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알렉시스의 낯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캐슬린은 상관하지 않고 서둘러 침실을 나섰다. 응접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발목이 시큰거렸다.
“캐슬린, 기다려.”
뒤늦게 침실에서 나온 알렉시스가 그녀를 붙잡았다.
“카벨과 황궁의가 있는데, 왜 에디스를 부른 거지?”
그의 금빛 눈은 혼란과 불안에 잠식되어 흔들렸다. 캐슬린은 그 기저에 제가 비밀을 알고 있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까 카벨 선생이 말했잖아요. 약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을 불러서 묻는 편이 낫겠다고.”
“따로 수소문해 실력 있는 약제사를 찾으면 될 일이야.”
“안면 있는 약제사가 이미 있는데, 굳이 뭐 하러요?”
“안면이 있다고?”
“네. 그녀는 당신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잖아요?”
알렉시스는 반박하지 못했다. 캐슬린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까 침실로 올라오기 전에 생각나서 알스도프에게 부탁했어요. 에디스 양을 불러 달라고요.”
그녀는 저를 붙잡은 팔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며 미소 지었다.
“그녀를 당신의 정부로 오해했던 적도 있으니, 이번에 만나면 정식으로 사과도 할 겸 부탁할 거예요. 루치를 도와 달라고.”
“……그녀가 약제사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저번에 저와 만났던 적이 있었어요.”
당신이 날 찾아온 요제프를 몰래 빼돌렸던 그때 말이에요.
그리 덧붙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당신을 찾아왔다고 했는데 만나지 못하고 우연히 돌아가다가 저와 마주쳤어요. 그녀가 설명해 주더군요. 남부에서 만나 이어진 연이라고 말이에요.”
“그 말뿐이었나?”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한 관계인가요, 에디스 양과?”
반문하자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럼 문제 되지 않겠네요. 에디스 양을 만나 봐야겠어요.”
“함께 가지.”
그녀가 제게 비밀을 밝힐까 봐 걱정하는 거다.
“네. 그렇게 해요.”
캐슬린은 그가 의심하지 않도록 흔쾌히 수락했다.
* * *
다행히도 에디스는 마침 마이어에 머물고 있어, 발텐 대공비가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어 시간 만에 대공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별관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캐슬린을 따라온 알렉시스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지만, 상황을 듣고 나서 눈치 빠르게 말을 맞춰 주었다.
“그 약은 저도 자주 만들어 본 건 아니에요. 공작님, 아니 대공 전하께서 예전에 남부로 출정하셨을 때 부상으로 인한 경련이 심하셔서 몇 번 만들어 드린 적이 있었답니다.”
“더 만들 수 있나요?”
캐슬린이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으로선 그녀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루치는 아직 너무 어려 고열이 계속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으니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주재료인 타사르트 약초를 구해서 가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요.”
“상관없어요. 약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지원은 뭐든 다 해 줄 테니까 만들어 줘요.”
“알겠습니다.”
캐슬린은 알렉시스를 돌아보았다.
“에디스 양이 이곳 별관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해 주세요. 약을 꾸준히 만들려면 외부에서 들락날락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래.”
알렉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승낙했다. 에디스는 제 의사는 왜 아무도 묻지 않는 건지 황당했지만, 생각해 보니 캐슬린의 제안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재료는 미리 준비해 둔 것을 가져오기만 하면 되고, 대공저의 별관이라면 예전에 지내던 외곽의 오두막이나 마이어의 여관을 전전하는 것보다 훨씬 편할 테니까.
‘저 사람이 아직도 약을 제대로 안 먹고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을 거고.’
이미 일에 대한 보수는 충분히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뢰인이 제 처방을 따르지 않는 것을 모르는 척 넘길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뻔뻔하지 못했다.
캐슬린이 별관에서 머무르는 동안 살펴 줄 시녀를 보내 주겠다고 말하던 찰나, 에밀리가 들어와 루치가 깨어났다고 알렸다.
환자의 상태도 살펴볼 겸, 응접실을 서둘러 벗어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려는 에디스의 앞이 가로막혔다.
“잠깐.”
알렉시스는 캐슬린이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하더니 물었다.
“캐슬린과 만났다는 사실을 왜 내게 알리지 않았지?”
“별일 아니었어요. 우연히 마주쳤는데 저를 보시는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하시길래,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정부가 아니라 약제사라고요.”
“앞으로도 필요 없는 말은 하지 마.”
“알겠습니다.”
에디스는 툴툴거리면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외관으로 보기에는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요즘은 좀 어떠세요?”
“더 나빠지지는 않았어.”
“제가 저번에 드렸던 약은 잘 드시고 계신가요? 떨어질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카벨 선생님의 말로는…….”
“네가 이곳에 온 이유는 내가 아니라 내 아들 때문이야. 그 애를 낫게 하는 데만 신경 써.”
알렉시스가 냉정하게 말을 자르자 에디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의 상태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들은 말로 짐작해 보면 아버지로부터 독을 물려받은 것 같았다. 아마 태에 있을 때부터 영향을 받았겠지. 처음 중독된 이를 완전히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낸 후에야 간접적으로 중독된 이를 치료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럼 공자를 치료하려면 결국 먼저 대공을 치료해야 한다.
‘설마 아들이 자기 때문에 아프다는 걸 모르는 건가?’
그는 제 아내가 제 상태를 알지 못하길 원했으니, 대공비도 남편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에디스는 부부가 서로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지 못한 채, 이런 일은 보수를 배로 쳐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타사르트 약초는 어느 정도 확보를 해 뒀지만 두 분이 모두 충분히 복용하기에는 부족해요. 일단은 농도를 조절해서 원액보다 조금 묽게 만든 다음 양을 나누는 게 낫겠어요. 공자님은 아직 어리니 성인보다는 적은 양을 복용해도 괜찮아요.”
“아니, 원액 그대로 제조해.”
“네?”
“농도를 낮추면 효과도 떨어질 게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원래대로 제조하면 양은 현저히 줄어들어요. 두 분 중 한 명은 충분한 양을 복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타사르트는 농도도 중요하지만 복용하는 기간도 중요해요.”
“아이는 적은 양을 복용해도 괜찮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
그제야 알렉시스의 말뜻을 알아챈 에디스가 황당하다는 투로 물었다.
“그럼 전하는 아예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말씀이세요?”
“두말하고 싶지 않아.”
알렉시스는 힘주어 말했다.
“내 상태는 나아진 지 오래니 신경 쓰지 말고 아이를 우선으로 생각해.”
그는 그대로 응접실을 나섰다. 머릿속이 복잡해 걸음이 빨라졌다.
어째서 캐슬린의 아이가 원인 불명의 병을 앓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신열에 휩싸여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지던 작은 몸을 떠올리면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캐슬린이 죽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와 같이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 아이는 살려야 해.’
캐슬린이 슬픔에 빠지는 것도, 그녀를 닮은 푸른 눈이 다시 저를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약은 임시방편일 뿐이야.’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알렉시스는 제 명을 따르는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정제가 끝난 마정석은 얼마나 되지?”
“열 개쯤 됩니다.”
“떼어 내 옮겨라.”
“명 받들겠습니다.”
여기서 마정석의 수를 줄이면 캐슬린이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그녀를 제 옆에 묶어 두고 싶었던 치졸한 욕망을 들키게 되면, 지금껏 유지했던 아슬아슬한 평화는 단번에 찢어질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먼저 아이를 살리는 거다. 그에게 그림자를 보내는 이유는 그뿐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알렉시스의 부르쥔 주먹에서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 * *
그날부터 캐슬린은 방에 틀어박혀 루치를 간호하는 데 힘썼다. 알렉시스도 한동안 곁을 지키며 떠나지 않았으나, 새로 황제가 된 페터를 견제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대공저에만 머무를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이른 시각, 캐슬린은 궁정 회의를 위해 떠나는 알렉시스를 배웅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잘 못 잔 건가?”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뺨과 눈 아래를 쓸었다.
“눈이 부었는데.”
“루치가 자다가 칭얼거리는 바람에요.”
“유모가 있는데 뭐 하러 밤을 지새워. 아이도 중요하지만, 난 네가 더 소중해.”
“…….”
“어머니가 먼저 제 몸을 먼저 챙기지 않으면 아이도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것 명심해.”
“……네. 그럴게요.”
알렉시스는 몇 번이고 캐슬린에게 쉬겠다는 다짐을 받아 내고 나서야 말에 올랐다. 어스름한 새벽빛을 받으며 황궁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캐슬린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뺨을 다시 문지르는 캐슬린의 손길이 다소 거칠었다.
‘요제프의 치유력이 해독에 제일 큰 효과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내게 말하지 않아.’
오솔레 마을의 빵집에서 마주쳤을 때.
쓰러진 그를 치유력으로 돌봐 준 것도 요제프였다. 분명 그는 제 상태가 요제프 덕에 나아졌다는 것을 알 터였다.
아이가, 내가 소중하다고 말하면서 요제프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다.
‘결국 그 사람에겐 저 자신이 제일 소중한 거야.’
그는 철저히 그녀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어 곁에 머무르게 할 생각이다. 그는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캐슬린은 다시 루치가 잠들어 있을 침실로 돌아갔다.
“대공비 전하.”
이른 아침인데도 에디스가 와 있었다.
“아이의 상태를 살피러 왔나요?”
“네. 저도 영아를 대상으로 약을 만들어 본 적은 없어 조심스럽네요. 투여량을 계산하려면 직접 보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녀는 에밀리와 유모에게 루치가 평소에 물이나 음료를 얼마나 마시는지를 꼼꼼하게 묻고 뭔가를 기록했다.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이후 에디스는 캐슬린을 돌아보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그녀는 따로 자리를 옮기기를 청하더니 주위에 듣는 귀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캐슬린은 그녀가 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원 안의 온실로 향했다.
에디스는 의자에 앉자마자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대공 전하를 말려 주셔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