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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74)화 (74/110)
  • 74화

    “그게 무슨 소린가요?”

    “약을 만들 수 있는 재료는 한정되어 있어요. 대부분 대공 전하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죠. 그런데 전하께선 그걸 죄다 공자님을 위해 쓰라고 요구하고 계세요.”

    “…….”

    “공자님은 아직 어리고, 직접 독을 마셔서 중독되신 것이 아니니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렸는데도 막무가내예요.”

    “전하는 치료받기를 거부하고 계신단 말인가요?”

    “비슷합니다. 나아지셨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 완치된 건 아니니 그리 낙관하시면 안 되는 상태예요.”

    애가 탄 듯 설명하는 에디스의 얼굴도 밝지는 않았다. 캐슬린은 루치의 상태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들은 후 찬찬히 결론을 내렸다.

    “전하께는 원액을 제조했다고 말씀드리고, 농도를 낮춰서 만드세요.”

    한번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 독이 그에 맞춰져 서서히 옅어진다고 했다. 루치는 알렉시스와 달리 어린아이기 때문에 타사르트 약초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오히려 그에 중독되어 다른 치료법이 듣지 않을지도 몰랐다.

    ‘요제프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루치를 치료해 줄 거야.’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이 커졌다.

    “그럼 전하와 루치 모두 당분간은 함께 복용할 만한 양이 되겠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디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대공 전하께선 공자님이 왜 아프신지 이유를 물으시던데요. 일단 저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긴 했는데, 계속 모르는 척하실 예정이신가요?”

    “그래요.”

    캐슬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루치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몰라요. 그러니 에디스 양도 함구해 주면 좋겠군요.”

    “네? 전하께서 공자님이 본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다니요?”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발텐 대공 부부가 수년간 쌓였던 오해를 풀고 다시 돈독한 사이가 된 줄 알았는데 어째 둘 사이에 오해의 골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내 아이가 그분에게 물려받은 건 피와 독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어요. 공자의 신분도 곧 내려놓을 거고 독도 따로 치료할 방법을 찾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 걱정은 하지 말고 대공 전하의 건강에만 신경 쓰도록 해요.”

    무감한 낯으로 말하는 대공비는 남편에 대해 더 이상 말을 꺼내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디스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캐슬린은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믿을게요.”

    “비전하. 이러지 않으셔도…….”

    “그분의 비밀을 내게 끝까지 지키려 했듯이 내 비밀도 그분에게 지켜 주길 바라요.”

    뼈가 있는 말에 멈칫하는 사이에 캐슬린이 돌아서서 온실을 나갔다. 에디스는 손바닥 안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캐슬린의 눈과 머리칼 색을 모티브로 만든 듯,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반지는 한눈에 보아도 값비싸 보였다.

    ‘발텐 대공 전하가 선물한 반지 아냐?’

    남편과 싸우기라도 한 건가? 이래서 부부 사이의 일에는 엮이면 안 되는데.

    에디스는 복잡한 기분으로 멀어져 가는 캐슬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지루하게 이어지던 궁정 회의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선황 시절, 세율 조정에 대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안건은 페터가 황제가 되어 전면으로 의견을 내면서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이로써 남부 농지의 세율 조정 건은 제국민과 동일한 비율로 인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의장인 투란 백작의 선언에 남부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감히 반대 의견을 꺼내지는 못했다. 일말의 희망으로 발텐 대공을 흘깃 곁눈질했지만 그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세율 조정 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부칙으로 정리하여 황제의 부관이 전달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회의가 모두 끝났다. 페터는 제일 먼저 자리를 떴으나, 시종을 보내 따로 알렉시스에게 말을 전했다. 돌아가지 말고 자리에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빈 회의실에 다시 들어서는 페터를 향해 알렉시스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루치는 괜찮나요?”

    “약제사를 상주시켜 치료 중입니다. 캐슬린이 따로 사람을 보낸 것으로 아는데.”

    대공저와 황궁을 오가는 인편뿐 아니라 전한 말의 내용까지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는 투에 페터는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캐슬린에게 전해 듣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형님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캐슬린이 밝히기 전에 먼저 말해 버릴 순 없으나, 이제는 루치가 자기 아들이란 사실을 눈치채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 두 살도 안 된 어린아이가 왜 그런 병을 앓는지 이유는 밝혀졌습니까?”

    “황궁의도 장담하지 못하는 일을 단시간 내에 알아내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직 알렉시스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내심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아직도 제자리걸음이었다. 페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그 한숨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제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대공가에 지나친 관심은 두지 마십시오. 그보다 지진 대책은 세우고 계신 겁니까? 들어 보니 이미 남부에서 작은 지진이 여럿 있었다는데.”

    “아, 그건.”

    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신탁의 내용대로 지진이 일어났지만, 규모는 작았다. 은밀히 학자들을 보내어 파악한 결과 마이어까지 확대되어 올라올 가능성도 적다고 했다.

    황제와 알렉시스만 있을 때보다 피해가 작은 결과이니, 페터는 아마 루치 덕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었다. 어머니 쪽에서 물려받은 피의 영향인 것처럼 보였다.

    요제프가 캐슬린의 가문 사람들을 찾게 되면 더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페터는 대답했다.

    “이미 계획을 세워 두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길 바랍니다. 내가 마이어로 돌아왔을 때 집이 박살 나진 않았으면 하니까 말입니다.”

    “떠나십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페터는 놀라 물었다.

    “어디로요?”

    “지방 영지 순회를 할 겁니다. 캐슬린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갑자기 그게 무슨…… 일전에 지방 영지로 라일런트 자작을 보내 시찰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영주가 영지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수도에서 보고만 받는 것과 실제로 둘러보는 것은 다르니.”

    “하지만…….”

    요제프가 언제 마이어로 올지 모르는데, 길이 엇갈리면 낭패였다.

    “황권에 위협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알렉시스가 잘라 말했다.

    “형님, 그게 아니라.”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황제 자리 따위엔 관심이 없다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폐하께서 황제 시해 사건에 관련된 자들의 처리만 제대로 하신다면 발텐 가는 황실의 방계로 남을 겁니다.”

    도망한 호프웰 백작과 서쪽 탑에 유폐된 황후를 이르는 말이었다. 이복동생을 내려다보는 눈은 전장의 사령관이었을 때와 같이 매서웠다.

    “……그리하겠습니다.”

    페터의 대답이 떨어지자 알렉시스는 회의실을 떠났다. 그 후에도 페터는 복잡한 심경에 한참 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대공 전하께서 지방 영지로 내려가시는 걸 허락하실 겁니까?”

    셴베르크 백작이 조용히 물었다. 그제야 그가 제 부관으로 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페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관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저 부관으로서 폐하를 올바로 모시기 위해 여쭈는 겁니다.”

    회의실을 나서는 황제를 따르며 그가 말했다.

    “혹시나 놓친 부분이 있다면 짚어 드리는 것도 제 일이니까요. 대공 전하께서 혹여나 도망친 호프웰 백작과 접촉이라도 하면 위험해집니다.”

    “모르는 바 아니네.”

    “……폐하께선 형제를 그리도 믿으십니까?”

    그리 좋은 오라비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믿고 따랐다면 아직 여자라는 비밀을 숨기고 있을 리 없다.

    셴베르크 백작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믿어 보고 싶은 거지.”

    페터는 간단하게 답했다.

    “이제 난 형님이 아니면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씁쓸함이 담긴 그 말에 셴베르크 백작은 우뚝 멈춰 섰다. 텅 빈 백작저를 늘 홀로 지키던 키아나의 목소리가 기억을 스쳤다.

    -나, 난 오라버니가 아니면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이런데도 날 두고 갈 거야? 정말로?

    그땐 마음도, 육체도 심약하기 그지없는 여동생의 투정일 뿐이라 여겨 지나쳤다. 그 결과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결코 그렇게 두지 않았을 텐데.

    오래전의 기억이 들추어낸 죄책감이 가슴께를 아프게 죄었다.

    “내가 자네도 믿어 보길 원한다면 밀린 업무나 제대로 수행하게. 거기 서 있지만 말고.”

    수렁에 빠진 듯 발걸음을 떼지 못한 그를 현실로 건져 올린 건 황제였다.

    기억 속의 눈물 어린 호박색 눈동자가 어느덧 눈앞의 금색 눈동자에 겹쳐졌다.

    “예. 갑니다.”

    셴베르크 백작은 서둘러 새로운 황제의 뒤를 따랐다.

    * * *

    루치는 순조로이 건강을 회복했다. 에디스의 약이 꽤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다시 경련을 일으키거나 고열에 시달리지 않았다.

    “요즘은 혼자 뛰기도 잘 하신답니다.”

    유모가 기뻐하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루치는 높이 매달린 새장을 보고 신기한지 만져 보려고 고개를 쳐든 채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밤마다 자기 전 옛날이야기를 들려 드리기도 하는데, 어쩔 땐 밤늦도록 계속해 달라 보채기도 하세요. 곧 책을 읽으실 때가 됐나 봐요.”

    “어쩜. 또래 아이들보다 성장이 빠른 것이 맞나 봐요, 마님.”

    에밀리가 뿌듯해하며 맞장구를 쳤다. 캐슬린 역시 루치가 건강하고 똑똑한 것은 기뻤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불안이 자라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러다 거울을 보게 되면 어떡하지.’

    그녀는 루치가 말문이 트였을 무렵부터 최대한 주변에 거울을 치웠다. 모습이 분명하게 비쳐 보이는 재질의 장식품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어린아이니까 괜찮았지만, 더 커서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면 어디서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의문을 품을 가능성이 컸다.

    ‘얼굴이 돌아오면 돌이킬 수 없어.’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혹시나 길이 엇갈릴까 봐 페터가 북부로 사람을 보낸 뒤로 쭉 기다렸으나 요제프는 소식이 없었다. 아직 연락이 닿지 못했거나 아니면 마이어로 올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먼저 떠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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