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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66)화 (66/110)
  • 66화

    검은 옷과 복면으로 정체를 숨긴 사내들 몇이 찬 바람과 함께 안쪽으로 들이닥쳤다.

    “끌어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캐슬린은 억지로 몸을 뒤로 물려 마차 벽에 바짝 붙었다. 본능적으로 저들에게 끌려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제발.’

    있는 힘을 다해 얼음 기둥을 불러내려 애썼지만 야속하게도 능력이 사용되질 않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팔을 잡아끌었다. 캐슬린은 그들에게 이끌려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는 이미 땅바닥에 엎어져 죽어 있었다. 자객들이 아름드리나무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뛰어내려 공격한 것 같았다.

    “발텐 공작 부인이 맞군.”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캐슬린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소름 끼치게 생기긴 했지만 꽤 반반한데. 이대로 데려가긴 아깝잖아?”

    “안 됩니다. 산 채로 데려오라는 명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죽인다고 했어? 재미만 보자는 거지. 어차피 그년은 공작 부인이 치욕스러워했다고 하면 더 좋아할 것 같던데.”

    부하들이 말리려는데도 그는 흐흐 웃으며 뺨을 쓰다듬으려 들었다. 캐슬린은 그 손을 거세게 쳐 내며 외쳤다.

    “날 데려오라고 한 게 누구냐?”

    “이년이!”

    수작을 걸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그대로 캐슬린의 뺨을 내리쳤다. 고개가 돌아가며 귓불에서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귀걸이가 빠지며 귓불이 찢어진 것 같았다.

    “몸뚱이는 성하게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런 배려 같은 건 해 줄 필요도 없겠군. 검 이리로 가져와!”

    캐슬린의 어깨를 강하게 밀친 남자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검을 찾아오려 뒤를 돌았다. 뒤로 밀려난 캐슬린의 등이 마차에 닿았다. 물러날 곳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캐슬린이 다시 한번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발 한 번만……!’

    검을 들고 마차를 주변으로 빈틈없이 둘러싼 검은 옷의 사내들이 점차 가까워질 때였다. 캐슬린의 손에서 작살처럼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쏘아져 나갔다.

    “윽!”

    길고 뾰족한 얼음 조각을 얼굴에 맞은 이들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며 몇 발짝 물러났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그들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제일 놀란 건 캐슬린이었다.

    이전처럼 완전한 힘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돌아온 것 같았다. 캐슬린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 오지 마.”

    그러나 얼음 결정은 자객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잠깐 주춤했던 자객들은 다시 검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팔다리는 베어 버려도 좋다!”

    캐슬린은 비명을 지르며 열려 있는 마차 문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검날이 마차의 문을 부쉈다.

    콰지직.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잘게 깨어지며 날카로운 나뭇조각으로 변해 자객들을 향했다.

    “으윽!”

    “피해! 마차에 마정석이 박혀 있다!”

    문이 완전히 부서지고 나자 마차도 내려앉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형체가 무너지고 날카롭게 깨어진 조각들이 주변에 둘러싸고 있던 자객들에게 쏟아졌다. 몇몇은 눈에 나뭇조각이 박혀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졌다.

    캐슬린은 정신없이 몸을 낮추고 기다시피 해서 수풀로 숨어들었다. 얼마 안 있어 마차가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마정석이라니. 그건 연금술사나 사용하는 물건인데 그게 왜…….’

    누가 발텐 가의 마차에 수를 써 놨던 걸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자객들은 마차가 무너지며 날아온 나뭇조각을 피하지 못했는지 사방에 널브러져 움직이지 못한 채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자들도 여럿이었다.

    덜덜 떨며 주위를 살피던 캐슬린은 귀가 아파 와 귓불을 매만졌다. 알렉시스가 선물했던 귀걸이가 한 짝은 사라졌고, 나머지 한 짝은 방금 급하게 몸을 피하다 이음새가 비틀린 듯했다. 아예 빼 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 조심스럽게 귀걸이를 빼내 손에 쥐었을 때였다.

    “이민족 계집년이!”

    아까 우두머리로 보이던 사내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캐슬린이 내민 한쪽 손에서 커다란 얼음 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으아악!”

    육중한 얼음 기둥이 그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었다. 자객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음에 붉게 물들었다.

    캐슬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온몸이 다 떨렸다. 그녀는 겨우겨우 시체로부터 물러났다.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눈앞에 낭자한 시신이 꿈일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게다가 그중 하나는 제가 죽인 사람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힘이 다시 나타날 줄 몰랐어.’

    아까까지만 해도 작살 정도의 가느다란 조각이었는데, 갑자기 왜 얼음이 커진 걸까.

    거의 반년 만에 돌아온 힘이었다. 목숨을 지킬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만 의심스러웠다. 반년 만에 사라졌던 능력이 갑자기 다시 돌아오다니.

    그러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손을 펴 보았다. 부서진 귀걸이가 보였다.

    ‘혹시.’

    얼음 결정을 만드는 능력이 점점 힘을 잃게 된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봤다.

    ‘발텐 공작저에 다시 돌아왔을 때야.’

    그리고 아예 간단한 얼음마저 만들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이 귀걸이를 선물받았을 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얼추 시기가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만약 마정석을 마차에 박아 놓았던 게 외부 세력이 아니라 만약…….

    머릿속에 수많은 가설과 의혹이 어지럽게 떠다녔다. 신음을 뱉던 자객들은 어느덧 싸늘하게 식어 움직이지 않았다.

    수풀 사이에 숨어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새벽이 되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멀리서 아련하게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한 명이 앞서고 여러 명이 뒤따르는 듯했다. 캐슬린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캐슬린!”

    애타는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그녀가 이 순간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자 제일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이윽고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새파랗게 질린 낯이었다. 다급하게 제가 다치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아무 의심 없이 두 팔을 벌렸고, 캐슬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 * *

    “어머님께서 쓰러지셨다고? 대체 언제부터?”

    “연회장에서 나오신 뒤였습니다. 바로 황제궁으로 향하셨는데, 폐하의 침실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으셨다고 합니다.”

    “우선 밖에 소식이 새어 나가지 않게 잘 단속해.”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던 게 그냥 하신 말이 아니었던 걸까.

    페터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에도 꾀병을 부리시는 줄 알고 걱정하지 않았는데 진짜로 아프신 줄 알았으면 진작 신경 쓸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후회됐다.

    막 황제궁으로 들어섰을 즈음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평소와 같이 철저한 호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어머님이 혼절하신 것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유난히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쟁이라도 날 듯한 분위기군요.”

    뒤에서 따르고 있던 셴베르크 백작이 중얼거렸다. 그제야 페터는 부관 삼은 그를 황제궁까지 데려오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넨 이만 돌아가.”

    “홀로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도 명색이 전하의 부관인데 함께하게 해 주시지요.”

    “말장난할 생각 없어. 황실 내부의 일이니 더 나서지 말게.”

    막 황제의 침실로 들어서려던 찰나 셴베르크 백작은 페터에게 저지당했다. 험상궂은 인상의 기사들도 합세해 문을 열어 주며 그를 막았다. 페터는 체념한 셴베르크 백작을 밖에 남겨 두고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문가에 서 있던 황궁의가 부들부들 떨며 인사를 올렸다. 분명 어머님을 살펴보고 있어야 할 의사가 멀찍이 떨어져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님을 모시지 않고 여기서 뭘 하느냐?”

    페터가 기가 막혀 목소리를 높였을 때였다.

    “이리로 오너라.”

    황후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혼절하였다더니 정신을 차리신 것일까 하여 페터가 급하게 황제가 누워 있을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어머님, 쓰러지셨다 들었습니다. 지금은 괜찮으신…….”

    불투명한 휘장을 걷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페터를 돌아보는 황후가 보였다. 그녀는 멀쩡해 보였다.

    “어머님?”

    “소란 떨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낮지만 침착한 목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페터는 일단 어머니의 명대로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병환이 깊어져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황제는 오늘도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오늘이 네 성인식이니, 이젠 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폐하께 말씀드렸어.”

    “무엇을 말입니까?”

    “네가 황태자비를 맞을 수 없는 이유.”

    다소 급작스러운 말에 페터는 당황한 나머지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꺼풀은 미동도 없었다.

    “……무어라 하시던가요?”

    “달리 하실 말씀이 있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 리 없잖습니까.”

    페터가 여자라는 사실은 아비인 황제도 모르게 철저히 숨긴 비밀이었다. 더구나 적통 황자를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그였다. 이 사실을 알고도 이해할 리 없었다. 황후건 황태자건 당장 끌어내 목을 치라고 말하면 모를까, 절대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을…….

    의아함과 불길함이 한데 뒤섞인 채 어머니의 답을 기다리는 페터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황후의 관을 쓴 어머니가 웃고 있었다.

    “설마……!”

    페터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소리를 냈으나 황후는 동요하지 않았다.

    황제의 코 밑에 손을 대어 보았으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급하게 이불을 벗겨 내고 심장 박동을 확인하려 했으나 뻣뻣하게 굳은 몸에 손이 닿은 순간 알 수 있었다.

    황제의 숨은 끊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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