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오랜 시간 동안 곁에서 도와주며 함께해 준 요제프는 제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면 실망할 것이다. 그는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신관으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려고 했으니까.
그래도 마지막으로 딱 한 번, 그가 저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는 걸 믿어 보고 싶어졌다.
“북부가 넓어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근방으로 사람을 다시 보내는 게 낫겠어요. 요제프에게 마이어로 와 줄 수 있는지 전하라고 하겠습니다.”
“마이어로요?”
“네. 지금 요제프는 캐슬린이 형님께 붙잡혀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캐슬린이 형님을 믿어 보고 싶다고 한다면 그 사실을 직접 알려 주셔야죠. 저는 아니어도 캐슬린의 말이라면 믿을 테니까요.”
어느덧 빠른 템포로 흐르던 음악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페터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신사답게 인사를 한 후 캐슬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형님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페터는 단 한 번도 캐슬린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 죽음을 생각했던 날만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녀를 뜻을 존중했다. 이번 역시 그랬다. 울컥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캐슬린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페터.”
그렇게 몇 발짝을 떼기도 전에 득달같이 알렉시스가 다가와 손을 낚아채 갔다. 페터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캐슬린과 눈빛을 교환했다.
알렉시스가 캐슬린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의 생일이니 한 번은 허락했습니다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
“그렇게 부부의 예복을 맞추어 입고 오셨으면서 무슨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대체?”
페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캐슬린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죠. 걱정하지 마세요.”
그가 연단 쪽으로 향하자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길이 생겼다. 잠자코 대기하던 셴베르크 백작이 따라붙으며 무언가를 속삭이자 페터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다른 영애 중 하나와 춤을 추라고 권하고 있을 거야.”
알렉시스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그러라고 했거든.”
“전하의 파트너까지 신경 쓰실 정도로 세심하실 줄은 미처 몰랐어요.”
“그러지 않으면 페터가 내 파트너를 잡고 놔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뻔뻔한 낯으로 주장한 알렉시스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무슨 걱정을 하지 말라는 거지?”
“별거 아니에요.”
“남편 말고 다른 남자가 널 안심시키려는 걸 봤는데 모른 척하라니?”
“정말 별거 아니에요. 그리고 전하는 다른 남자가 아니라 공작님의 동생이세요.”
알렉시스는 한숨을 쉬더니 자연스레 캐슬린의 팔을 잡아 제게 팔짱 끼도록 했다.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페터 이야기는 그만해.”
전에는 허용하지 않았던 몸짓이었다. 의례상 참석하곤 했던 파티에서 그는 캐슬린과의 사이에서 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전혀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대감이 두근거리며 커지기 시작했다.
“이만 가 볼까. 페터는 자리를 지키겠지만 우린 그러지 않아도 돼.”
“잠시만 바람을 쐬고 싶어요.”
캐슬린은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외부 정원에 들렀다가 가는 건 어때요?”
황후는 이미 돌아갔으니 연회장 근처에 없을 거다. 캐슬린은 요제프와 연락이 닿기 전 그에게 확인받고 싶었다.
알렉시스는 군말 없이 자리를 옮겼다. 연회장을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인 공간에서 쉴 새 없이 춤을 추고 났더니 피곤한 기분이었는데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앉아 봐.”
알렉시스가 분수대 앞에 마련된 의자에 캐슬린을 앉히더니 몸을 낮추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영문을 모르고 그를 따라 시선을 내리는데, 그가 치렁치렁한 진줏빛 드레스 자락을 들쳤다. 갑갑하게 발을 조이고 있던 굽 높은 구두가 벗겨져 나갔다.
해방된 발은 자유로움에 편해졌지만 욱신거리는 통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알렉시스는 혹사당한 발을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아까 보니 비틀거리는 것 같아서.”
“파티에 다녀오면 늘 그래요.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허겁지겁 그를 밀어내려는데 발바닥을 간질이듯 문지르는 손길이 묘했다. 이상한 기분에 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늘 그랬는데 난 이제야 알았군.”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발이 아픈지 어떤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지금까지.”
“……….”
“네가 이젠 안 아팠으면 좋겠어.”
툭 던진 말이 가슴에 파고들어 찌르르하게 울렸다. 캐슬린이 저항하지 않자 그는 끝까지 캐슬린의 발을 어루만졌다. 얇은 실크 스타킹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공작님.”
캐슬린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거짓 없이 답해 주시면 좋겠어요.”
“무엇이든.”
당신을 믿고 싶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먼저 다가가고 싶었던 사람이 당신이라서.
캐슬린은 치맛자락을 내리고 다시 구두를 신었다. 의문을 담은 금빛 눈이 저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이 이전처럼 냉정하지 않아서 용기가 났다.
“만약에 제가 당신 곁에 있겠다고 하면, 요제프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요제프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의 입매가 굳어졌다. 그러나 그가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캐슬린은 계속해서 말했다.
“절 위해서 모든 걸 버리겠다고 한 사람이에요. 공작님이 저를 의심하고 돌아보지 않았을 때도 제 곁에 있어 준 사람이고요. 그러니 약속해 주세요. 그의 목숨을 위협하지도 않고, 저를 만나려는 걸 막지도 않겠다고요.”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드럽게 그녀의 발을 매만지던 손은 손등뼈가 드러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저를 온전히 믿고 그렇게 해 주신다면 용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작님을.”
캐슬린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약속할게.”
빠르게 나온 것은 아니었으나 분명하게 들려온 답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이젠 너를 믿으니까. 그자를 해하려 하지도 않고 널 만나려는 것도 막지 않겠다.”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두려움이 삽시간에 녹아 사라졌다. 두려움 대신 차오르는 기쁨에 캐슬린은 손수건을 꺼내 분수대의 물에 적신 후, 그의 손을 닦아 주었다. 그러나 물기를 채 다 닦기도 전에 알렉시스가 팔을 끌어당겨 안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를 마주 안으려 했을 때였다.
연회장에서 들려오던 음악이 멈추더니, 테라스에서 이어진 샛문이 열리고 페터가 뒤를 따르는 셴베르크 백작과 함께 급히 빠져나갔다. 멀리서 무장한 호위 기사 몇이 합류하여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연회장에서는 음악 대신 파티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원래는 새벽까지 계속되도록 계획된 파티였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외부 정원은 황족만 출입할 수 있어서인지 오가는 시종도 없었다. 아무래도 연회장으로 돌아가야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을 듯했다.
“글쎄.”
알렉시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일단 공작저로 돌아가지. 페터가 황후궁으로 향하는 듯하니 사소한 일은 아닐 것 같아.”
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외부 정원에서 나오자마자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시종들 탓에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여기 계셨군요, 각하. 한참 찾았습니다.”
“무슨 일이지?”
“전하께서 각하를 모셔 오라고 전하셨습니다.”
“이유를 밝히지 않으면 갈 생각 없다.”
알렉시스는 강경하게 답하고는 캐슬린을 데리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이미 다른 귀족들은 속속들이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 떠나는 중이었다.
마치 퇴각 명령이 내려진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이미 대기하고 있는 발텐 가의 마차도 공작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막 마차 문을 열고 캐슬린을 들여보냈을 즈음, 안절부절못하며 뒤를 따르던 시종들 가운데 하나가 다급하게 작은 소리로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위독하십니다.”
병석에 누운 지 십 년에 가까워진 황제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제국민 모두가 알았고 그 상태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숨이 끊어진다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시기가 황태자의 성인식 직후라는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유언을 남기실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답했다.
“황제 폐하의 임종은 후계자만 지키는 것이 제국법이다.”
“하지만 각하, 폐하께서 각하의 참석 없이는 유언을 남기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시종의 끈질긴 설득에 알렉시스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황제의 임종에 참석하는 것을 황후가 묵인할 리가 없었다. 명분상이라도 황태자에게 제위를 넘긴다는 공식 유언이 필요하니 말이다.
친모와 저를 버렸을 때부터 황제는 이미 제게 아비가 아니었으나, 이왕 요제프를 보아 넘겨주기로 하였으니 페터를 위해서도 마지막 아량은 베풀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걱정은 마시고 다녀오세요.”
캐슬린이 그의 고민을 눈치채고 말했다.
“기다릴게요.”
“아니, 공작저로 먼저 돌아가 있어.”
황위 쟁탈전을 벌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황제가 사망하면 한동안 어수선할 것이다. 수일 내로 지진이 덮칠지도 모르니 안전한 곳에 그녀를 대피시켜야 했다.
“곧 따라갈게.”
그는 고개를 숙여 캐슬린의 이마에 입 맞춘 후, 문을 닫았다.
“마님을 안전하게 모셔라.”
“예, 각하!”
곧 마차가 출발했다. 캐슬린은 공작의 예복을 입은 채 돌아서는 알렉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에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러지…….’
황제와는 얼굴을 마주한 적이 많지는 않았으나 알렉시스와 페터의 부친이니 그러는지도 몰랐다. 황궁 문을 향해 길게 늘어선 마차들이 하나둘씩 줄어들었다. 다소 늦게 귀환 행렬에 합류한 발텐 가의 마차는 한참 후에 황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요한 밤을 가르고 달려가는 마차가 막 발텐 공작저로 향하는 호젓한 길로 접어들 즈음이었다.
자갈길도 아닌데 갑자기 마차가 크게 덜컹거리더니 마부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으헉!”
“무슨 일인가?”
마부석을 향해 물었으나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안쪽에서 마부석으로 연결된 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말이 날뛰었다. 동시에 마차가 세게 흔들려 캐슬린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누군가 밖에 있어.’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마차 문이 거세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