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다시 마이어에 머무르고 있을 줄은 몰랐군.”
황후는 알현한 지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알은척을 했다. 내내 투명 인간 취급을 받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사벨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호프웰 백작님께서 편의를 봐주셨답니다. 이전에 연을 맺은 적이 있어서요.”
“황태자의 약혼녀 자격으로 맺은 인연이겠지.”
황후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이젠 파혼했으니 약혼녀도 뭣도 아닌데 마이어 귀족들에게 접근해서 허튼소릴 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겠지.”
윈스턴 가의 계집애들이 죄다 되바라진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 황후는 고압적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백작가 영애인데 설마 그러겠습니까, 황후 폐하.”
호프웰 백작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저 역시 윈스턴 가를 복권해 달라 청할 생각은 없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서 잠시 마이어에 머물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예. 폐하께서도 관심을 두실 만한 내용이지요.”
그가 눈짓하자 이사벨라는 가지고 온 종이 몇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황후의 눈이 일순간 번뜩였다.
“북부 성곽의 구조와 군사 배치도라. 이건 어디서 났지?”
궁정에서 파악한 북부의 실상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황후는 문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윈스턴 백작의 딸이라면 이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사벨라는 미소를 지으며 황후가 잘 볼 수 있도록 다른 문서도 앞으로 밀어 주었다. 북부에서 수도 마이어로 진군할 때 필요한 전략이 적혀 있었다.
“윈스턴 백작이 뒤꽁무니로 뭔가를 작당하고 있다더니 사실이었군.”
“제가 황태자비가 되었다면 쓸모없는 정보였겠지요. 실제로 아버님께서도 폐기하라 하셨고요. 물론 약혼이 깨지기 전에 내린 명이시지만…….”
묘하게 늘어진 말꼬리는 황태자의 비밀을 무기 삼으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이렇게 발목 잡힐 것을 알았다면 황태자의 입단속을 더 확실히 할 것을. 쓸데없이 무른 딸자식은 한심하게도 최소한의 예의 운운하며 파혼 상대에게 비밀을 알려 주고 말았다.
황후는 언짢은 낯으로 소리 나게 문서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윈스턴 영애?”
“성인식이 지나면 황태자 전하께서는 더는 결혼을 미루실 수 없을 거예요. 그사이에도 발텐 공작의 후계자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겠죠. 그 전에 움직이셔야 합니다. 북부를 무엇보다 제일 잘 아는 건 윈스턴이니, 폐하께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어요.”
발텐 공작은 친자식도 아닌 아이를 후계자로 삼으면서까지 세를 공고히 하여 황실을 위협하고 있었다. 게다가 수도의 군사에 미치는 정신적 영향력도 컸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 맞서려면 다른 지역의 군사가 필요했다. 야만스럽기로는 남부 못지않은 북부 이민족을 상대한 북부의 군사를 포섭할 수 있다면 상당한 이득이 될 터였다.
몰락한 백작가의 딸이 건넬 마지막 발악다웠다. 황후는 호프웰 백작을 훑어보았다. 그 역시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비밀을 아는 자의 낯이었다.
19년 동안 지켜 왔던 비밀은 점점 숨기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황후는 죽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멀쩡한 발텐 공작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윈스턴 가는 황실에 충성했을 뿐인데 그에 반기를 든 건 발텐 공작이에요, 폐하.”
이사벨라가 속살거렸다. 호프웰 백작이 웃음기 어린 낯으로 말을 거들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무사히 황위에 오르시려면 장애물은 치우셔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발텐 공작의 무엄함이 도를 지나쳤으니 마땅히 엄벌해야지요.”
“호프웰 백도 윈스턴과 같은 뜻인가?”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충성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품 안에서 다른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호프웰 가가 지방 영지에서 거느리고 있는 사병 명단이었다.
“마이어로의 진군을 승인만 해 주시면 제 병사들은 발텐 공작에 맞서 황태자 전하를 지킬 겁니다.”
황후는 발텐 공작에게 허용된 기사단의 규모와 호프웰 백작의 사병 수를 비교해 보았다. 거기에 윈스턴의 북부 군사력까지 합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최대한 미루려고 했던 황태자의 즉위를 최대한 앞당기는 것이 더 좋은 수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계산을 끝낸 황후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 * *
황태자의 생일 축하 겸 성인식은 트리벨리언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화려했다. 정사에 몰두하느라 파티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페터가 놀란 것은 당연했다.
작은 것에서부터 책잡히지 않으려면 검소하게 굴라고 말하던 어머니답지 않았다. 의아해진 페터는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마자 황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1년 치 예산을 오늘 대부분 다 썼을 것 같군요. 어머님께서 이렇게 사치스러운 파티를 허락하셨을 줄은 몰랐는데요.”
“네 부관의 보고에 결재만 했을 뿐이다.”
황후가 턱짓으로 뒤편에 다가온 셴베르크 백작을 가리켰다.
“황태자의 위엄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허락했지. 오늘이 보통 날이더냐.”
“그렇긴 합니다만.”
전에는 괜히 또 약혼 이야기가 나올까 봐 파티의 규모는 할 수 있는 한 줄이자고 했었는데, 무엇이 어머니의 마음을 바꾼 건지 궁금했다. 황후는 빠르게 부채를 흔들며 권태롭게 말했다.
“불평은 그만하거라. 어쨌든 초라한 것보다는 보기 좋으니. 하례도 끝났으니 난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
“벌써요?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머리가 아프구나.”
페터는 그녀의 시선이 발텐 공작 부부에게 꽂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부가 맞춰 입은 예복이 어머니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 분명했다. 트리벨리언의 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두 사람이 부딪히는 상황을 만드느니 한쪽이 피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연회가 끝나면 찾아뵙겠습니다.”
다행히 황후는 순순히 물러났다. 발텐 공작과 황후의 사이를 살피는 건 페터뿐만이 아니었는지, 그녀가 퇴장하자 장내의 분위기가 조금은 느슨해졌다.
“이제야 전하께서도 제대로 파티를 즐길 수 있으시겠군요.”
셴베르크 백작이 능청스럽게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페터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은 채로 샴페인 잔을 집어 들었다.
“그래야지. 누가 황태자궁 예산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써 버렸는데. 안 그러면 손해 아닌가?”
“술 몇 잔 드시는 것만으로 제대로 즐긴다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전하의 옆자리를 노리느라 아직도 파트너가 없는 영애들이 가득합니다. 저분들과 한번 춤이라도 춰 주셔야죠.”
페터는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이래서 파티는 규모를 적게 하는 편이 좋은데 말이다.
“글쎄. 딱히 그러고 싶진 않은데. 관심 있으면 자네라도 대신 가든지.”
“전하께선 영영 결혼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불쑥 들어온 질문에 페터는 넘기던 샴페인이 목에 걸려 캑캑댔다. 샴페인이 기도로 넘어갔는지 기침이 났다.
황태자의 결혼에 대한 것은 황후의 단속 아래, 가볍게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에 가까웠다. 그러니 이리 직접 질문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페터는 셴베르크 백작이 건넨 손수건으로 기침을 막았다.
“갑자기 그건 왜 묻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셴베르크 백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발텐 공작 각하 부부를 보실 땐 더없이 부러운 눈빛이신데, 정작 결혼할 생각은 없어 보이셔서요.”
“자네가 잘못 봤어.”
페터는 차갑게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건 주제넘은 발언이라는 걸 알려 줘야겠군. 내가 자네를 부관으로 삼은 건 능력을 인정해서지 황족의 사생활에 끼어들어도 좋다는 뜻이 아닌데 말이야.”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셴베르크 백작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페터의 굳은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르지 말게.”
페터가 연단 아래로 내려가자 파티가 시작될 때부터 내내 훔쳐보고 있던 귀족 영애 수십 명이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으나, 모르는 척 지나쳤다.
파티가 무르익은 연회장 한가운데에서는 몇 번째인지도 셀 수 없이 이어지던 춤을 마친 발텐 공작 부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갔다.
“형님.”
캐슬린이 돌아보고 가볍게 눈인사를 해 왔다. 페터는 여전히 무표정한 알렉시스를 향해 물었다.
“잠깐 형수님을 빌려 가도 괜찮겠습니까?”
“저쪽에 전하의 파트너가 되고 싶어 하는 영애들이 한둘이 아닌 듯합니다만.”
“그 파트너를 선정하는 데 형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알렉시스가 무어라 하려는 순간 캐슬린이 앞으로 나서며 페터가 내민 손을 잡았다.
“가족이니 한 번은 파트너가 되어 드려야죠.”
알렉시스는 멈칫하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이내 물러섰다. 예전 같았으면 막고도 남았을 텐데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페터가 캐슬린과 함께 새로운 음악에 맞추어 중앙으로 걸음을 떼자, 귀족 영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다음번에는 정말 도망쳐야겠습니다.”
흘깃 그쪽의 동정을 살핀 페터가 중얼거렸다. 캐슬린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파티의 주인공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거의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의무는 다한 셈입니다. 괜한 희망을 주기도 미안하잖습니까. 저들과 다 춤을 출 수도 없고.”
“하긴 그렇네요.”
턴을 돌고 다시 가까워지는 찰나에 페터가 속삭였다.
“아직 북부에서는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네…… 그래도, 요제프가 안전하게 있기만 하다면 언젠가는 연락이 닿겠죠.”
“준비는 해 두고 계십니까?”
아, 그렇지.
캐슬린은 잊고 있던 사실에 심장이 철렁했다. 요제프에게 이곳을 떠나 북부로 가겠다는 증표를 보냈었다.
‘그렇지만…….’
캐슬린은 춤을 추는 동안 알렉시스의 끈질긴 시선이 계속해서 따라붙는 것을 의식했다.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으나 이제 그 시선이 불쾌하고 숨 막히게 여겨지지만은 않았다. 어렴풋하게 저를 향한 열망이 느껴져서일까.
- 내 옆에만 그대로 있어 준다면.
- 아이가 다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됐어.