의 어깨를 감쌌다.
“가지.”
그렇게 마차로 향하고, 대공저를 떠날 때까지 페터는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캐슬린 역시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창문만 바라보았다.
무레닌까지는 이틀 하고도 반나절이 더 걸렸다.
수도 마이어에서 카르미네 산맥의 시작점까지는 하루가 걸리지 않으니, 최소한 사흘 동안은 발각되지 않아야 탈출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산맥의 중심지까지 들어가려면 열흘은 찾아 헤매야 할 수도 있어.’
창문 너머로 평화롭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캐슬린은 계획을 세웠다. 무레닌에는 이 주를 머무른다고 했으니 그곳에서 노숙에 필요한 마른 식량이나 담요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추수하는 거 본 적 있어?”
막 무레닌 성의 도개교가 내려가고 성안으로 진입할 때쯤 알렉시스가 물었다.
윈스턴 영지는 사시사철 눈보라가 쳤고 척박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마이어에서는 귀족뿐 아니라 평민들도 모두 농사를 짓지 않았으니, 알렉시스로서는 본 적 없다 답하기를 예상하고 물은 것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캐슬린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일을 경험한 바 있었다. 오솔레에서 숨어 지낼 때 가을이면 곡식을 거두고 과일을 땄다. 요제프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즈음에는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작지만 채소밭도 일궜다.
“아뇨, 본 적 없어요.”
하지만 캐슬린은 거짓말을 했다. 알렉시스는 그 대답에 기쁜 기색이었다.
“무레닌에서 볼 수 있을 거야.”
막 잠에서 깨 신기한 듯 창문 밖을 살피는 루치를 안아 든 그가 설명했다.
“성의 뒤쪽에 큰 정원이 있거든. 과실수도 심고 채소밭도 가꿀 수 있을 거야. 지금 종자를 심어 두면, 다른 영지를 둘러보고 올라올 때쯤엔 결실을 확인할 수 있겠지.”
“기대되네요.”
그때 난 당신 곁에 없을 테지만.
캐슬린은 기대 어린 목소리를 꾸며내 말했다.
“그럼 우리 사과나무를 심어요. 루치가 사과를 좋아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