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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67)화 (67/110)
  • 67화

    페터가 덜덜 떨며 황후를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폐하께선 유언하셨다. 네게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유언이라니요! 황궁의는 폐하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되실 리 없어요.”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어. 네가 황제의 유일한 적통이니 황제가 될 거다.”

    “어머님!”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앵무새처럼 고집스럽게 본인의 말만 되풀이하는 황후에게 질린 페터가 탄식했다. 그러다 아직 문가에 서 있을 황궁의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휘장을 걷으려 했다.

    “이미 끝났어.”

    그런데 황후가 침착하게 그를 저지했다.

    “폐하께선 여기까지이신 거다.”

    페터의 팔을 꽉 잡은 손은 어느 때보다도 강인했다. 페터는 아니길 바라며 물었다.

    “설마…… 아니시죠?”

    황제는 어제까지만 해도 죽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정도로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돌연사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할 이유도 없었다.

    “모두 나가거라.”

    황후는 태연자약하게 휘장 너머의 이들에게 일렀다. 일사불란하게 침실을 나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페터는 제 예감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말 어머님이 시해하신 겁니까?”

    “폐하께도 나쁜 일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때에 돌아가시면 적통인 네가 난감해질 것을 그분이 원하셨겠느냐? 다 계획이 있었다.”

    “어머님!”

    페터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외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습니까? 폐하를 제외하면 직계 남성 황족은 형님밖에 남지 않는다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끝까지 날 기만할 셈이냐?”

    황후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며 페터의 팔을 떨쳐 내더니,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문서 여러 장을 페터의 가슴에 내던졌다.

    “북부 이민족에 대한 정보와 윈스턴 백작의 가신들이 증언한 내용이다!”

    페터는 떨리는 손으로 그 문서를 주워 읽어 보았다. 윈스턴 백작의 가신들이 아내로 삼은 북부 이민족 출신 여자들이 임신 기간에 관해 증언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황후가 빈정거렸다.

    “발텐 공작저에 있는 그 애, 발텐 공의 핏줄이 맞더구나. 게다가 너, 몰래 황궁 뒷문으로 드나들며 캐슬린 윈스턴을 도왔다지?”

    “……그건.”

    “언제까지 이 사실을 숨길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그제야 페터는 어머니가 왜 이리 무모한 짓을 시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제국이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움직인 것이다. 오로지 저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진작에 황태자 자리 따윈 버리고 떠났어야 하는 건데. 어머니의 인정 따위가 뭐라고.’

    오늘처럼 제가 어리석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페터가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리자 황후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네가 성인이 된 데다 황제의 유언이 있으니 명분은 충분해.”

    “어머님. 폐하를 이리 만든 것만 해도 대죄인데 반성하실 생각은커녕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제정신이십니까?”

    “내가 제정신일 수 있겠느냐? 널 황제로 만들어야 하는데!”

    황후가 벌컥 화를 내며 페터를 밀쳤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떠밀려 비틀거린 딸을 내려다보는 눈은 맹목적인 욕망 외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이야기가 다 되었으니까. 발텐 공은 이 어미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다. 황제의 유언을 빌미로 소환했으니 오지 않고 배기겠느냐.”

    어디까지 손을 뻗친 것일까. 성인식에 신경 쓰지 않으시더니 이런 일을 꾸미려고 그러셨던 걸까.

    눈앞이 캄캄해지고 기가 막혔다.

    “형님까지 건드릴 생각 마십시오.”

    “그놈을 먼저 쳐서 숨만 붙어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트리벨리언에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을 거고, 비밀이 새어 나가도 괜찮아져.”

    말로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은 글렀다. 이 정도로 비이성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진작 조치를 취했을 텐데 후회가 되었다.

    ‘형님이 오실 리 없어.’

    그러나 모친에게 모질 수 없는 자신과 알렉시스 발텐은 달랐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황태자를 안전한 곳에 모시고 호위를 세워 아무도 접근치 못하게 하라.”

    황후는 망설임 없이 호위 기사를 불러 명했다.

    “이거 놔!”

    페터는 있는 힘껏 발버둥 치며 기사들에게 붙잡힌 팔을 떨쳐 내려 애썼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페터는 어쩔 수 없이 알렉시스와 캐슬린만이라도 이미 황궁을 빠져나갔기를 빌었다.

    “전하?”

    기사들에게 이끌려 침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셴베르크 백작이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자넨 아직도 안 갔나?”

    외부인에게 황실의 치부를 보이고 말았다는 생각에 비참해졌다. 외면하고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데 셴베르크 백작이 다급히 따라오며 기사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전하를 구금하려 드는가? 당장 이 손 놓게!”

    “황후 폐하의 명입니다. 안전해질 때까지 전하를 모실 겁니다. 백작께서는 돌아가십시오.”

    “그럴 수 없네!”

    셴베르크 백작은 몸싸움까지 벌여 가며 페터를 풀려나게 하려 애썼다. 그러나 황제궁의 응접실에 갇히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들어가 계십시오, 전하.”

    기사 하나가 페터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그리고 응접실 안에 밀어 넣은 채 쇠사슬을 꺼내 들었다. 셴베르크 백작이 급하게 문 사이에 발을 끼워 넣으며 외쳤다.

    “내가 전하를 모시게 해 주게.”

    명색이 황태자의 부관인 데다 백작이라 끈질기게 따라붙은 그를 강제로 끌어낼 수는 없었다. 기사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선선히 고갯짓했다.

    “들어가십시오.”

    셴베르크 백작이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문이 잠겼다. 쇠사슬을 몇 바퀴나 둘러 감고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셴베르크 백작은 황급히 바닥에 쓰러진 페터에게 달려갔다.

    “전하!”

    기절한 페터는 힘없이 흔들리기만 할 뿐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황태자의 다리 밑으로 손을 넣어 들어 올려 안았다.

    ‘왜 이렇게 가볍지?’

    막 성인이 된 남성이라고 치기에는 의아한 무게였다. 하지만 우선 페터를 소파에 눕히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셴베르크 백작은 빠르게 움직였다. 정자로 누운 페터의 호흡은 숨을 쉬기가 불편한 듯 불안정했다.

    창가로 가서 문을 열려 했으나 덧문이 밖에서부터 잠겨 있어 열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와 숨을 쉬기 편하도록 황태자의 크라바트와 목까지 채운 셔츠 단추, 꽉 죄는 상의 단추를 몇 개 풀어내던 찰나였다. 드러난 빗장뼈로부터 한 뼘쯤 아래 붕대가 보였다.

    ‘부상인가?’

    요 며칠 검술 훈련은 중지한 것으로 아는데 어디서 다치기라도 한 걸까, 생각하던 셴베르크 백작은 붕대가 감긴 부위가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붕대를 감은 방향으로 짐작해 보건대 상처를 가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페터의 곁에서 떨어졌다. 제국의 황태자가 감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분명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황태자를 보고 정신을 차린 셴베르크 백작은 다시 셔츠 단추를 잠갔다. 그리고 제 겉옷을 벗어 덮어 준 후 멀찍이 물러났다.

    이제야 황태자의 의문스러운 행동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군.’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정국은 달라지겠지. 황제와 궁정 회의를 속여넘긴 죄로 황태자는 끌어내려지고, 남부의 핏줄이 흐르는 발텐 공작이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면 남부의 셴베르크 왕조가 다시 부흥하는 것도 헛된 꿈은 아니었다.

    ‘그럼 황태자는?’

    아마 외딴 탑에 유폐되고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받겠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셴베르크 백작은 탁자 앞에 앉아 쉽사리 결론 내리지 못한 채 비밀을 숨긴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조용하던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난투가 벌어지는 듯했다. 황태자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셴베르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벽난로의 부지깽이를 주워 들고 문 앞에 섰다.

    이윽고 쇠사슬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한 남자가 들어섰다.

    “각하?”

    피로 흥건한 검을 쥔 발텐 공작은 응접실을 둘러보더니 소파에 누운 황태자를 발견하고 셴베르크 백작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황후 폐하께서 쓰러지셨다는 이야기에 황제궁으로 오셨는데, 갑자기 침실에서 기사들에게 끌려 나오셨다가 목덜미를 맞고 기절하셨습니다.”

    상황을 들은 발텐 공작이 손짓하자 무장한 기사들이 누군가를 잡아끌고 데려와 셴베르크 백작 앞에 무릎 꿇렸다. 황태자의 목덜미를 내리친 자였다.

    “황태자에게 무력을 행사한 기사가 이자인가?”

    “아…… 네. 맞습니다.”

    발텐 공작은 무표정한 낯으로 명했다.

    “심문해.”

    “예, 각하.”

    그자와 함께 황태자를 구금한 기사가 공작의 편에 서서 검집으로 꿇어앉은 기사를 후려쳤다.

    “황후가 보낸 자객이 어디로 갔는지 실토해!”

    “말할 수 없…… 컥!”

    저들이 동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발텐 공작이 황후의 호위까지 매수했을 줄은 몰랐다. 구타로는 입을 열지 않아, 검을 빼 든 심문을 견디지 못한 기사는 결국 황후가 내렸던 명을 털어놓았다.

    “바, 발텐 공작저로. 공작 부인을 죽이고 공자를 데려오라는 명이 있었다!”

    발텐 공작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는 짧은 명을 남겼다.

    “황태자를 호위해라.”

    “명 받들겠습니다.”

    검을 내던지고 달려나가는 그는 급박한 낯이었다. 기사들 몇이 그를 따르고, 남은 기사들이 황후의 기사를 끌고 나가며 황태자 주위로 다가갔다.

    셴베르크 백작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부지깽이를 던져 버리고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모실 테니 다들 물러나시오.”

    명색이 부관이니까 제가 해야 옳았다. 셴베르크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기사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 황태자를 다시 안아 들었다.

    * * *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황궁에서 공작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는데도 말이 너무 느려 조바심이 났다.

    ‘제발, 무사하기를.’

    속이 타들어 갔다. 안전하게 도착했을 거라고 믿고 싶었으나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그림자를 셴베르크 백작이 아닌 캐슬린에게 붙여 놓을 것을.

    황후의 목숨을 붙여 놓은 것이 후회되어 이를 갈았다.

    공작저로 향하는 오솔길에 다다르자 나무가 불에 탄 듯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정석.’

    발텐 가의 마차에 박아 놓은 마정석이 폭발했다. 캐슬린의 상성에 맞추어 놓은 마정석은 그녀의 힘이 발현될 때마다 반응하게 되어 있었다. 캐슬린이 얼음을 불러내려는 힘을 강하게 사용하길 원했다면 위험이 닥쳤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말에서 내려 미친 듯이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길의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나뭇조각이 사방에 널려 있고 숨을 거둔 자객의 시신이 즐비했다.

    “캐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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