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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71)화 (71/110)

71화

캐슬린은 그날 이후로 저택 안에서 마정석을 몇 개 더 발견했다.

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저택 전체 구석구석에 조금씩 설치되어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온실과는 달리 실내에는 태피스트리와 커튼으로 가려진 구석에 빛이 나지 않는 마정석이 하나씩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모르는 척 지나치면서 마정석의 위치를 하나둘씩 외웠다. 그러고 나니 마정석이 일정 주기에 따라 교체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정 구역에 설치된 마정석이 동시에 회수되어 사라지기도 하고, 또 가끔은 새로 설치되기도 했다. 회수된 마정석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크게 배치가 바뀌지는 않았기에, 대부분 캐슬린은 마정석의 힘이 약한 미로 정원으로 가 힘이 아직 남아 있는지를 시험해 보곤 했다.

‘나를 황후의 하수인으로 믿었을 때와 지금이 뭐가 달라.’

손가락 끝에 어리는 냉기를 확인하면서 캐슬린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같은 처지에, 한순간이나마 저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알렉시스 발텐은 저를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발목을 붙잡아 옆에 주저앉히려 했을 뿐.

캐슬린은 냉기를 거두고 장갑을 낀 후 정원을 벗어났다. 작위 수여식을 위해 새로 맞춘 예복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마님, 공작가보다 대공가의 예복은 더 화려하네요.”

에밀리가 감탄하며 재단사가 가져온 예복을 내보였다.

금사로 화려한 수가 놓인 흰색 드레스는 치맛단의 끄트머리부터 시작해 허리와 가슴, 소매에 붉은 벨벳이 덧대어져 있었다. 소매에서 연결되어 어깨에서 길게 늘어진 붉은 벨벳은 마찬가지로 화려한 발텐 가의 문양이 수놓여 있었는데, 역시 금색이었다. 알렉시스의 눈 색과 꼭 같은.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는 보관에도 붉은 벨벳으로 장식돼 있었고, 길게 늘어진 베일이 마치 결혼식에 썼던 면사포처럼 달려 있었다.

“이거 보세요, 도련님도 같은 디자인이에요.”

에밀리가 뿌듯한 얼굴로 소파 위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루치를 데리고 왔다. 마찬가지로 흰색과 붉은색, 금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예복이 귀여웠다.

“정말 귀엽다, 우리 루치.”

캐슬린이 아이를 받아 안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에밀리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집사님께 들어 보니 원래 아기는 작위 수여식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예복을 맞추지 않는다는데, 주인님께서 따로 명하셨대요.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걸 보니 안 맞췄으면 슬플 뻔했어요.”

아이를 작위 수여식에 데리고 가면 발텐의 공자로서 널리 알려지게 될 테니까 그런 거겠지.

곧바로 든 냉소적인 생각에 저도 놀랄 지경이었지만, 떠나기 전까지는 그가 의심하지 않도록 행동해야 했다. 캐슬린은 대공비의 드레스를 걸치고 보관을 쓴 후 거울 앞에 섰다.

전에 없이 화려한 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어쩜, 아기 공자님과 마님의 모습을 같이 보니 제가 다 뿌듯해요.”

에밀리가 눈시울을 붉히며 기뻐했다. 루치도 방긋거리며 캐슬린을 향해 팔을 뻗었다. 에밀리가 아이를 안겨 주러 가까이 다가갔을 때, 캐슬린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에밀리. 전에 말했었지? 나랑 같이 간다고.”

“네?”

“꼭 데려가 달라고 했잖아. 함께 가자.”

“마님, 설마…….”

에밀리의 눈이 커졌다. 두려운 마음에 다시 떠날 거냐고 입 밖으로 꺼내 묻지 못하는 듯했다. 캐슬린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 뭔가를 물으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둘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캐슬린.”

대공의 예복을 차려입은 알렉시스가 들어서고 있었다. 캐슬린은 부러 밝게 웃었다.

“알렉. 어쩐 일이에요?”

루치를 안고 거울 앞에 선 캐슬린을 본 그가 잠깐 멈칫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잘 어울리는군, 둘 다.”

“다행이네요. 루치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알렉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캐슬린의 어깨와 소맷자락에 새겨진 발텐 가의 문양을 손으로 훑었다. 아이와 제가 함께 발텐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 것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한 눈치였다.

느리게 이어지던 손길이 목으로 향했다. 장신구는 아직 착용하지 않은 상태여서 맨 살결에 그의 체온이 닿았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어 캐슬린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액세서리를 가져왔어. 대공비에게 어울릴 만한 것으로.”

그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벨벳 상자의 뚜껑을 열어 내밀었다. 최상급 진주를 여러 줄로 알알이 엮어 만든 목걸이였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하나하나의 진주들은 그녀가 여태 본 것 중 제일 아름다웠다.

“마님과 정말 잘 어울리는 목걸이네요.”

에밀리가 감탄하며 칭찬했으나 캐슬린은 저도 모르게 목걸이에 마정석이 없는지를 먼저 살폈다. 부서진 귀걸이를 버렸기 때문에 그가 다른 족쇄를 채우려 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그녀는 마정석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씁쓸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알렉시스가 물어 왔다. 캐슬린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단지 너무 화려한 건 아닌가 해서…….”

“대공비인데 이 정도면 검소하지.”

그가 상자에서 목걸이를 꺼내며 말했다.

“내가 직접 걸어 줄게.”

에밀리가 루치를 받아 안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캐슬린은 늘어뜨린 머리칼을 한곳으로 모아 묶으며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목에 드리워지는 차가운 진주와 대비되는 온기 어린 손길이 부드럽게 살갗을 스쳤다. 캐슬린은 빠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익숙한 듯 낯설게 느껴지는 그의 향기가 코끝으로 밀려 들어와 심장이 유난스레 뛰었다.

잠금쇠를 돌려 마무리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의 품 안에 안긴 듯해 마음이 이상했다. 캐슬린은 드레스 자락을 꽉 쥐고 얼른 그가 멀어져 주기를 기다렸다.

“다 됐어.”

실제로는 몇 초였겠지만 수 분으로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알렉시스가 옆으로 비켜섰다. 커다란 거울에 캐슬린의 전신이 온전히 비쳤다. 온통 희었던 살결이 은은하게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얼굴이 붉어졌군.”

“……좀 더워서요.”

“추위 잘 타는 체질이잖아.”

“아이를 낳고 바뀌었나 봐요.”

“그럼 이번 겨울에는 가죽을 덧댄 코트를 더 만들라고 할게.”

그녀의 거짓말을 알아챈 알렉시스가 더없이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의심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캐슬린은 차라리 얼굴이 붉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목걸이, 수여식에 꼭 하고 갈게요. 저번에 당신이 선물했던 귀걸이가 부서져서 아쉬웠거든요.”

“그래.”

알렉시스의 눈빛이 천천히 발텐 가의 상징으로 둘러싸인 캐슬린을 훑었다. 그는 느릿하게 말했다.

“혹시 내가 더 모르는 일이 있다면 알려 줘.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모르는 일이라뇨?”

“너에 대해 다 알고 싶어. 여태까지 그러지 못했으니까.”

목울대가 뻣뻣해졌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알렉시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잡아 오며 속삭였다.

“이제 네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 천천히 알려 줘. 기다릴게.”

손등에 천천히 맞춘 입술이 뜨거웠다. 캐슬린이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난 후에야 알렉시스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종 모양으로 풍성하게 부푼 드레스 자락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거울 뒤로 향했다. 발텐 대공비의 옷을 빨리 벗어 버리고 싶었다.

닿지 않는 등 뒤 리본을 풀려니 목에서 잘그락 소리가 났다. 그제야 캐슬린은 진주 목걸이를 기억해 내고 목에서 그것을 빼냈다. 얼마 착용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자유로워진 목이 허전했다.

‘왜 그랬어요?’

우윳빛 진주알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역시 친부인 에버튼 윈스턴과 다를 것이 없었다. 겨울 요정의 피가 발현하는 능력을 없는 것처럼 감추기를 바라니까.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준 친구와는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당신의 새장 속에서 갇혀 눈을 가리고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존재인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사랑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게 만든 건 당신이야.’

캐슬린은 떨리는 손으로 젖은 눈가를 훔쳐 냈다.

* * *

대관식과 작위 수여식은 순조롭게 치러졌다.

대신관의 축도와 함께 황제의 관을 쓴 페터가 알렉시스에게 대공의 작위를 내렸다. 황실의 방계에게 내려 주는 이름에 불과했던 발텐이 황태자에 버금가는 권위를 갖는 순간이었다.

발텐 공작이 아직은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엎드려 있는 것일 뿐, 때를 보아 황제의 뒤통수를 쳐 배신할 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으나 새로운 황제의 의지가 워낙 강해 궁정 회의의 일원들은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군요.”

절차가 모두 끝나고 휴식 시간을 가진 후, 비공식 오찬 자리에서 다시 모인 페터가 루치를 보고 반가워했다.

“아기 공자는 저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많이 자란 듯한데? 걸음마는 시작했나요?”

“네, 요즈음 혼자서도 잘 걸어 다닌답니다. 폐하께서 많이 아껴 주신 덕분이에요.”

루치도 페터를 알아보고 손을 뻗으며 알은척을 했다. 그 모습에 캐슬린은 성인식에 갑작스러운 황제의 서거, 대관식 준비까지 겹쳐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음에도 고모를 기억한 아이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루치의 유모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셴베르크 백작에게 아이를 넘겨주었고, 그는 조심스레 다시 아이를 페터에게 안겨 주었다. 루치는 낯선 공간과 처음 본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그 과정에서 내내 방긋거리며 웃었다.

“루치, 황궁에 자주 놀러 오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조카를 한참 어른 페터가 다시 아이를 건네주었다. 캐슬린은 무의식적으로 알렉시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 역시도 기분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페터에게도 루치와 함께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와야겠지.’

셴베르크 백작이 루치를 안아 유모에게 넘겨주는 것을 보며 생각할 때였다. 까르륵거리던 아이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지고 유모의 옷을 붙잡으려던 팔이 축 늘어졌다.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뻣뻣하게 굳는 아이의 모습에 캐슬린의 손에서 식기가 떨어졌다.

“루치!”

알렉시스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리석이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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